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만한 나날 [도서]

소설과 현실, 그 경계선에서
글 입력 2019.08.05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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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SNS를 하다 보면, 카드 뉴스 형식으로 제품을 홍보하는 게시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주로 본문 중 흥미로운 부분을 발췌하여 독자의 관심을 돋우고, 이어질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몇 주 전,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한 책을 소개하는 카드 뉴스 게시물을 보았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그 책을 구매했다. 책에 대한 두근거림이 멈추기 전에 택배는 도착했고, 나는 책을 가지고 영화 시사회를 보러 집을 나섰다. 코엑스에 가는 길이었는데,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던 20정거장의 여정이 책을 덮으며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지하철에서 내리기 전 책 표지를 다시 한 번 봤다. <가만한 나날>



책 표지 수정.jpg


 

한 사회초년생의 이야기


 

<가만한 나날>은 주인공인 ‘경진’이 작은 광고 대행사에 취업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회사가 글 솜씨가 있는 지원자를 우대했기 때문에 국어 국문과를 전공한 경진은 전공 덕을 보며 입사한다. 홍보 팀에 소속된 경진은 N포털의 블로그를 관리하며 의뢰받은 후기를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리고 고민 끝에 가장 좋아하는 고전소설의 주인공을 모티프로 ‘채털리 부인’이라는 첫 번째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채털리 부인은 남편과 떨어져 살며 홀로 아이와 개를 키우는 인물로, 경진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그녀를 섬세하게 다듬는 작업에 시간과 정성을 쏟는다. 마침내 경진은 신입들 사이에서 에이스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채털리 부인의 블로그 이웃에게 한 통의 쪽지가 온다.



채털리 부인님이 올린 후기를 보고 구매해서 쓰기 시작했거든요. 날마다 사용한다고 했는데 괜찮으신지…  아무 일 없으시길 바라지만 혹시나 무슨 일이 있었다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쪽지를 보낸 사람은 자신을 B기업의 뿌리는 살균제 ‘뽀송이’의 피해자라고 소개한다. 살균제 속 독성 물질 때문에 자신의 두 아이 중 갓난 아기를 잃었고, 남은 다섯 살 아이는 폐가 손상되어 평생 산소 호스를 끼고 살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며 그녀는 경진을 걱정한다.


경진은 천 건이 넘는 포스팅 사이에서 2년 전 자신이 올린 뽀송이의 사용 후기를 발견한다.

 


아기가 있는 집이라면 무조건 추천이에요~~^^





소설과 현실의 경계



소설은 현실에 있음 직한 이야기를 상상해서 꾸며 쓴 글이다. 과연 <가만한 나날>은 있음 직한 이야기 일까? 나는 글을 읽는 내내 소설이 아닌 수기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은 지 2주가 다 되어가지만, 나는 이따금씩 책 속에 떨어져 쪽지를 확인한 경진이 되고는 한다.



불면증 수정.jpg
 


내가 경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사실 나는 그 제품을 사용해 본적도 없다, 홍보 글이다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 역시 그녀처럼 채털리 부인의 계정을 삭제할 것 같다. 하지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경진과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합당한 보상이라는 게 있을까?


이 글은 우리와 가까운 소재를 여럿 다루고 있다. 독성 물질이 들어간 살균제, 이로 인해 생겨난 많은 피해자, 사과는커녕 모르쇠로 일관하는 기업, 검증되지 않은 상품을 홍보하는 광고 대행사, 기하급수적인 광고 블로거 등…. 보통 우리는 살면서 이미 한 번씩은 보고 겪은 것들이 영화나 드라마라는 미디어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나타나면 이런 말을 한다. 현실은 더 한데 뭐.


또한 소설 속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독자가 한 번쯤 '나는 누구에 해당될까’ 라는 질문을 떠올리게끔 한다. 나는 결코 누구 한 명에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이 의도치 않게 제2의 뽀송이 피해자를 만들 수도 있고, 역으로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나의 노력을 알아 주지 못하는 상사를 만난다면, 결국 부서를 이동한 홍성식처럼 상사의 자질을 의심할 수도 있다. 연이은 평가 절하에 사무실에서 찬밥 취급을 받는 회사를 예린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홍보팀장이 그랬듯, 자신이 한 일을 모른척하고 지나가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가만한 나날



소설의 결말 부에서 N포털은 신뢰할 수 있는 콘텐츠 생태계를 위해 검색 알고리즘을 공개 배포하며 개혁을 발표한다. 블로그가 수익 모델이었던 업계는 통째로 망해 사라져 버린다. '나는 프로페셔널하다'라는 마음으로 입사한 첫 직장, 적성에 정말 잘 맞는다고 만족하며 열정을 쏟은 회사 생활, 채털리 부인에게 온 쪽지를 확인했을 때 경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곳을 나온 이후 나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 있으나 어쩐지 펼쳐 볼 마음이 일지 않는 책. 나는 어디에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출판사는 <가만한 나날>을 '사소하지만 특별한 사회생활 보고서, 인간관계 관찰일지' 로 소개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회 초년생을 따뜻하게 어루만지지 않는다. 꿈도 희망도 없다. 그저 보이는 대로 담백하게 그려낸다.


<가만한 나날>의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가만하다>라는 형용사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한 상태에 있다.’라는 뜻으로 나온다. 우리 모두는 연애와 취직, 결혼 등을 겪으며 상처받는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난 우리는 그 크기에 상관없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무던한 상태를 지향하게 된다. <가만한 나날>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지금 보내고 있는 모든 나날.



맨밑 사진 사실 정말 요거.jpeg
 



[김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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