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생에서 운명의 공간은 딱 하나뿐이라는 걸 [문화 공간]

네가 만났던 '운명의 공간'을 찾기 위해서
글 입력 2019.07.2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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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점을 사랑한다.


퀴퀴한 공기에 숨이 턱 막히는 헌책방도 좋고 멋들어지게 꾸며 놓은 대형 서점도 좋다. 사장님의 취향대로 간단하게 몇 권 꽂아놓은 감각적인 카페도 매력적이다. 사실 서점에 가서 책을 읽는 일은 거의 없다. 읽더라도 급한 성격 탓에 국물 마시듯 후루룩 읽어버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책은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이나 내 책상에 앉아서 찬찬히 읽는 게 제 맛이지. 서점은 그냥 분위기가 좋다. 조용조용한 사람들의 발걸음과 잔잔하게 책을 넘기는 손길. 온통 고소한 서점의 공기. 그 분위기에 취하고 싶어 서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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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가 없는 잔잔한 노래는 분위기를 깨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준다. 가게 구석까지 들릴 듯 말 듯 조용하게 메우는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을 듣고 있자면 욕조에 받아놓은 뜨거운 목욕물에 발을 담근 것 같이 노곤노곤한 기분까지 들곤 한다. 간혹 유행하는 가요를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한 곡들이 흘러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귀에 익은 노래들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요즈음 서점에는 책뿐만 아니라 책과 어울리는 소품들도 진열해 놓는 경우가 많다. 책과 관련된 책갈피나 메모지, 필통 같은 기본적인 필기구는 물론이고, 스티커나 손수건 같은 작가들의 다른 작품을 책과 함께 전시해 놓기도 한다. 책이 아닌 전시회 느낌도 물씬 들고 이 작가에 대해 궁금한 마음도 커진다.


책과 전혀 무관하더라도 서점의 차분한 분위기와 어울리는 소품들도 많다. 감각적인 설명을 덧붙인 향수라던가 지갑, 머그컵 같이 소소하고 예쁜 소품들은 볼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지난 주 나를 설레게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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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내가 좋아하는 두 곳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먼저 을지로의 아크앤북(ARC N BOOK)은 문화적인 콘텐츠로 라이프 스타일이 결합된 새로운 유형의 소비를 창출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이 안에서는 심지어 식사와 디저트까지 해결할 수 있어 하루를 통째로 보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쁘게 전시해 놓은 책과 소품에 푹 빠져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면 몇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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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율전동의 ‘비추는 별’에도 소량의 책이 비치되어 있다. 일본식 수제 디저트 전문인 카페답게 이 카페의 사장님은 일본 출장을 다녀오는 일이 잦다. 그래서 일본어로 된 책과 잡지가 많다. 카페다 보니 커피나 빵, 카페를 다룬 책들이 다수다. 이렇게 사장님이 모아 놓은 책을 구경하고 한 권 한 권 들추다 보면 다른 사람의 취향을 슬쩍 엿보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온통 나의 취향대로 꾸며진 공간을 정신없이 구경하면 가슴이 정말이지 쿵쾅대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오늘 몇 시간을 이 속에 파묻혀 있었다는 생각만으로도 짜릿하고 행복하다. 물론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은 거의 없다. 이런 감각적인 소품들 사이에서 마음에 쏙 드는 것을 찾지 않는 게 더 힘든 법이다.



책을 고르는 사소한 기준

보통은 소품들보다 책을 사는 일이 잦다. 읽었던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소장 가치가 가장 큰 물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 놓은 책을 매일 읽지 않더라도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힌 책은 좋은 느낌을 준다.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는 안정감. 또한 같은 책이라도 두 번 읽을 때 다르고 다섯 번 읽을 때 다르다. 책 읽는 속도가 조금 빠른 편인 나는 여러 번 읽으면서 처음 읽었을 때 놓쳤던 부분을 발견하는 재미를 즐긴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아주 간단하다. 먼저 읽어보지 않은 책을 사는 경우, 책장만 몇 장 넘기거나 뒤에 붙은 해설을 읽어 전체적인 주제나 분위기만 파악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표지이다. 나에게는 조금 작고 얇아서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읽을 수 있는 책이 가장 좋다. 표지는 아무 무늬도 없거나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의 일러스트 정도가 적당하다.

채도가 낮은 은은한 색감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딱딱한 하드표지를 사랑한다. ‘책’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책. 가끔 읽었던 책을 사는 경우도 있다. 책에 정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읽어서 책장을 덮은 후 가슴이 두근거릴 때, 어떻게 그 책을 다시 두고 집에 올 수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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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그림책을 한 권 샀다. 작가님의 책 몇 권이 소품들과 함께 오묘한 불빛 아래 전시되어 있었는데, 작가님의 세계에 푹 빠져 그 앞에서 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당연하게 한 권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김승연 작가님의 <날개양품점>이라는 책인데, 당분간은 이 작가님의 일러스트에 그리고 그림책에 푹 빠진 삶을 보낼 것 같다.

아래는 작가님의 책을 읽다 달큰해진 한 편의 시이다. 그때의 나처럼, 오늘 나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딱 맞는 모자를, 딱 맞는 공간을 찾아 운명같은 하루를 보내기를 바래본다.


 


모자의 숲



이 숲에 들어온 사람들은

길을 잃고 헤메곤 해.

그러다 운이 좋으면 운명처럼

자신의 머리에 딱 맞는 모자를 만나기도 하지.

그럴 땐 잽싸게 그 ‘운명의 모자’를 머리에 쓰고

이곳을 빠져나와야 해.

만약 그 기회를 놓친다면

넌 인생의 많은 시간을

네가 만났던 ‘운명의 모자’를 찾기 위해

허비하게 될 수도 있어.

살다 보면 알게 되지.


인생에서 운명의 모자는 딱 하나뿐이라는 걸.


-김승연-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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