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신없이 돌아가는 재봉틀의 삶 [사람]

한병철의 "피로사회",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중심으로
글 입력 2019.08.1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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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재봉틀을 돌린다. 구부정하게 앉아서 목이 빠져라 옷감을 들여다보며 같은 디자인의 옷만 종일 만든다. 밖에는 쾌청한 하늘 아래서 알록달록 봄꽃이 피고 만물이 햇빛을 맞으며 봄바람에 춤추고 있는데, 시멘트 벽면 공장 안의 사람들은 창밖을 바라볼 틈도 없이 일을 한다. 그들에게 알록달록한 것은 매일 보는 옷감뿐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소녀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하지만 결국엔 같은 이유로 공장에 왔다.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동생 고등학교를 보내야 해서, 그냥 집에 돈이 없어서, 어쨌건 다들 돈이 필요하니까. 기상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일어나 좁디좁은 기숙사에서 빠져 나와 국민 체조를 다 같이 하고 아침을 먹고 하루 종일 재봉틀만 상대한다. 그러면서도 간식 사먹을 돈조차 아껴서 집에 보낸다. 억척같은 소녀들의 노력으로 가정이 살았고, 기업이 살았고, 나라가 살았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1인당 GDP라든가 무디스 신용등급 같은 것들을 차치하더라도, 이제는 청춘들이 공장이 아니라 학교나 사무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여전히 공부나 일 때문에 바쁘기는 하지만, 예전만큼 노동집약적이지도 않고, 일을 더 하면 추가수당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어쩐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쳐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중고등학생은 1등급을 목표로 공부한다. 대학생은 ‘스펙 n종 세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거나 고시를 준비하거나 괜찮은 실험실을 알아내기 위해 발품을 판다. 직장인은 업무처리를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장 동료들이나 거래처와의 술자리에 나가서 타인의 기분을 맞춰줘야 승진도 하고 봉급도 늘어난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죄다 똑같다. 대부분 이런저런 일 하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고, 아침 일찍 일어나면 어제랑 비슷한 하루가 펼쳐진다. 사람들은 피로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왜 이렇게 사는지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지도 모르면서 비슷한 나날들을 이어간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인간성을 점점 더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변화된 방향, 현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의 모습, 그리고 뒤쳐진 ‘영혼’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다음 글들을 통해,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원인, 문제점,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재독 한인 철학자 한병철은 본인의 철학 에세이 “피로사회”에서 현대 신경성 질환과 사회 구조의 변화를 연관시켜 설명한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중략)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중략)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생산성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규율의 기술이나 금지라는 부정적 도식은 곧 그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중략)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 한병철, "피로사회" p24~29



규제가 너무 많은 “규율사회”는 생산량을 늘리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하는 건 되고 저렇게 하는 건 안된다”라고 하면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없다. 사람들에게 일할 동기를 부여하려면 “오! 그것도 괜찮은데? 그렇게 한번 해봐”라고 해줘야 한다. 그렇게 말해 줘야 일하는 사람도 일할 맛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한다. 결국 전체적인 생산량이 늘어날 수 있는 ‘성과사회’가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인간적 유대감이 예전 같지 않고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성과주체’는 관성적으로 일을 이어나갈 뿐이다. 강제는 외부의 대상이 억지로 시키는 것이고, 자유는 스스로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모습은 외부에 시키는 존재는 없지만 스스로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상태이다. 강제와 자유의 구분이 불가능해져서 “강제하는 자유” 혹은 “자유로운 강제”의 모습을 우리는 가지게 된다.


