[Opinion] 선생님의 마지막 여정 [사람]

글 입력 2019.09.0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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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 선생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젊은 나이였다. 지병도 아니었고 교통사고였단다. 나는 바보같이 연로하신 어머니의 소식인 줄 얼핏 잘못 보았다. 그러다 잠들기 전에야 제대로 봤다. 정신이 아득했다. 자연스럽게 '좀 더 잘 할걸', 그리고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이 들었다. 더 좋은 제자였어야 하는데. 조금 덜 아프셨어야 하는데. 부질없는 건 알지만 그게 제일 처음 든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면 바보 같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다치고 죽는데 왜 그게 좀 더 젊은,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건진 잘 모르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내가 세상을 훨씬 무섭고 두려워하면서 살까 봐 그랬을까. 늘 전쟁상태인 것처럼 언제 내가, 소중한 사람들이 죽을지 몰라 벌벌 떨까 봐.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밀려오는 죽음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머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멍하니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만 시간을 주었다. 대체로 호상이라고 불릴 만한 장례식만 갔다. 아흔이 넘었던 증조할머니, 여든 후반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나는 무척 매정하거나 감정이 메마른 손녀가 된 듯 싶었다. 친척들은 꺼이꺼이 목을 놓아 울었지만 나는 눈물 한 방울도 장례식장에서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우리 집에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남겨두고 그들은 무엇을 했나.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으면 있을 때 잘했어야지. 고작 저 곡소리로 살아있을 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만회하려는 것인가. 듣기 싫었다.

장례식에서 친척들과 나 사이의 반응의 차이를 처음 본 이후로, 속으로 별 이유 없이 죽음을 생각하곤 할 때가 많아졌다. 누군가 나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곡소리가 싫다. 너무나 처연해서 저렇게 슬피 울면 가는 사람 발길이 떨어질까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오늘, 내일 당장 알지도 못하게 죽을 수도 있다. 아쉽다. 못 해본 게 많은데. 그러나 내 죽음 앞에서 많은 이들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훌훌 털고 웃으며 보내주었으면. 내 죽음 앞에서는 그렇지만 가끔 소중한 사람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자신은 없다. 그때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차피 울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괜찮을까. 울고 소리를 지른다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세상이었다면 득음을 했을지도 모르지.

이번에도 그랬다.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다만 심장이 뻐근하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있으니 강아지가 다가왔다.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가 싶어 짐짓 입꼬리를 끌어올려 괜찮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때와 다르다. 분명 답답한 숨 사이로 마음이 쿡쿡 아파하고 있다. 나의 아픔이나 슬픔이 무슨 도움이 되겠냐마는. 어제까지도 세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고작 할 수 있는 게 빈소를 찾아가 조문하는 것뿐이라니. 답답한 숨을 내뱉는 것뿐이라니.

*

직장에 들어왔을 때 색소폰 강좌에 등록했다. 마음 둘 곳이 필요했다. 내 이름을 보고 남자인 줄 착각하셨지. 레슨 교본 메일을 보내주시면서 정말 진심으로 반갑다는 말에 따뜻했다. 악기가 없을 때라 그 큰 악기를 매주 들고 다니면서 하여간 열정이 대단하다고 해주셨고, 돈을 모아 악기를 살 때는 같이 가서 악기를 보고 사주셨다. 늘 나는 레슨을 할 때 엉망진창이었다. 호흡은 모자랐고 손가락은 느렸다. 그래도 선생님은 그런데도 소리는 나쁘지 않단 말이지, 그렇게 엉망진창인 적은 없었다고 해주시곤 했다. 말도 없이 바리톤을 샀을 때는 당황해하시면서도 악기가 무거우니 차로 늘 지하철 입구까지 태워주셨다. 가끔은 집 근처에도 데려다주셨고. 그게 죄송해서 얼른 면허를 따고 돌아간다고 하면서 잠깐 레슨을 쉬던 중이었는데.

레슨을 받으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서, 군악대에 가고 다시 입시에 도전해서 음대에 들어갔다고 하셨다. 스탄 게츠의 소리가 좋다는 말에 우리는 저도요, 하면서 하이파이브를 했었는데. 막상 재즈는 아니고 클래식 색소폰을 전공하셨지만. 악기를 둘러메고 더운 프랑스로 떠나는 비행기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얼마나 쉽지 않았을까 싶었다. 악기는 취미로 하는 게 가장 좋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 속이 쓰렸다. 가끔은 후회도 한다고 했다. 그러게, 뭐가 좋았을까. 하고 싶은 일을 해서 후회하는 것과 취미로 남기기만 해서 후회하는 것.

선생님과는 종종 다투기도 했다. 의견 차이로 지하철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나에게 크게 상처를 주셨다. 아마 네, 그렇네요 하고 넘어갔으면 됐을 텐데 또 그날은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씀드린 게 화근이었다. 갑자기 의견 차이는 내게 인신공격이 되어 돌아왔다. 싸움을 걸면 원래 피하지는 말자는 주의였다. 받아치려면 칠 수 있었다. 한 마디만 꽂으면 된다. 하지만 선생님이니까 상처를 줄 순 없었다. 지금 이기자고 모진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이미 상처받았고, 그래서 선생님이 상처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을까. 얼굴을 보기 싫어 레슨을 몇 주 빠지고 돌아왔더니 머쓱하게 오랜만이네, 하면서 다시 레슨을 시작하셨다.

