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전시회를 즐기는 방법 - 그리스 보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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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국의 신화나 일본의 신화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어쩐지 더 친숙하다. 어릴 적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책 덕분이다. 나뿐만 아니라 현재 2, 30대가 된 사람 중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책을 안 본 사람은 적을 것이다. 그런 만큼 2, 30대의 대부분이 이 전시회에서 친근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예술의전당에서 진행하는 그리스 보물전이다.
유물 보고 유추하기
아크로티리의 소년 벽화
©The Hellenic Ministry of Culture and Sports
그리스 보물전은 총 9부로 진행된다. 그리스 문명이 시작한 에게 해에 대한 이야기부터 그들의 생활 방식, 시와 공연과 운동, 신화, 정치 등 다양한 면을 유물의 흔적을 통해 알려준다. 그중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아크로티리의 소년 벽화’였다.
소년이 줄줄이 꿴 생선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전시회의 설명으로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에 해협 활동으로 삶을 유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바다 생물이 그들에게 굉장히 주요한 식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적혀있다. 그 외에도 도자기에 소라나 문어가 그려진 그림을 통해 고대 사회가 바다와 밀접했고, 소라나 문어 등이 흔한 동물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전시회에서 문화를 읽는 재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방의 중간쯤 가면 무엇을 담고 저장하는지에 따라 도자기와 잔의 이름이 어떻게 바뀌는지 적힌 공간이 나온다. 암포라는 물과 기름, 술이나 곡식 등을 저장한 항아리를 말하고 칸타로스는 술잔, 킬릭스는 연회용 술잔, 오이노코이는 와인을 담은 주전자를 말한다. 이 외에도 스키포스, 디노스, 크라테르, 아스코스 등 전시회장에 적힌 약 15가지의 잔과 도자기의 이름 중 8개가 모두 술과 관련된 용도로 쓰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빠질 수 없이 나오는 신 중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존재하는 걸 보면서 일전부터 짐작했지만, 수많은 술잔 이름을 보며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리스 시대 사람들이 술을 참 좋아한다고. 한국인으로 치면 막걸릿잔, 소주잔, 맥주잔, 보드카와 주스를 섞는 병 등에 모두 각각 이름을 붙이는 격이다. 한국인도 술을 좋아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민족이라 생각했는데, 전시회를 보고 나니 둘째라면 고마워해야 할 수준이다.
칸타로스 (술잔)©The Hellenic Ministry of Culture and Sports전시회장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프라이팬도 그렇다. 곡식을 담는 도자기 등은 이미 자주 봐서 익숙한데, 그 당시에도 프라이팬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불을 발견한 인류가 음식을 구워 먹는다는 사실은 초등학교 때 배웠지만 어떤 도구를 쓰는지는 생각해본 적 없다. 그런데 이렇게 프라이팬을 보니 당시에도 프라이팬에 고기를 구워 먹었겠지 싶다. 괜히 웃음이 난다.
정치와 예술의 나라
그리스 시대에 유명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민주적인 투표일 것이다. 추방당할 사람을 도자기에 적은 뒤 모아 가장 이름이 많이 적힌 사람을 추방하는 시스템에 대해서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볼 기회가 없어서 도자기에 글을 쓴다는 게 감이 오지 않았는데, 이번 그리스 보물전에서 드디어 만났다.
무엇으로 글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깔끔하고 정확하게 글씨가 적혀 있었다. 당시의 알파벳은 현대와 다르게 세모난 모양이 있다는 게 독특하다. 한국의 고대 삼각꼴 문자처럼 ‘ㅅ’ 소리가 날까, 싶어 적힌 문자와 아래 해설이 적힌 글을 뚫어져라 봤지만 결국 세모꼴이 현대에는 어떤 알파벳으로 변동했는지, 혹은 읽히는지 알 수 없었다.
