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엇이든 좋다!, 표현하라. - 서울프린지페스티벌 2019

자유와 프린지 페스티벌
글 입력 2019.08.27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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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좋다, 표현하라!

서울프린지페스티벌 2019

 

 


0. 자유와 프린지 페스티벌


   

지난 번 프린지 페스티벌의 프리뷰에서 나는 두 가지 자유의 의미를 살펴보고,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그 자유가 어떻게 실제로 표현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리뷰를 작성하겠다고 하였다. 프리뷰에서는 기성의 가치와 형식에 제약 받지 않음으로서 독립의 차원에서 말해질 수 있는 소극적읜 의미의 자유가 하나 있고, 우리의 인식 공간을 확장시키고, 가치 체계를 뒤흔들며,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적극적 의미의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조금 성급하지만,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나는 두 가지 자유를 모두 목격할 수 있었다. 페스티벌이라는 특성 상 동시에 진행되는 공연이 많아서 모든 공연을 관람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스티벌 장에 감도는 자유의 분위기를 만끽하기는 충분했다. 이 리뷰는 먼저 나의 일인청적인 시점을 따라가며 시간 순서대로 내가 관람한 작품들을 하나하나 같이 살펴 본 이후, 이 작품들이 구현해내는 자유의 차원들을 상술하고, 그것이 프린지 페스티벌의 가치와 의의를 어떻게 만들어 보는지 살펴보는 구성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같이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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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향뎐:ver 마포>


   

사실 페스티벌이 언제 시작하는지 모른채로 일단 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리는 문화비축기지로 출발했었다. 그냥 막연히 한 1시쯤 도착하면 시작하지 않을까 했었는데, 3시부터 티켓팅 부스가 열리더라. 1시에 문화 비축기치에 도착한 나는 땡볕 아래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다가 주변에 있던 따릉이 하나를 타고 주변 월드컵 공원과 하천을 돌아 다녔다.


그렇게 한 두어시간 돌아 다니고 시간이 3시가 되어 입장을 했더니 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은 좀 어마 무시하게 거대한 규모의 축제 공간이었다. 일단 티켓팅 부스 앞에 서서 어떤 건물이 어디 있고, 어디에서 몇시에 무슨 공연이 열리는지 숙지하며, 페스티벌 이동 동선을 분주하게 세우다 보니 어느새 보려고 했던 첫 번째 공연이 시작하는 4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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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처음 마주한 공연은 지구 옆 동네 극단에서 진행하는 <춘향뎐 ver. 마포>였다. 공연이 열리기로 한 ‘나무데크’ 공간 근처에서 어디서 어떻게 공연이 시작하는거지 하며 쭈뼛쭈뼛 서 있었는데, 갑자기 사물놀이 소리가 울려펴지면서 갑자기 공연이 시작했다. 설치된 무대도 없는 길거리에서 갑자기 사물놀이 패가 등장하면서 공연이 시작하고, 갑자기 관중인줄 알았던 사람 둘이 관중들 사이에서 뛰쳐나와 대사를 외치는 광경에 일단 당황했다.


관중들 사이에서 등장한 방자와 이몽룡이 서로 실 없는 대화를 마구 나눈 이후, 춘향이를 불러내기 위해 춘향이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헤드셋을 끼고, 힙합에 어울리는 패션을 갖춘 춘향이도 역시 관중 속에 튀어나와 공연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사물놀이 패들이 연주를 하며 길을 이끌고, 그 뒤를 관중이 따라가는 형태로 퍼레이드 같은 체험이 이어졌다. 그렇게 사물놀이 패를 따라서 무대가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 이동한 이후, 간이 의자에 착석했다.


거기서부터 우리가 알던 춘향전의 이야기가 상연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로 무언가 연극이라고도, 판소리라고도 볼 수 없는 장르의 문법을 완전히 뒤섞는 형태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희극처럼 배우들이 계속해서 관중들의 웃음을 유발시키도 하고, 중간에 판소리를 하기도 하고, 춘향이가 락발라드를 열창하기도 하고, 갑자기 사물놀이 패들이 나와서 서커스를 벌이기도 하며, 우스꽝스러운 액션과 함께 해학과 풍자성 짙은 탈놀이가 진행되기도 하면서 온갖 장르들이 한 곳으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돈과 파괴의, 그러나 배꼽 빠지던 공연이 춘향전의 플롯을 따라서 계속 진행되고, 우리가 알던 그 춘향전의 결말과 별 다를 것 없이 공연이 끝났다. 공연이 끝났다면서, 감사하다고 외치고 해산하는 분위기가 나는 동안에도, 나는 무언가 여전히 이것마저도 공연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한채로 마치 꿈을 꾸듯이 공연장을 떠났다.

