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실패한 사랑의 서사 - 웹툰 "수업시간 그녀" [도서]

글 입력 2019.08.1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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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인사를 건네면 시야가 협소해진다. 입술만 보인다. 안녕하세요, 하고 말할 때면 입술이 열리고, 너머로 치아가 보인다. 우리는 그동안의 안부 정도 물을 수 있는 관계도 못돼서 그녀는 짤막한 인사를 건네고 지나쳐간다.


그녀는 5개의 음절을 자아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음절들을 곱씹는다. 음절은 한데 모아져 선율을 이루고 그녀의 목소리가 된다. 다시 문장을 음절로 분리한다. “안”을 말할 때와 “세”를 말할 때의 표정이 달랐다고 기억한다. 그녀의 음절만을 생각한 것뿐인데 어느새 그림자의 길이는 더 길어졌다.


어쩌다 대화가 이어지면 그 날 종일 기분이 좋았다. 안부 너머의 안부까지 물을 수 있는 관계가 될 거라는 다짐을 매번 했다. 다짐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안녕이라는 말도 겨우 했는데. 다짐의 규모가 점점 커졌는데도 그랬다.


짝사랑의 경험은 누구나 있다. 낭만적 언어로 미화하면 짝사랑이지 사실 일방적 사랑에 불과하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의 언어를 되새기는 버릇이 있었다. 의미 없는 말에서 의미를 찾으려, 상대의 감정을 알아내려는 시도였다. 되새기는 말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안녕”이나 “잘 가” 정도였다. 해석할 여지가 전무한 인사말에서 내 편의대로 사랑의 감정을 찾으려 했으니 나는 미친 사람이었다.


혼자서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서 설렜다. 짝사랑은 일방적 사랑이 맞다. 일방적 사랑은 두 가지 양상으로 마무리된다. 마음을 표현했지만, 차이거나 그녀 혹은 그가 내가 아닌 다른 이와 연애를 시작했기에 마음을 접거나. 연애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더 이상 일방적 사랑이 아니라는 점에서 짝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꺼려진다.


나는 실패한 사랑들만을 짝사랑이라 호명하고 싶다. 이뤄지지 않는 사랑. 이뤄지지 못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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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만이 도처에 널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로맨스 서사는 연인의 입맞춤이나 결혼식을 비추는 것으로 끝나고, 사랑해서 행복하다는 과시나 자랑이 주변에서 맴돌고 있지만, 실패의 경험이 있는 당신과 나는 사랑을 구성하는 성분이 그것뿐이 아님을 알고 있다. <수업시간 그녀>는 사랑의 낭만과 매혹만을 비추지 않는다. 실패한 짝사랑의 경험을 통해 사랑을 정의 내린다.


주인공은 옆자리에 앉은 ‘수업시간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조별과제를 같이 하게 돼, 둘만의 시간이 종종 생긴다. 주인공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스쳐가는 눈빛을 운명적 의사표시라 여기거나, 관습적 행동의 일환을 호감의 표식으로 보려 하는 게 그렇다.


이것들이 모두 누적돼 그녀 역시 나에게 호감이 있을 거라는 마음이 생긴다. 주인공은 고백을 준비한다. 그러나 고백은 성사되지 않는다. 문득 그녀와 그녀 친구의 대화를 듣게 돼서다. 대화에서 주인공은 호구나 미련한 사람 정도로 규정된다.


그는 무력해진다. 내 진심과 감성들이 고작 호구, 정도의 단어로 훼손됐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은 크지 않다. 그는 이제 사랑이 자의적 감정임을 인지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나’였고, 착각과 오해에 빠져 들뜬 기분에 휩싸인 것도 ‘나’였다. 어리석은 맹목성과 자의성이 사랑에 도사리고 있음을 체감한 거였다.


짝사랑의 과정은 주인공의 친구에게도 적용된다. 주인공의 친구는 주인공을 좋아했다. 그의 작은 친절과 호의가 그녀에게 분명한 자취를 남겼지만, 주인공에겐 친구라면 으레 하는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친구는 그의 행동에 맥락을 붙였다. 주인공에게 사랑의 감정을 없음을 안 친구는 “진심이 아닌 상대에겐 이러면 안 돼”라는 말을 남긴다.


<수업시간 그녀>는 사랑을 다루면서도 통속적 전개를 답습하지 않는다. 간단하지만 묘사와 표현이 분명한 그림체로 공감을 이끌어낸다. 당신의 도처에 널려있는 건 완결된 사랑, 행복으로 충만한 사랑보다 실패담으로서의 사랑이다. 이 실패의 이야기로 사랑을 통찰한 <수업시간 그녀>는 보편적이다. 그러나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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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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