그렇게 다투고 나서 어색함을 달랠 때 강아지 이야기를 하면서 풀었다. 요즘은 지방으로 내려간 처갓집에 매주 가서 귀여운 진돗개 아롱이, 다롱이를 키우고 있다고. 작게 농사도 시작했는데 농사가 체질인 것 같다고 하실 정도로 잘 맞는 편이라고도 하셨었다. 목공에 취미를 붙여서 만든 선반이나 의자를 보여주시기도 했고, '강아지들은 잘 있어요?' 혹은 '따님들은 잘 지내세요?'라고 물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색하지 않았다. 첫째는 똑부러지고 진득하게 앉아서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라면, 둘째는 집중하는 시간이 길진 않지만 몰입을 잘하는 편이고 유쾌하다고. 피아노를 제법 잘 치는 데 걱정을 하시더라. 음악 한다고 하면 안 되는데, 하시면서.

선생님의 꿈을 알고 있어서 앙상블을 시작했다. 맡고 계시던 40대 이상 아마추어 앙상블에 20-30대 앙상블을 더하고, 제자들과 함께 아주 큰 아마추어 앙상블을 하고 싶어 하셨다. 한국에는 젊은 아마추어 앙상블이 없는 게 늘 아쉽다면서. 그래서 시작했는데, 내 열정을 반 년 만에 영혼까지 탕진하고도 아픈 손가락처럼 어연 2년을 버티다가 마무리를 했다. 매주 선생님과 합주하지는 못했다. 선생님이 야속하면서도 이해가 갔다. 의욕을 잃어가는 걸 봐서 야속했고, 그러면서도 나조차 의욕이 없어지는 걸 아니까 어쩔 수 없다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도 더 의욕이 없는 듯했기에 매주 악보를 찾아오는 날 보고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신 아쉬운 말을 해주기도 하셨다. 나만 너무 고생하는 것 같다면서 말이다.

레슨을 쉰다는 건 내 입사 초기의 열정으로 뚜벅이로 악기를 매고 다니면서 생긴 후유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앙상블을 끝내고 나서 허탈함 때문이기도 했다. 남은 것은 뭔가. 앙상블이 이래서 잘 안되는구나를 몸소 체험한 건가. 안될 줄은 알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마음이 바쁘고 돈도 여유가 없고, 우리에게 젊다는 이유로 패기와 열정이 넘치는 것도 아니니까. 면허는 사실이지만 핑계기도 했다. 앙상블을 끝내고 나니 한동안은 쉬고 싶었다. 선생님을 이해하지만 한동안 거리를 두고 싶기도 했고.

부딪히는 일도 많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선생님은 다시 보고 싶은 분이다. 어느 날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그때는 죄송했다고 한 번 말씀드리고 싶었다. 내게도 시간이 좀 필요했노라고. 귀만 좋고 노력이 부족한 제자여서, 마음이 자주 어지러운 제자라서 별로 가르치는 재미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나 그 말 대신 이제는 편히 쉬시라는 말씀을 남겨야 하게 됐다.

*

부고 소식을 보기 전 영화 <잃어버린 도시 Z>을 막 다 본 참이었다. 영화 속에서 죽음을 보고 나서 현실에서도 죽음을 만났다. 먼 이국의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 나선 아버지와 아들이 도중에 한 부족에게 잡혔다. 대체로 호의적인 부족을 많이 만났지만 새로 만난 부족은 아주 적대적이지도 않았지만, 아주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이들은 심상치 않게 상황이 돌아간다는 걸 알았고 아들이 죽을 것 같다고 말을 했다. 아버지도 분명 무서웠겠지. 그라고 죽음이 다가오는 느낌을 알지 못했을까. 그러나 그는 이미 많이 죽을 고비를 넘겨왔다. 여러 전쟁터는 물론 이 이국의 땅에서도 그는 늘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그렇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좀 더 오래 살았는지 좀 더 일찍 생을 마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음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아들에게 한 말은 남는다.


"삶의 대부분은 미지의 영역이지. 우린 이 세상을 너무 모르고 있어. 하지만 우린 아무도 못할 여정을 해냈단다. 그리고 이걸로 우리는 더 깊게 이해하게 될 거다."


그 둘처럼 아마존으로, 지도 상에 없는 곳으로 여정이 이어져 오늘 우리의 지도가 완성되었고, 사람들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모든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선생님이 아무도 못할 여정을 해내진 않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았을 여정을 해낸 건 분명하다. 여정의 길이가 길었는지, 얼마나 완성도가 있었는지도, 누가 얼마나 알아주었냐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무도 이 세상과 삶을, 그 여정을 잘 안다고 말할 순 없을 테니까. 언제 누가 어떻게 자신의 여정을 마무리할지는 모른다. 다만 그 여정을 빛나게 해주는 건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흐뭇하게 보실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던, 나눠주셨던 이야기와 가르침을 계속 이어가는 것으로. 그게 대단치는 못해도 아주 바보는 아닌 제자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보다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으로. 빈소에 가는 길에 당장 눈물을 흘리는 대신, 답답한 숨을 몰아내고 포근한 숨을 제대로 쉬자. 그 숨으로 악기를 불자. 나중에 어느 날 선생님께 좋은 악기 소리를 들려드리고 싶다. 점점 소리가 좋아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걸 가르쳐주신 건 바로 선생님이라고 말할 수 있게 말이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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