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뉴필로소퍼 New Philosopher, 당신의 집은 House인가요 Home인가요? [도서]

글 입력 2019.08.19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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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의 기능을 상실한, House로 남은 현대 사회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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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이 들 때면, 사람들은 말한다. "그냥 집에 갈래".


▷ 휴가 때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으면, 혹자는 이렇게 답한다. "집에서 쉬는 게 최고의 피서야."


▷ 만일 손님이 집주인에게 큰 환대를 받았다고 느끼면, 그는 말한다. "내 집에 온 것 같아요."


▷ 학교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는 학생에게, 선생님이 말한다. "여기가 네 집이냐?"



집은 이토록 편안한 존재다. 지구의 여행객으로, 유랑의 운명을 지고 태어난 우리 모두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곳이다. 인간 내면의 가장 큰 불안은 그 안식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기에,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빚으로 인해 생계의 어려움을 겪게 될 때면 가장 먼저 "집"을 지켜낼 방도를 궁리한다. 아무리 밖에서 치이고, 시달려도 집에 오는 발걸음은 가볍다. 그 곳에는 나에게 익숙하고 안온한 모든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의 경제 논리 아래에서 위의 순기능은 자주 변질되고 만다. 집이 "부동산"으로 불리우면서 투기의 대상이 될 때, 화장실이 한 칸인 집에서 두 칸, 세 칸인 집으로 이사해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버릴 때 이 곳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다. "Home"이 아니라 단순한 "House"가 되어버리고, 나와 우리 가족의 역사가 깃든 상징적 장소라기보다 공간을 차지하며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 세상의 수많은 물건들과 똑같은 존재가 된다.


New Philosopher vol.7, "부동산이 삶을 지배하는 사회"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로부터 비롯된 불행을 지적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부동산을 절대 소유할 수 없게 되어버린, 평생 임차인으로의 운명을 지게 된 현대인들을 소작농이나 노예에 비유하는 등 파격적인 문구들도 많이 나온다. 어투가 조금 강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욕망의 사다리'에서 잠시나마 내려오기 위해서는 충격 요법도 필요하다.




물건의 소유에 대한 집착이 낳을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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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의 후반부 쯤에 나오는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소설은 New Philosopher의 이번 호 내용에 대한 훌륭한 알레고리다.


파홈은, 하루 동안 멀리 걸어갔다가 본래의 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걸어간 지점까지 모두 자신의 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을 받는다. 다만,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지불한 돈만 날린 채 아무 땅도 얻을 수 없다. 파홈은 제 욕심에 못 이겨 한참을 헐떡이다가 결국 출발점 코 앞에 돌아와 죽어버리고 만다.


잡지에는 이 소설의 발췌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파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1.8미터가 그에게 필요한 땅의 전부였다."


조금 거창하게 역사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인류의 땅에 대한 집착은 그 역사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구석기 시대의 시작은 기원전 70만년 전인데, 농경이 처음 발달하고 신석기시대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8000여 년 전이다. 농경사회 이전의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자연으로부터 그 과실을 가져와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뿐이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의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수렵채집인들보다 더 불행하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지적했듯이, 엄격히 말할 때 인류는 과거에 비해 행복의 측면에서 진보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사유재산이 생겨나고, 계급이 나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은 개인으로서 존립하기보다 자신의 재산과 사회적 위치로 평가받는 일에 익숙해졌다. 자신이 '1.8미터'의 땅만 있어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집단적으로 망각하게 된 것이다.


잡지의 여러 글 중, 올리브 버크만의 <물건의 소유>에 소개된 내용은 '소유에의 집착'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위의 파홈과 같은 사례는 물론이고, 버크만은 '미니멀리즘' 역시 물건에 대한 집착의 또다른 변형된 형태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는 미니멀리즘이, 폭식에서 구토로 이어지는 섭식장애에 비유하면 '구토'에 해당하는 단계라고 주장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물질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안하는 물질주의는, 우리가 흔히 비판하는 '물질만능주의'와는 달리 물건으로부터의 심리적 자유가 보장되는 물질주의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스 피케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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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대한 인식의 변화, 그리고 물질에 구속되어 버린 사람들의 집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욕망이 추동하고 부추기는 불평등에 대한 이슈다.