 

*


장르와, 장르의 문법이란 어느정도 성공과 재미를 보장하는 서사의 정형화된 틀이다. 추리 소설, 연극, 영화는 그 장르에 맞는 문법을 – 사건이 일어나고 관객들에게 공개되는 단서를 이용해 주인공이 범인을 찾아나가는 – 따르고 스릴러 작품들은 스릴러에 맞는 문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런 장르들과 장르들의 문법은 어느정도 정형화 되었고, 사람들에게 재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이런 장르 구분은, 혹은 장르의 문법은 어떤 특정한 종류의 작품들이 어떤 형식의 스토리 구조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기술적인(descriptive) 용례를 지니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장르의 작품들은 어떠어떠해야만 한다는 규제적인(prescriptive) 용례를 지니기도 한다. 예를 들어, 코미디에서는 인간 본연의 깊숙한 실존적인 무게를 무겁고 음울하고 절망적인 형태로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코미디라는 장르가 그래 왔기도 하기때문이지만, 동시에 코미디를 창작하는데 있어서 적용되는 코미디의 문법이라는 것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장르와 장르 문법이란 재미와 작품의 질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 안전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품이 나갈 수 있는 방향을 제약하고, 표현의 방식을 한정시키는 제약이기도 하다. <춘향뎐:ver. 마포>는 이런 장르의 구분과 장르 문법을 거의 비웃다시피 한다. 공연이 시작할 때 울려 퍼지던 사물놀이의 소리들은 마치 이 작품이 전통적인 판소리 극인 것 마냥 관객으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든다. 그것도 잠시 21세기의 평상복을 입은 이몽룡과 방자가 나타나 이 공연은 전통 판소리 극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그럼 이 지점에서 관객은 ‘아 21세기 형 판소리극이겠구나‘며 지레짐작 하고 있으면 갑자기 이몽룡과 방자가 판소리가 아닌 랩을 시작한다. 뒤이어 헤드셋을 끼고 힙합 패션을 한 춘향이까지 나타나면 관객은 더욱 혼란스러워 진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다시금 사물놀이 패들이 등장하여 관객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도대체 몇 개의 장르가 혼합되어 있는건가? 판소리 + 현대극 + 힙합 + 퍼레이드.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장르의 혼종성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본격적으로 공연이 시작된 다음이다. 춘향이와 이몽룡은 끊임 없이 슬랩스틱을 펼치고, 변사또는 전자 음악과 함께 악에 받친채로 등장한다. 사물놀이 패들은 중간에 튀어나와 서커스를 펼치고, 잔치 장면에는 배우들이 뛰어나와 관중들에게 막걸리를 대접한다. 갑자기 이몽룡과 방자가 탈을 쓰고 나와 탈놀이를 연출하는가 하면, 춘향이가 옥 안에서 락발라드를 열창하며 자신의 한을 성토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이 프린지 페스티벌의 자유 중 독립과 해방의 차원에서의 자유가 성립하는 부분이다.


춘향전을 베이스로 하고, 온갖 장르와 음악, 요소들을 뒤섞어서 만들어낸 짬뽕을 보고 누군가는 ‘이게 대체 뭐야!’라며 기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춘향던:ver.마포>는 ‘장르고 뭐고, 표현을 제약하는 어떤 요소 없이도, 이렇게나 재미있을 수 있다!’고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연극은, 판소리는, 힙합은, 락은, 코미디는, 춘향전은, 예술은 어떠어떠 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제약들과 규제 앞에서 ‘우리가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라며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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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이 맥락에서 <춘향뎐:ver, 마포>는 두 번째 자유, 인식 공간 확장으로서의 자유마저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코미디란 무엇인가? 연극이란 무엇인가? 판소리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이미 닫힌 질문들이다. 주어에 특정한 장르를, 예술 형태를 상정해 놓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에 아무리 답을 잘 해 보았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더 잘 알게 되는 결과일 뿐이다.


촛불의 비유를 다시금 생각해보자.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려고 노력하는 예술은, 작품은 촛불의 빛이 이미 환하게 밝히고 있는 공간의 해상도를 높이고 있을 뿐이다(물론 그런 노력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말했듯이,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기존의 전통을 완전히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만이, 진정한 혁신을 해낼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그 나름대로 수용할 만하다). 이 질문을 그 기초부터 완전히 전복해내는 작업만이 촛불이 밝히고 있지 않던 공간을 빛으로 환하게 밝히는 작업일 것이다.