한병철의 책은 고도의 ‘성과사회’인 독일에서 독일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국가가 폐허가 되고, 나라를 세계적인 경제선진국으로 재건하기까지 국민들이 겪은 경험들과 현재 국민들이 놓여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그의 책이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까닭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병철의 철학 에세이는 독일뿐만 아니라 최근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에서도 같은 메시지가 통한다는 것이다. 똑같이 전쟁을 겪고 분단의 상황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에서도 “피로사회”가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전쟁을 겪고 급속도로 발전했다. 노동력을 착취하다시피 하면서 기업은 부를 축적하였고, 대기업의 힘으로 국가는 성장했다.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은 개혁되었고, 사람들은 서울로 몰렸다. 적은 임금으로 생활하고,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주고, 또 돈을 아껴서 저축하고. 그렇게 80년대 쯤 와서는 평범한 사람들도 큰돈을 만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큰돈을 비로소 만질 수 있게 되었다기보다는, 너무 갑자기 만지게 되었다. 그게 문제였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중산층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새로운 경제 계층은 종전에 볼 수 없던 특이한 소비 형태를 보인다. 아이를 피아노 학원이나 미술학원에 보낸다든가 계모임을 만들기 시작한다든가. 갑자기 불어난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화려한 소비행각을 보이기 시작했고, “푼돈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제서야 가난이 죄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갑자기 다가온 사회 양극화는 모두 같이 가난했던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돈 많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정작 사람들이 돈을 충분히 가지게 되었을 때 일어날 사회문제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


그렇게 현재의 사회가 탄생했다. 미싱을 돌리는 소녀들이 급성장을 일궈냈고, 소녀들이 엄마가 되어서는 자기 딸에게 미싱 돌리는 일만은 시키고 싶지 않아서 공부나 예술 같은 것을 시켰다. 미싱을 돌리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돼버렸고, 의사나 변호사 같은 사(士)자 직업들은 부러운 직업이 되었다. 그 세대에는 오히려 쉬웠지,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저성장과 높은 요구조건이며 ‘헬조선’이라는 수식어이다. 쾌청한 하늘 한번 바라다볼 여유도 없이 바쁘게 일하다가 해가 지면 집에 들어오고, 피곤해서 지쳐 쓰러지면 다시 아침이고 다시 출근한다. 여전히 알록달록한 꽃과 푸르른 날씨를 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재봉틀을 돌리던 소녀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작업환경이 조금 더 나아졌고 노동인권이 훨씬 개선되었지만, 삶에 임하는 태도는 미싱을 돌릴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라는 급훈에 자극받은 학생들이 대학에 오고 취직도 하지만 결국 미싱을 돌리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익숙해졌다.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미싱을 돌리고, 미싱을 돌리지 않으면 불안하다. 불안하기 때문에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모험적인 일보다는 안정적인 일을 택하려 한다. 사회에서도 역시 안정적으로, 기복 없이, 꾸준히, 미싱을 돌리는 사람을 선호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선순환한다. 사람들은 불안한 삶을 피해 더욱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다. 안정적인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인정받는다. 미싱을 쉬지 않고 돌리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저 시스템이 잘 돌아가는 것을 보고 다른 공동체들도 저 방식을 채택한다. 안정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갈 곳을 많아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갈 곳을 잃는다. 그렇게 사회는 모험성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안정성이 과도한 환경은 고착화된다. 이제 안정성의 안락함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 안정된 삶, 정년이 보장되는 삶이 최상의 가치로 떠오른다. 돈을 많이 줘도 사십대 후반에 직장을 나와야 한다면 딱히 선호되지 않는다.


그러한 성과주체는 “강제하는 자유” 혹은 “자유로운 강제” 속에서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끊임없이 더 좋은 삶이라고 믿는 곳을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 내가 추구한 안전한 삶이 “실은 매우 이상한 삶”이었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현대는 끝없이 근대의 모험을 모함해왔다. 다른 이유는 없다(물론 수천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벌의 시대도 항해의 시대도, 전쟁과 혁명의 시대도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이 문장이 능동태인지 수동태인지에 대해선 또 많은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현대가 필요로 하는 건 얌전한 인간이다. 겁먹고, 안주하고, 근면, 성실하고, 일하고, 자네 이것밖에 안 되나? 낯을 붉히고, 광고 좀 때리면 기를 쓰고 물건을 사주고(복 받을 걸세 자네), 유행에 일조를 하고, 얘야 오늘도 학원 가야지? 사학의 운영에 도움을 주고, 찬송가를 열심히 부르고, 무엇보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알건 모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르기는 개뿔, 눈치로 한평생을 살아갈 얌전한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 자넨 어떤 삶을 살았나? 혹시나 사후에 신이 묻는다면 우리는 답할 것이다(한참을 고민해야겠지만). 즉 그러니까…… 안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토익도 810점이었고…… 대졸이었거덩요. 어디 가서 빠진다는 소린 안 들었고요, 뭐…… 딱히 별일 없었다고 말할 수 있죠. 신은 잠시 고민에 빠질 것이다. 안전한 삶이란…… 실은 매우 이상한 삶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험하는 존재이다. 아니, 모험을 위해 태어난 존재이며 실은 모험을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존재이다. 답답해, 우울해, 무의미해…… 열심히 이런저런 업체(병원이니 뭐니)들의 경영에 도움을 주며(자넨 진짜 복 많이 받을 걸세)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실은 우리의 삶에서, 이 잘난 ‘현대인’이란 명찰을 단 유인원의 삶에서 모험이 거세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불만은 없다. 안전한 게 어디야. 불만은 없는데도 불안은 여전하다. 안전이…… 다는 아닌가봐, 우리 속에 앉아 등을 기댄 원숭이처럼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씨O, 그래도 나 대졸인데……