비극배우 가면
또 한 가지 유명한 것이 바로 연극일 것이다. 호메로스 서사시나 디오니소스 축제의 연극 등 후대 예술계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 전시회장 내부에는 당시 연극에 쓰인 가면이 전시되어 있었다. 비극 배우의 가면은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지고 코는 크게 벌름거리는 형태라 멀리서 봐도 슬픔을 느낄 수 있고, 반대로 희극 배우의 가면은 입이 아래로 쭉 내려와 누가 잡아당긴 것만 같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크게 웃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이 크고 무거워 보이는 돌과 철 덩어리를 어떻게 쓰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한국의 탈과 비슷한 것도 같다. 하회탈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양이고, 노장탈은 비교적 입꼬리가 아래로 축 내려가 있다. 한국 탈은 희비극이 아니라 캐릭터의 지위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것만 다르다. 한국 탈은 그리스 가면처럼 무거워 보이진 않는다는 점도.
결국 태양은 진다
서두를 연 것처럼, 그리스 로마 시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토착 신화일 것이다. 제우스와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아폴론, 포세이돈, 하데스, 아테나, 아레스 등 수많은 신이 그 당시에 사람들을 지켜주고 벌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리스 보물전’에도 이들의 석상이 존재하는데, 대부분은 코나 팔 등이 깨져있다. 과거 성대한 문화를 일구었던 그리스의 초라한 석상을 보자 복잡한 심경이었다.
오백 년 도음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은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의 쇠망을 노래한 조선 초 성리학자 길재의 회고가가 이렇게 잘 와 닿을 수가 없다.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성대한 시대가 세월의 앞에 무너져 초라하게 남은 걸 보면서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나마 뛰어난 장인의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할 작품이 남아있으니 다행인 걸까.
황금 도금양 화관
©The Hellenic Ministry of Culture and Sports
신들을 기리는 조각상뿐 아니라 ‘황금 도금양 화관’을 볼 때도 같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화려한 모양을 저렇게 얇은 금을 여러 개 엮어서 만들 수 있다니. 한동안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나라는 무너져도 아름답고 위대한 것은 남는 모양이다.
반대로 어떤 소상의 경우 돌의 색이 변하지도 않고 깔끔하고 반질거리는 게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보존되었길래 여전히 매끄러울 수 있을까. 어쩌면 유물을 발견한 학자들이 성심성의껏 닦아낸 걸지도 모르겠다. 유물을 제작한 고대 사람만큼이나 사랑과 관심을 담아서.
그리스와 나의 공통점, 그리스 보물전
종종 아는 것이 없어 전시회를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아는 것이 없어서 전시회가 즐거울 때도 있다. 비록 내 해석이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유물을 살피면서 당시의 시대 상황을 파악해보고, 내가 아는 지식 내에서 비슷한 것과 맞춰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어렵다면, 그냥 느껴도 좋을 것이다. 보이는 걸 보고, 섬세한 것에 감탄하거나 하찮은 것에 웃음을 흘리며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지만, 꼭 많이 보아야 좋은 것은 아니니까.
어느 나라에서나 시를 읊고 연극을 즐기며 탈을 썼다는 게 참 신기하다. 바다가 가까운 나라에서는 해양 생물을 그림을 보며 유추하고 하고 식물을 길러 먹는 것이 익숙한 나라에서는 쌀에 여러 이름을 붙인 사실을 통해 알아차린다. 나라도, 자연환경도, 언어도, 문화와 사회적 규율도 모두 다르지만, 하나하나 찾아보면 시대와 위치를 건너 모든 나라에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같은 종족이다. 학자가 유물이나 현대까지 남아있는 언어 속 흔적으로 알아내면 우리는 유물이 모두 모인 전시회에 가 학자가 유추한 것을 또 한 번 나름대로 유추해본다. 꼭 영화 속 멋진 박사가 된 기분이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리스 보물전 전시회장을 걷는 내내 고대 시대 사람과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탐정이 된 것도 같았다. 수많은 역사와 문화와 신화가 기록된 큰 전시회장 안에서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기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혜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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