이를 성취해내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기존의 장르와 문법을 모두 완벽하게 파괴해버리고, 아예 부스러기부터 시작하는 방법. 그리고 기존의 장르와 문법들의 조합과 혼합, 그리고 변형을 통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방법. <춘향뎐:ver. 마포>는 후자의 방법을 채택한다. 이런 저런 장르를 혼합해서 만들어 낸 것이 인간의 부위를 여기저기 기워서 만든 프랑켄슈타인 같은 끔찍한 괴물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이자, 우리의 미래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결국 <춘향던:ver. 마포>는 장르의 혼합과 조합을 통해서 코미디란 무엇인지, 연극이 무엇인지, 판소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아래에 깔려 있는 전제들을 재조직하고, 그 질문들을 근본적으로 다시금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랑시에르가 말했듯이, 우리가 굳건히 믿고 있었던 가치의 체계들과 인식의 공간을 재조직하는 자유의 차원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몇 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조금 더 있다. 보통 작품이 동시대성, 혹은 시의성을 획득하는 방법으로는, 동시대와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거나, 동시대적인 형식이나, 표현 형태들을 선택하는 방식이 있다. <춘향뎐:ver.마포>는 춘향전의 원래 줄거리를 철저하게 유지하는 방식으로 극을 진행한다. 그렇기에 자칫 낡아 보일 수 있는, 혹은 시의성이 떨어져 보일 수 있는 지점을, 현대적 방식의 소품들과, 대사, 음악들로 보충한다. 그 과정에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춘향전의 서사와 현대의 소품들 사이에는 시대착오적(anachronical)한 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시대착오성은 이 작품이 과거에 대한 것도 현재에 대한 것도 아니라는 특이한 성질을 지니게 만든다. 시대착오성은 바로 과거가 현재와 만나 생성되는 이중의 순간에 대한 조명이 가능케하는 특수한 관점이 탄생할 수 있는 이유이다.


공간의 활용도 칭찬하고 싶다. 같은 연기라도 이뤄지는 공간에 따라서 그 분위기, 의미, 대사 모두 요동치게 된다. 스포트라이트가 있고, 목소리가 잘 울려 퍼지며 깜깜한 암실이 조성될 수 있는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것과, 땡볕이 내리쬐는 길거리에서 마이크 하나 없이 연기를 하는 것의 차이는 전체 공연에 생각보다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길거리에서 그리고 야외의 공간에서 어떻게 연기를 하고, 동선을 짜고, 공연을 할지의 고민이 잘 녹아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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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옥탑무덤>


   

<춘향전:ver.마포>이후에 관람한 공연은 <옥탑 무덤>이라는 공연이다. 옥탑무덤 공연은 페스티벌 장 한 가운데에 있는 쓰레기장처럼 조성되어 있는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텅 빈 야외에서 가운데에 불룩 올라온 모래 더미 하나가 있고, 그 모래 더미 사이사이에는 방금 버려진 것만 같은 각종 생활 쓰레기들과 뼈 모형들이 파묻혀 있었다. 설치되어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아서 공연이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슬그머니 어떤 사람이 걸어 왔다. 자연스럽게 흙더미 위로 올라가더니, 밧줄을 자신의 목에 걸고 자살을 하는 장면으로 첫 장면이 시작되었다. 이 사람은 하지만 자살에 실패해,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 갇히게 되고 거기서 반쯤 정신 나간 할아버지와 할머니 한 쌍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하여서 구천에서 떠돌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자살했던 사람은 이들을 도와 이름을 찾아 이들이 구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공연의 공간적 측면에서 색다른 전회를 시도했다는 지점에서 이 공연도 프린지 페스티벌이 표방하고 있는 자유의 이념의 첫 번째 의미에 부합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 같다. 무대의 입장과 퇴장이 자유롭고, 흙 무더기 가운데에 배치해 놓은 파이프 모양 구조물은 배우들이 그 속으로 들어가면 관중들로 하여금 파이프에 뚫려 있는 여러 출구 중 어디로 나올지 모르게 한다는 점에서 긴장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기존의 연극이 가지고 있었던 무대라는 제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나름의 의미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지점이 있었다. 일단 이름 찾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극의 개연성이 부족함을 느꼈다. 극의 결말 부분에서 시도했던 반전도 놀라움과 충격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의 부족인지는 모르겠지만, 극이 시도하고 있는 반전이 관객으로 하여금 놀라움을 느낄 수 있도록 극에서 짜임새있게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극에는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상징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상징들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다가 오지 못했던 것 같다. 상징으로 사용되는 소품이나, 행위들이 ‘그것이 무엇이구나!’하고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 아니라, 애매성과 모호성을 가지고 다가 왔다는 말이다. 또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런 애매성과 모호성들이 의도되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고 극이 전체적으로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마저 어떤 의미에서 불명확하게 만든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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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유와 표현, '무엇을'이 아닌 '어떻게'



그 다음 관람했었던 공연은 <눈치 게임>이라는 공연이었다. 광장 데크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공연인데, 연극적 요소와 함께 무용과, 행위 예술적인 요소들이 다양하게 혼합되어 있던 공연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5명의 공연자들이 앞으로 뛰어 나오더니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앞에 마련되어 있던 나무 데크의 공간을 왔다 갔다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점프도 했다가, 구르기도 하기를 10여분, 갑자기 이 의미 불명의 눈치 게임을 멈추더니 여러 단어가 적힌 나무 판넬을 관객들에게 하나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관객이나 한명씩 지목하여 단어를 말하게 하고, 그 단어에 맞추어 아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공연은 이런 방식으로 계속 진행되어 가다가, 공연자들이 갑자기 한 곳에 모이더니 갑자기 모두 동작을 멈추며 공연이 종료되었다.


