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취미 길라잡이(1) - 향수(香水)에 대해서 [패션]

취미로써의 향수 즐기기
글 입력 2019.08.2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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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 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 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중략)

연약하지만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집요하고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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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취미에 관한 생각을 풀어보았다면, 이번에는 나의 실제 취미와 그 매력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앞서 인용한 소설의 일부를 읽고 예상했겠지만 오늘 이야기 할 취미는 바로 ‘향수(香水)’이다.

인간의 오감 중 가장 중요한 걸 뽑으라고 하면 후각을 뽑는 이는 많지 않을 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보다 후각은 우리의 일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가장 큰 것으로는 후각을 잃으면 맛을 제대로 못느끼게 된다는 점부터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우리가 후각으로 기억을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홍차와 마들렌을 먹고 그 향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단순히 향을 맡았을 뿐인데 예전의 장소와 상황이 순식간에 떠오른다.

심지어 잊고 있어서 거의 무의식에 수납되어 있을 법한 흐릿한 추억들도 선명해진다. 반대로 특정한 사람을 떠올리면 그 사람의 향이 코 끝에 맴도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듯 후각은 생각보다 우리의 인식체계에 더 깊이 관여하고 있다.

내가 향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중학교 때쯤부터다. 그 전에도 향에 관심이 있긴 했지만 향수 자체에는 어쩐지 어른들의 물건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다 중학교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주변 친구들의 시선에 신경이 쓰이곤 했다.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제주도 여행길에 면세점에서 나름 거금을 들여 첫 향수를 들였다. 그 이후로도 하나 둘씩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내가 향수를 고르던 기준은 물론 내 마음에 들어야 했지만, 그것보단 남들에게 평가가 좋은 것에 조금 더 집착을 했다. 그래서인지 가장 부담 없고 무난한 비누 향, 과일 향이 주를 이루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는 향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또 교복을 매일 입었기 때문에 그런 향들이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무난한 향들로 나의 화장대 위를 채우고 간간히 백화점으로 시향을 가서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그러다 성인이 되자 입을 수 있는 향의 폭이 넓어졌다. 다양한 스타일의 옷을 입을 수 있고 그에 맞는 이미지의 향을 뿌릴 수 있게 되었다. 수 많은 향수를 뿌리고 다니다 보니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뒤늦게 깨우쳐졌다. 모두의 취향에 맞는 향은 존재할 수가 없다.

같은 향이어도 누군가는 너무 좋아하며 칭찬을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더 이상 내가 뿌리는 향에 대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나’를 위해서 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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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보다는 우리나라도 향수에 관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향수를 어디다 뿌려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할 정도로 어색해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취미로써의 향수를 어떻게 즐기는지 궁금해 하고 물어본다. 생각보다 향수를 즐기는 방법은 굉장히 많은데, 그 중 4가지를 간추려 보았다.

첫째, 뿌리는 것이다. 향수는 당연히 향을 맡으려는 목적이 1순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뿌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다양한 목적이 있다.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호감을 주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기분전환을 위해서 등등. 그 중 내가 종종 즐겨 뿌리는 때가 있다. 바로 잠들기 전이다. 침대에 눕기 전 향수를 뿌린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은 향수가 아깝다거나 도대체 그 때 왜 뿌리냐는 반응이 돌아온다.

자기 전 누워있는 시간은 하루 중 거의 유일하게 온전히 나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적막함과 고요함 속에 덩그러니 있자면 감정의 감각들이 깨어나곤 한다. 그 감각들을 잠재우거나 더욱 극대화 시키고 싶을 때면 향수를 두어 번 뿌려준다. 나는 잠들기 전에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어서 주로 포근한 향이나 허브 향을 뿌린다. 별 것 아니지만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하나 추가되는 기분이다.

번째는 수집과 경험이다. 때로는 향 자체보다 향수를 소장하는 것에 더 즐거움을 느낄 때도 있다. 향수에서는 향이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향수 병을 보고 구매하기도 한다. 그만큼 디자인이 중요하다. 거기에 병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라벨과 향에 대한 스토리가 있다면 수집가들의 욕구는 더욱 불타오른다. 화장대 위에 향수병이 하나씩 늘어날 때 함께 행복해진다.
 