- [네이버 지식백과] 톰 소여의 모험 - 마크 트웨인 | 박민규 (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 같아서 이렇게까지 달려왔는데, 막상 와보니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여전히 “미싱은 잘도 돈”다. 미싱 바퀴가 쉬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꽤나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몸은 바쁜 현대 사회의 일원으로서 잘 움직인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이제 우리는 지쳐버렸다. 사회의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개인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우리나라의 모습은 더 찬란해졌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힘든 것이다.


스스로를 잘 보살펴주고 챙겨주어야 한다. 우리는 재봉틀 바퀴를 계속 돌려야 한다고만 생각했고, 바퀴는 돌릴 때마다 꽤 잘 돌아갔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살펴주지 않으면 부품이 망가지고 녹슬기 마련이다. 가끔 기계를 뜯어보고 부품들 잘 있나 확인해주고, 앞으로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윤활유도 칠해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 역시 그렇다. 성과사회의 속도에 맞추어 몸을 열나게 굴리면, 어찌되건 몸은 잘 굴러다닌다. 공부든 사회생활이든 몸은 성하지만, 잘 보살펴주지 않으면 어느 날 지쳐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니 여유를 주어야 한다. 당장의 효율성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여가도 좀 즐기고 깊은 사색에도 빠져보는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몸도 마음도 더 오래 잘 쓸 수 있는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에 등장하는 한 잠언집에서 인디언들이 스스로의 영혼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구절이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나 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달리기를 시작한다.


-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39



우리 생활 깊숙이 ‘성과사회’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우선순위에서 제거되었다. 각자가 스스로의 삶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룰 때, 사회적으로 성대한 국가를 건설할 때 우리의 영혼은 저 뒤에 뒤쳐져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영혼이 상실될 기로에 놓여있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말에서 내려 달려온 쪽을 바라보아야 한다. 본래 정신문명은 물질문명보다 느리다. 너무 조급해 할 필요 없다. 괜히 서둘러 달려가면 여유를 잃은 자신의 모습과 저 멀리 뒤쳐져서 숨을 헥헥 거리며 절뚝거리는 나의 영혼을 뒤늦게 발견하게 될 뿐이다. 이제는 영혼이 쫓아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자.


꿈을 안고 사회에 나가 자신의 이상을 펼치게 되기를 기대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성공적으로 밟아 나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쁘게 들릴만한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굳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재봉틀들의 삶을 언급하여 희망찬 청춘들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면 사과한다.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하루하루의 성취감으로 피로를 이겨내는 멋있는 사람들, 오늘도 할 일을 잘 끝마쳤다는 뿌듯한 기분으로 밤에 이른 사람들. 그들의 삶을 나는 긍정적으로 보며 그들을 모두 응원한다.


그러나 영혼 없이 하루하루 막막함을 마주해야 하는 삶은 꽤 많은 사람들의 현실이다. 그들 역시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와 함께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마냥 외면할 수 없으며, 외면한다 해도 남은 사람들의 생활이 더 편해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글이 자신감과 희망으로 매일을 정복해가는 사람들에게는 소외된 다수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지긋지긋하게 돌아가는 미싱 바퀴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본 글이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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