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의 흔적이 모여 보물이 되는 순간 - 그리스 보물전

글 입력 2019.07.30 04:4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대학에 와서 나는 쉴 새 없이 고대 그리스를 만났다. 서양 고전 수업에서는 호메로스와 신들을, 철학 수업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을 만났고, 교육학을 배울 때에도 그리스의 교육을 시작점으로 배워야 했다.

특히 미술사를 배울 땐 모든 기준을 고대 그리스로 설정하고 공부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그리스에 대한 반동 또는 회귀로 대부분의 맥락이 설명되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자체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단지 어떤 것을 배우기 위한 수단으로 다룰 뿐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들을 끊임없이 접해왔겠지만 고대 그리스 자체를 주제화한 전시를 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야말로 그동안 봐왔던 것의 집합체를 맞닥뜨리는 기분이었다. 사실 인터넷에 검색하기만 하면 수천 년 전 유물도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세상에서 그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시기로, 장소로, 문명으로, 혹은 사람으로 분류하여 고대 그리스를 다양하게 비춘 전시를 보고 나오니 여태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 고대 그리스도 사람 사는 곳이었구나.


190614_공식포스터_메인_370_520_알렉산드로스-대왕.jpg
 

전시는 총 9가지의 주제와 360여 점의 소장품을 통해 기원전 5천 년경의 신석기 시대부터 기원전 323년까지의 그리스의 역사를 소개한다. 실제 그리스의 박물관이 소장 중인 본국의 유물들이 그리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경우라는 점에서 의의가 깊은 이 전시는 과연 풍부한 자료와 화려한 스케일이 압도적이었다.

에게 해에서 시작된 문명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으로 촉발된 헬레니즘 문명으로 이르기까지 그리스의 역사를 촘촘히 짚어 내리는 전시는 마치 어떤 종류의 뿌리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뿌리를 보고 나무를 보면 더 단단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전시를 다 보고 나오면 지금 이 순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새삼 대단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1. 생활의 발견


전시는 그리스 초기 문명과 그에 따른 생활양식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1부 ‘그리스 문명의 서막, 에게 해’와 2부 ‘미케네인들’의 두 섹션에 걸쳐 키클라데스 문명과 미노스 문명, 그리고 미케네 문명을 소개하며 그리스의 시작을 장대하게 소개한다.

1부에서는 신석기 시대 농업과 관련한 인물 조각상이나 사발, 용기 등의 도구부터 청동기 시대의 도기와 유적까지 훑어 내리며 문명의 시작을 펼쳐놓고, 뒤이어 2부에서는 미케네 문명을 소개하며 문명의 심화를 이야기한다.
 
문명들의 다양한 특징은 다양한 곳에서 나타난다. 이를테면 물고기를 들고 있는 벽화에서는 인간과 바다의 관계를 중요시한 에게 해 문명의 세계관이, 금으로 만든 온갖 조각과 장식품에서는 미케네 문명의 상당한 부가 엿보인다. 심지어 당시 행정 관료들이 사용했던 문서나 인장까지 소개되어 있어 통치 제도와 무역 관계의 흔적까지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곳의 생활을 통째로 옮겨놓은 것 같다. 나란하고 단정하게 진열된 전시품들에서 당시의 삶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 경제, 의식주…. 생활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그리스의 면면을 구석구석 들춰내어 한데 집약시켰기 때문이다.


다운로드.jpg
아크로티리의 소년벽화



2. 이야기의 시작


아테네 두상.jpg
아테네 두상
 

1부와 2부에서 생활을 중심으로 당시의 그리스를 재현했다면, 3부에서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리스를 소개한다. 제목인 ‘호메로스, 신화와 역사’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그리스 최대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문학과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수많은 인물과 신을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유물들이 소개된다.

3부 섹션으로 들어가면 특정인을 묘사한 조각상이 많이 보이는데, 여기서 신화를 중심으로 개인을 조명한 서사가 발달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투구를 쓴 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아테나의 두상에서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의 용맹함이 드러나며, 지금은 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삼지창을 들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포세이돈 조각상의 팔에서는 금방이라도 거대한 파도를 일으킬 듯한 신의 전능함이 표현되고 있다.

신화의 한 장면을 포착한 듯 역동적으로 표현된 조각상들은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한다. 이야기의 시작이다. 단순한 허구가 아닌 역사를 기반으로 촘촘히 쌓아 올린 그리스인들의 서사는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 흔적이자 결과이다. 조각상들로 빼곡한 전시관에서는 신을 표현하면서도 그 속에 있는 인간성을 도출해내고자 한 그리스인들의 인본주의적 고민이 시대를 초월하여 숨 쉬고 있었다.



3. 그리스인의 이상


코레.jpg
코레
 

철 기술의 전파와 폴리스의 결합 등 격렬한 역사적 변화를 담아낸 4부 ‘아케익 시대의 귀족들’을 지나 5부 ‘쿠로스와 코레’, 6부 ‘운동선수들’에서는 그리스가 인간에게 바란 이상을 제시한다.

나체의 남성 조각상을 이르는 쿠로스와 의복을 입은 여성 조각상을 이르는 코레는 인간을 다방면으로 묘사하고자 한 그리스의 인본주의적 이상을 함축하고, 운동선수들의 모습이 표현된 조각은 건강과 육체미를 중요시했던 그리스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여준다. 특히 6부 섹션에는 운동선수들의 모습뿐 아니라 운동 경기에 쓰였던 운동 기구 및 도구들과 암포라 등의 우승 상품도 진열되어 있어 당시 그리스가 얼마나 운동을 중요시했는지 상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7부 ‘아테네인들’에서는 그리스인들이 꿈꾸고 일궈낸 이상적인 국가와 가정의 모습을 소개한다. 여러 폴리스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그리스는 완벽하진 않지만 민주 정치를 탁월하게 실현했다. ‘도편 추방제’에서 사용되었던 도편을 교과서가 아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투박한 모습이나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상 국가를 향한 그리스인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또 가족을 중요시한 그리스인의 이상 역시 곳곳에서 나타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일정한 묘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8부 ‘필리포스 2세’와 마지막 9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새로운 시대의 서막’에서는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영웅을 소개하며 전시의 끝을 맺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을 기점으로 다양한 문화가 한데 융합되고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문명이 꽃피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 있는 마무리라고 생각한다.

전시는 끝났지만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이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살아 있는 역사’라는 생각을 머금게 되기 때문이다.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지금은 이상적인 영웅이 아닐지라도, 그들이 만들어낸 국가와 역사가 여전한 이상으로 불릴 만한 규범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Opinion


‘그리스 보물전’이라는 전시의 이름이 생경하게 느껴질 만큼, 고대의 유적에 대한 경외심보다 그저 어떤 이들의 삶에 친근하게 접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생활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좋아했는지, 무엇을 이상으로 생각하고 꿈꿨는지 묻고 답하며 낯익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들의 평범한 삶의 대답들이 시간이 지나 쌓이고 쌓여 보물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는 단순한 생각이 홀연히 드는 순간, 그렇게 모범 삼아 배우고 공부했던 고대의 그리스가 처음으로 교과서 속 도판이 아닌 보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나의 생활, 나의 이야기, 나의 이상도 시간이 지나면 보물이 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이 몸소 남긴 대답이 잔잔한 위로가 되었던 시간이었다.




전문필진.jpg
 

[조현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