사실 내가 이 공연의 의미를 맥락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프린지 페스티벌이 표방하는 ‘자유’의 이념이 이 공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도, 이 공연이 가지는 의의를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의 가치 아래에서 예술에 대해서 질문할 때 우리에게 중요시 되는 질문은 그 작품이 ‘무엇에’대해/을 표현 했는지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표현 했냐는 것이다. 우리가 예술의 대상이 ‘무엇’이냐고 질문할 때, 예술은 한 갓 재현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암호문의 전달 과정을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먼저 적는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적절한 방식으로 암호화 한 이후에 수신자에게 전달한다. 수신자는 자신이 가진 도구들을 가지고 암호화된 메시지를 다시금 평서문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평서문으로 바뀐 메시지를 읽고 그 암호문을 이해한다.


암호문을 암호문으로 만드는 것은 발신자의 암호화의 과정과, 수신자의 해독과정이다. 이 과정 이전에,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는 암호문이 아니라 그저 평서문일 뿐인 것이다. 비슷하게 생각을 해보자. 예술이 발신자(창작자)와 수신자(관객)의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했을 때, 창작자는 자신의 의도와 의미를 적절히 자신의 작품 안에 녹여 넣는다. 수신자는 그 작품을 관람하고 자신이 가진 자원들을 활용하여 작가의 의도와 의미를 재구성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술이 탄생하는 지점은 과연 작가의 의도와 의미인가? 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미학적 입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직관적으로 예술이 탄생하는 것은 그것이 암호화되고 해석되는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 같다고 생각된다. 결국 예술에 대해서 ‘무엇을?’이라고 질문하는 것은 예술을 그저 창작자의 머릿속에 그리고, 수신자의 머릿속 안에 가둬 놓는 행위이다. 그 자체로 어떤 규정과 제약을 예술에게 부여하는 질문 방식인 것이다.


반면 ‘어떻게’의 질문은 의도와 의미 아래에 예술을 가둬놓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야 비로소 표현이 예술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술과 자유가 만나는 교차점이 생성되는 순간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술은 기존의 문법과 관습, 장르, 사회, 환경으로부터의 제약 앞에서 독립이라는 의미에서 자유를 획득하고, 더하여 ‘무엇을’이라는 족쇄에 갇혀 예술이 무엇인지 규정하던 인식의 공간에서 탈피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도 획득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리뷰의 제목이 <무엇이든 좋다! 표현하라.> 지만 방점은 ‘무엇이든’이 아니라 ‘표현하라’에 찍혀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 아래에서 이후에 관람한 다른 공연들도 마찬가지로 ‘자유’라는 이념에 봉사하고 있다. 나무데크에서 이루어진 안유진 공연자의 스탠딩 코미디라든지, 아니면 초보 팝페라 가수의 <오션> 공연이라든지, 또 박정은 공연자의 <이 ( 있 다 가 없 다) 다>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자유’를 구현하고 있다. 내가 제시한 구호, ‘무엇이든 좋다! 표현하라.’는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표현했는가? 그렇다면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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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가며


   

간략하게 총평을 내리자면, 프린지 페스티벌은 내가 프리뷰에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자유’의 이념을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멘소리를 몇 가지만 하고 싶다. 일단 공연 장소 변경 공지가 티켓 부스 앞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 장소에 찾아가고 나서야, 다른 곳에서 공연이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관람에 인원 제한이 있는 공연에 대한 사전 공지를 받지 못했다. 다른 공연을 관람하고 콜렉티브 뒹굴의 <오퍼튜니티>를 보려고 갔을 때, 필자 바로 앞에서 인원이 가득 차 발길을 돌려야만 했었다. 선착순 입장이라든가, 인원수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더라면, 공연 관람에 차질이 없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예술이 무엇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는지, 예술이 무엇인지,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동시대의 예술가들이 천착하고 있는 작업들이 무엇인지, 이런 질문들을 하고 있다면 프린지 페스티벌에 답의 실마리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좋다!, 표현하라. 표현했는가? 그렇다면 예술이다. 그리고 예술적 일탈을 상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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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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