New Philosopher vol.7에서, 호주인들의 50%는 집을 사는 일을 포기했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아마 크게 사정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주거로 인한 사회적 긴장이 우리나라만의 특유한 문제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올해 초에 간 미국여행에서, 로스앤젤레스의 23-25여 평 아파트의 월세가 원화 기준 300만원에 달한다는 것을 듣고 기겁한 기억이 있다. 미국에는 '전세'의 개념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국인들의 주거에 대한 스트레스 역시 우리 국민들 못지 않을 것이다.


이번 호에는 <21세기 자본>으로 유명세를 떨친 세계적 학자 '토마스 피케티'와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피케티는 '앞으로는 근로소득에 비해 자본소득의 증가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며, 자본이 자본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기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거의 불가능해졌고, 금수저로 다시 태어나는 것만이 부자가 되는 방법이라는 사람들의 자조어린 푸념과도 맞닿아 있는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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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를수록,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던 계층의 부는 커지지만 월세나 전세로 주거 문제를 해결해왔던 사람들의 박탈감 역시 커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근로소득으로 '내 집 마련'을 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이에 따라 50%의 호주인들이 그랬듯 본인의 집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자체를 포기하는 젊은이들도 늘어난다.


결국 악순환이다. 젊은이들이 희망을 버리면, 집단적인 우울감이나 무력감이 사회를 배회하게 되고, '우리 사회는 정의롭다'는 사람들의 공통된 신념도 무너지며, 이는 좋은 사회로의 발전에 치명적인 장애물이 된다. 기득권층은 종종, '차등적 보상은 인간의 성취 동기를 자극시키기 때문에 필연적이며, 내가 향유하고 있는 권리와 보상 역시 노력으로 성취된 것'이라는 기능론적 명제를 내세운다. 물론 그 명제는 부분적으로 진실을 담고 있지만, 사회 불평등이 지닐 수 있는 파괴력을 간과하는 오류를 내포하기도 한다.




일상을 철학하다, 사유 위의 또 다른 사유를 만들다



철학을 정의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철학을 '객관화'라고 부르고 싶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당연시 여겨 왔던 삶의 양태들을 분석적 언어로 표현하고, 추상적으로만 그려왔던 '좋은 삶', '좋은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인 언어로 묘사해 내는 데에 관심이 많다. 즉, 철학적 전통에서 주요한 질문들은 대부분 생각 위의 생각, 사유 위의 사유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삶의 서사는 개인의 주관적 정체성과 연계되기에, 철학을 하지 않는 순간에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거대한 맥락을 망각하기 쉽다. 그러나 '철학적 사고'의 통로를 거쳐 객관화를 해내고 나면, 나의 정체성이 스스로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실은 수많은 '거대 서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 사회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기술이 사회의 엔진이자 추진력이 된다면, 철학이나 윤리학 등의 학문은 사회라는 로켓의 선봉에 서서 그 방향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로켓의 몸뚱아리를 움직이는 것은 과학기술이기에, 현대인들은 종종 '문과'에 속한 학문들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제 아무리 빠르게 날아간다고 해도, 올바른 궤도와 방향성을 갖고 추동되지 않는 이상 정지해 있는 것만 못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가?

도착지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상을 철학하다"라는 말은, 그래서 소중하고 귀하다. 우리 지구촌 사회가 인문학과 철학에 빚지고 있듯이, 내 인생에서 방향을 설정하는 일도 '철학적 시간'에 빚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다음 호는 어떤 내용일까? 이렇게 기대되는 잡지는 처음이다.





[이창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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