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을 맴도는 크고 작은 불행들에 대하여 [도서]

글 입력 2019.09.01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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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십여 년 전인 것 같다. 『두근두근 내 인생』을 통해 김애란 작가를 처음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나에게는 꽤 생소하게 느껴졌던 청소년의 임신과 ‘조로증’이라는 병을 소재로 담고 있었지만, 작가 특유의 필력과 따뜻한 내용에 반해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다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김애란 작가의 팬이 되었다. 이후 발표되는 작품에서도 꾸준히 ‘시궁창같은 현실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고 메시지를 던지는 작가를 보며, 나는 내가 팬으로써 그녀의 작품세계를 꽤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출간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읽게 된 단편집 『비행운』은, 김애란 작가의 소설이 모두 따뜻한 내용일 거라는 나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는 작품이었다. 오히려 따뜻하기는 커녕, 이 책은 내가 여태껏 읽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서 손에 꼽힐 만큼 어둡고 무서운 단편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귀신이나 미스터리한 소재가 쓰여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행운이 없다’는 뜻의 ‘비행운’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단편들을 통해서 작가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삶은 시종일관 잔혹하다. 재개발로 인한 철거 때문에 하루 아침에 집을 잃을 위기에 놓인 사람들, 빚더미와 다단계의 늪에 빠진 사람들, 불안한 청춘에 매여져 눈칫밥 먹듯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비행운』에서 작가는 이처럼 현실적인 결핍의 문제들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 뒤, 그 문제로 인한 갈등을 결국 폭발시키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각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분노가 점철되어야 마땅한 상황에도 화를 내지 않고,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희망 대신 포기를 선택한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책 속의 인물들은 그늘진 삶의 연속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에 실린 총 8편의 단편소설의 절반 정도를 다 읽을 때까지 의문이 들었다. 실낱 같은 희망을 놓지 말자고 이야기해오던 작가가, 이토록 처참하리만치 아득한 절망을 그대로 보여주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책 뒤의 표지에 적혀있는 글처럼, 작가 자신이 아무 것 없어도 뭔가 될 것만 같았던 20대를 지나 서른이 지나서도 속절없이 행복을 쫓고 있기 때문일까?


그런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그 시절의 작가처럼 20대와 30대 중간 그 어딘가에 서서 ‘아직까지는 행복이 있다’고 믿고 있는 지금의 나 자신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나는 왜 이 8개의 이야기들을 고통스럽고, 외면하고 싶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그 어느 이야기보다도 가장 현실적이고 적나라해서 그 어떤 꾸밈도 찾아볼 수 없는데 어째서 자꾸만 읽는 내내 심장 언저리가 저릿해오는 느낌이 드는 걸까.


나는 오래지 않아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불안감 때문이었다. 돈이 많지도, 그렇다고 큰 돈을 불러낼 수 있는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하기한 나에게 소설 속 비극들이 언제고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대한민국의 수많은 평범한 청춘들이라면 대부분 느끼고 있을 같은 종류의 그 불안감이 소설 속에서 하나의 왜곡이나 과장 없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면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 모든 세상의 단면들을 다 가려버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불편하지만 알아야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알고 나면 절대 알기 전과 같은 마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맛없는 물약을 참고 먹듯 꾹꾹 삼켜내야 하는 세상의 모습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고쳐 먹고,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비행운』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행운』 속 단편 중 하나인 ‘물 속 골리앗’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무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고립감. 그리고 그걸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다는 갑갑함이 밀려왔다.



이 부분을 읽고, 어쩌면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저것과 같은 종류의 갑갑함에 몸서리치고 있을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떠올랐다. 여전히 우리 곁에는 『비행운』의 표지 그림처럼 온 몸이 물 속에 갇혀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는 인생들이 결코 멀지 않게 있다. 습기를 머금다 못해 뼛속까지 물이 들어차, 아무리 큰 대수술을 해도 쉽게 나아지지 않는 그런 인생들 말이다.


아마도 『비행운』을 통해 김애란 작가는, 평온함 속에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언제 어디서 덮쳐올 지 모르는 삶의 크고 작은 불행들에 대해 막연히 불안해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경고를 던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외면하지 말고, 똑똑히 봐야 한다고. 절망 앞에서 쉽게 희망을 포기하는 어딘가의 이웃들을 보며 너도 그렇게 될까 몸부터 사리지 말고 세상과 맞설 용기를 내라고.


그리고 그렇게 없는 용기를 끄집어 내어 가까스로 세상 밖으로 던지게 될 때, 아마 ‘비행운’의 또 다른 뜻이 이윽고 유의미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행운이 없는 비행운(非幸運)에서 출발했더라도, 넓은 하늘의 긴 포물선으로 피어날 비행운(飛行雲)을 끝끝내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책장을 덮고, 나는 스스로에게 하나의 다짐을 해본다. 이 책을 읽은 이상, 단번에 없던 용기를 끌어 모아 세상에 부딪혀보지는 못할 지언정 적어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살아가지는 말자고. 언젠가 나에게도 고난이 덮쳐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부터 사리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말자고 말이다.


한편, 아직까지도 내 주변에 세상의 아름다운 부분만을 굳게 믿으며 어떤 이들의 고립감을 미처 보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 책을 선물할 것이라고도 다짐해본다. 그래서 부디 이 세상이 더 가파르지 않고, 숨쉴 수 없을 만큼 지쳐가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의 햇빛 아래 서 있는 많은 이들이, 세상의 그늘 아래 서 있는 더 많은 이들의 아우성을 기꺼이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비행운(非幸運)이 비행운(飛行雲)으로 피어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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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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