경험으로써의 향수는 정말 방대하다. 아마도 나는 죽기 전까지 절대로 지구상의 모든 향수를 맡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때때로 허무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는 죽을 때까지 새로운 향을 탐구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수 많은 향료들이 조합되어 한병의 향수로 탄생될 때, 그 향료의 조합들을 보고 향을 추측해보기도 하고 비슷한 조합의 다른 향수와 비교해보면 무궁무진한 세계에 놀라게 된다. 해외로 여행을 갈 때도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 새로운 브랜드들을 맡아볼 생각에 더욱 여행이 풍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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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는 교환이 있다. 아쉽게도 내 주변에는 향수를 즐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함께 이야기 할 사람이 없으면 취미생활의 재미가 약간은 반감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 대신 나는 온라인 상의 블로그나 카페에서 향수에 관한 글을 쓰기도 하고 공유하기도 하면서 다른 향수애호가분들과 정보를 교환한다.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한가지 향에 대해 느끼는 방식 또한 10가지가 나올 만큼 각자에게 와 닿는 느낌은 다양하다. 그렇게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고 때로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향이나 상대가 궁금해 하는 향을 상대방이 맡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향수를 조금씩 덜어내어 교환하기도 한다. 서로에게 경험의 확장이 중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감각적인 상상과 표현이 있다. 향수를 즐기고 사람들과 공유하다 보면 자연스레 향수의 향을 맡고 그 향에 대해 표현하는 ‘시향기’를 쓰게 된다. 시향기는 쓰는 사람 따라 정직하게 느껴지는 향들의 표현이 되기도 하고 감각적인 이야기들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 둘을 반정도 섞곤 하는데, 향에서 느껴지는 이야기를 표현할 때 공을 들인다. 단순히 ‘장미, 패츌리, 샌달우드의 향이 난다’ 라고 쓰면 아직 향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와 닿지 않을뿐더러 똑같은 향료의 배합이더라도 그 비율과 조향사의 손길에 따라 전혀 다른 향이 날 수 있기에 향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이미지를 글로써 풀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이야기를 적다 보면 단순히 병에 담긴 액체일 뿐인 향수가 하나의 인격체로 느껴지기도 한다. 또 그 미묘하고 섬세한 표현에 새삼 조향사들이 존경스러워진다. 그들은 글이나 그림이 아닌 ‘향’이라는 매개체로 예술을 만든다. 시향기는 그 예술품에 대한 나의 찬사 혹은 비판을 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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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내가 적었던 시향기에서 향에 대한 이미지에 관한 부분 두 가지이다.


나의 발걸음은 오늘 밤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침소로 향한다. 가까워질수록 저 멀리서도 그녀의 향이 느껴진다. 매일 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미칠듯한 향에 저절로 이끌려 그녀의 방문 앞에 선다. 나도 안다 미친 짓이라는 걸. 누군가 내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감히 높으신 분의 방에 주제도 모르고 들어갔다는 죄목으로 지하에 가둬질 것이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던 나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오늘도 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는 뒤돌아 앉아 있었다. 흘러내린 옷을 추스르지도 않아 그녀의 등이 훤히 보였다. 반으로 쪼개져 하얗다 못해 빛나는 백단의 속살 같은 피부. 그 위로 별자리처럼 수놓아진 풍성한 황금빛 머리. 그 피부를 한번만 만져볼 수 있다면 그 매끄러운 부드러움에 되려 내가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온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그녀의 살 내음이 내 손에도 스며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방안으로 한발자국도 내딛지 못한다.

그 순간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내게 말했다.

'당신은 절대 날 가질 수 없어요'


제법 바람이 차져 선선하지만 아직 햇볕은 여름의 끝물을 태우듯 따가운 가을의 어느 날이면 나는 아직도 어렸을 적 그 때로 돌아가곤 한다. 어머니의 부탁을 받아 아버지께 저녁을 드시러 오라는 말을 전하러 가곤 했던 그 때. 걷다 보면 저 멀리 라벤더 건초더미를 널어놓는 아버지가 흐미하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말린 라벤더 더미에서는 꼬릿한 라벤더 향기와 햇빛 향이 뒤섞여 머리를 어지럽혔다.

어쩐지 몽롱해진 기분으로 그에게 다가가, 저녁 드시러 오라세요-라는 말을 뱉고 나면 그제서야 아버지는 나를 보셨다. 그의 뒤로는 곧 있으면 일몰이 오리란걸 알려주듯 정오의 기세가 한 풀 꺾인 태양이 슬며시 아버지의 어깨에 걸려있었다.

라벤더 건초더미를 던지고 손을 탁탁 털어낸 뒤 아버지는 늘 나를 번쩍 안아 들어 그의 무릎에 앉혔다. 그렇게 안겨있자면 온 몸에 벤 회색 빛 마른 꽃 내음과 태양의 따뜻한 꼬릿함, 그리고 아버지의 애프터쉐이브 향이 뒤섞여 내 마음은 어딘지 울적해졌다.

이런 날이면 나는 늘 그 날이 떠오른다. 넓은 아버지의 어깨와 나 단 둘만이 존재했던 그 시간이.

  
이렇게 단순히 뿌리는 것 외에 즐길게 있나 싶었던 향수에도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향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겼다면 망설이지 말고 입문해보길 바란다. 삶이 더욱 풍족해지는 기분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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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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