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수수께끼 변주곡': 외로움에서 동경으로, 동경에서 사랑으로 [도서]

글 입력 2019.08.0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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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개의 결이 다른 소설들, 그러나 화자는 한 명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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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인간의 형태만큼이나 다양한 사랑의 형태들이 있다. 그 모든 형태들을 인정하는 건, 우리의 편협하고 재단하기를 즐기는 본성에 비추어볼 때 아무래도 힘이 들기 마련이다. 실제로 동성애, 트렌스젠더의 사랑, 나이차가 10살을 넘어가는 연인들에 대해 대중이 던지는 시선은 매우 날이 서 있다.


실은 나 역시 그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얼마 전 <프렌즈>라는 미국의 시트콤에서, 주인공인 6명의 친구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 모니카가 본인 아버지의 친구인 리차드와 데이트를 시작할 때,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이건 아니지!' 그런데 문득, 그토록 안타까워하는 내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고 매혹되는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닿아 있는 일인데, 그 매혹을 평가하고 비난하는 것은 나의 소관이 전혀 아닌 것이다. (물론 드라마이지만 말이다.)


<수수께끼 변주곡>은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의 원작 소설을 집필한 작가 안드레 애치먼의 사랑에 관한 소설집이다. 특이한 점은, 다섯 개의 결이 다른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그 주인공이 '폴'이라는 한 명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편도 단편도 아닌, 제목 그대로 '변주곡'의 성격을 띤 소설집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일생에서 수다한 사랑의 경험을 하고, 그 경험들은 쌍방의 애정에 근거한 것이든 짝사랑으로 끝이 나든 삶에 서로 다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 변주곡이라는 소설의 구상은 사랑의 본질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강렬한 끌림으로서의 사랑, 그리고 그 밑바닥에 있는 외로움



사랑의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인지,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모두 다르다. 예컨대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이자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와 같은 작품들을 읽다보면, 그는 사랑을 '인간에 대해 완벽히 알지 못할 때 다다를 수 있는 찰나적 상태'로 인식하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한편, 영화 비포선라이즈의 여자 주인공은, '나는 그 사람과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해서, 그를 완전히 안다고 느낄 때 그를 가장 많이 사랑할 것 같아'라고 말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익어가는 곡식처럼, 오랜 기다림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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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드러난 '폴'이라는 인물의 사랑은 찰나적이고, 성적이고, 매혹적인 양상으로 그려진다. 나는 가장 처음에 나오는 단편 <첫사랑>을 굉장히 인상깊게 읽었다.


그 단편에는 폴이 어린 학생이던 시절, 외딴 섬에서 친구를 제대로 사귀지 못한 채 오로지 아버지와의 대화에만 간헐적으로 기쁨을 얻으면 살아가던 때에, 자신의 집 가구를 수리하게 된 '난니'라는 목공에게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아직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에 따르면 영화의 전반적 정서보다 이 소설의 분위기가 더 외설적이고 직접적이라고 한다.


내가 해 온 사랑은 모두 대중이 인식하는 '평범'의 범위 내에 속한 것이었고, 실제로 나 역시 특이한 형태의 사랑을 현실에서 목격한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 <프렌즈>의 모니카와 리처드의 연애를 보고 받았던 충격처럼, 어린 소년 폴이 청년 난니에게 느끼는 감정도 생소하게만 다가왔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지독히 외로웠으며 가슴에 생채기도 많았던 소년 폴이 그에게 느꼈던 강렬한 끌림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 냄새 나는 작업실에서 일하고 싶어?" 배움이 얼마나 오래 걸리든 상관 없다는 내 말에 그가 확인하듯 물었다. 나는 더욱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고, 당신의 아들이 되고 싶다고, 당신이 오기 전에 작업실 문을 열어 놓고 당신이 돌아간 후에 닫고 싶다고, 아침에 커피와 따뜻한 빵을 가져다주고 레몬을 짜고 바닥에 빗질과 대걸레질을 하고 싶다고, 부모님과 집과 모든 것을 포기시키라고, 나는 당신이 되고 싶다고.


- 안드레 애치먼 <수수께끼 변주곡>, p.44



폴의 독백에서 그가 난니에게 가진 감정의 정수는, 결국 동경이었음이 드러난다. 폴은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묘한 긴장과 미움을 목격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공격하기 위해 대신 폴에게 화를 폭발시켰고, 폴은 그 화로 인해 상처 입은 것은 어머니와 자신의 사랑이었다고, 그 사랑이 의도적이며 의식적이고 씁쓸한 사랑이 되어버렸다고 회고한다. 이처럼 부모님으로부터도, 친구로부터도 충분한 위안을 받지 못했던 어린 폴은, 그 위안이 되어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을 것이다. 목공이자 예술가로, 자신의 일에 집중하던 젊고 활력 넘치는 난니의 모습은 그에게 얼마나 빛나 보였을까.


사랑은 동경으로부터, 그리고 동경은 외로움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만일 인간이 전혀 외롭지 않다면, 굳이 다른 누군가와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보이며 교류하려고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우리는 천생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며, 그렇기에 그 고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누군가를, '진정한 사랑'을 갈망하게 되는 것일 테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떤 외로움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의 건강한 관계로 이끌어주는 반면, 다른 종류의 외로움은 관계의 파국과 불안정성을 가져온다. 폴의 외로움은 어쩌면 전자보다 후자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그 시작은, 어린 시절 내가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이 사실 내 아버지와의 비밀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내 평생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가끔 새벽에 감상적이 될 때면, 나라는 존재가 이 광대한 우주 속에서 얼마나 사소한 존재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나의 감정과 앞에 닥쳐오는 수많은 시련들은 '현재'에 얼마나 커다란 우주가 되어버리는지에 대해 생각하고는 한다.


조금만 더 감상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우주에 잠깐 들렀다 가는 여행객일 뿐인 우리 인간을, 나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에 한해서라도 거대하고 중요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세계가 되는 일.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건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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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은 난니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답장을 보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난니, 당신이 보낸 소포는 5년 전에 도착했어요. 이제야 답장을 보냅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6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우린 당신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난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전혀 몰랐을 수도 있지만 당신에 대해 나는 아버지와 많이 닮았죠. 어쩌면 당신도 알았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요, 당신은 분명 알았을 거에요. 내 평생에 당신이 있었어요."


- 안드레 애치먼, <수수께끼 변주곡> p. 101



내 평생에 당신이 있었어요, 라는 말이 참 아렸다. 최은영 작가가 썼듯이, 어떤 관계들은 어린 시절에 맺어지고,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다른 관계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 맺어지고, 참 순식간에 기억에서 지워지고 만다. 그건 아마 가장 순수하고 말랑말랑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나 자신의 갈망 때문일 것이다.


폴에게 난니는 대체, 얼마나 강렬한 사람이었던 걸까?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도 폴을 사랑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는 그를 조금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창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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