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먼 길 기쁘게 갈 사람, 피터 [사람]

2010년 그 해 여름.
글 입력 2019.07.06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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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가 싱클레어에게"



아직도 가슴이 찡하다. 2010년 유난히도 푸르렀던 여름을 생각하면.


욕심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좇으며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사는 피터의 변함없는 모습들을 인터뷰와 SNS로 볼 때마다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지며 여전히 참 멋지게 사는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가수이자 싱클레어의 편집장, 신촌 서당의 고전선생님, 기타를 가르치는 기타선생님, 독립잡지 디렉팅 강사 등등 그 외에도 피터를 설명할 수 있는 수많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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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한 페이지가 주어진다면"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당신에게 한 페이지가 주어진다면] 이라는 주제를 엮어 우연히 만들었던 일명 독립잡지 1세대라 불리는 “싱클레어”를 십여 년이 지난 시간 동안 끌고 온 것만으로도 그의 내공은 절대 평범한 것은 아닌 듯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하던 일은 관둔 뒤, 무얼 해야 하루하루가 미칠 것처럼 행복할까를 고민하던 찰나에 정말 우연히 “싱클레어”라는 독립잡지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정기구독신청과 동시에 정신을 차렸을 땐 “싱클레어” 창립이래 처음으로 뽑았던 인턴기자 모임 자리에 인턴기자로 앉아 있었다. (아직도 내가 그곳에 앉아있게 된 그 과정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이상한 부분..)


나름 디자이너라고 디자이너가 가지고 다닐법한 휘황찬란한 밤색 큰 부채를 흔들면서 회의실 가장 중앙자리에 떡 하니 앉아있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게 그 첫날 먹었던 치킨이다. 다 함께 모여 저녁을 먹으러 신촌 어느 즈음의 치킨집을 향했다. 첫 만남이고 모두가 어색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취기가 오르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선 그저 귀여워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었던 경험. 열서너 명 정도의 인턴 중 치킨을 먹으면서 아무도 콜라를 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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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맥. 치킨에는 맥주가 진리이거늘 그 누구도 맥주는커녕 시원한 탄산음료인 콜라 한 병도 시키지 않았다. 그저 목멘 치킨과 맹물.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맹물. 어색한 웃음과 대화들 속에 치킨과 맹물을 꾸역꾸역 먹었다. 그리고 더 웃긴 건 인턴이 끝날 때까지 그 첫날 우리가 먹었던 것이 치킨과 맹물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었다. 공식적으로 인턴이 모인 마지막 날 인턴 후기를 읽어 내려갈 때 내가 치킨과 맹물을 얘기했었고 이 부분에 관하여 모두 얼마나 깔깔거렸던지.


항상 제일 먼저 모임장소에 와서 책이라던가, 신문 등을 읽으며 또는 글을 적어가며 느긋하게 우리를 기다리던 피터의 모습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분명 우리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사실 나랑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피터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쩔 땐 동갑내기 절친들보다도 더 대화가 잘 통했다.


보통의 여느 어른들처럼 우리에게 설교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어떠한 주제가 되었던 우리 각자의 이야기들을 더 많이 들어주었고 담백한 어조로 같이 맞장구도 쳐 주고, 각각의 고민에 있어선 그와 같은 시선에서 함께 고민하고 이해하려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저 얼굴만 봐도 깔깔거리는 귀여운 여고생도 있었고, 사회생활의 찌듦에 힘들어 하던 직장인도 포함된 다양한 연령층에 아무리 편집장이라도 대하기가 수월하지 않았을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 피터는 두루두루 조화를 잘 이루게 했었고 그와 이야기를 하면 하나같이 모두가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사람들과는 너무 다른 신기한 능력자.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신림동 거지와 신촌콘서트를 나열해 놓아도 조곤조곤 독특한 목소리로 자연스레 얘기를 이어갈 수 있는 이상한 이야기꾼. 5~6세부터 7~80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가 될 법한 점잖지만 깊은 친화력을 가진 사람.


“싱클레어”가 독립잡지에선 유명한 편이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오는데 그간 힘들지 않았냐는 물음에 가만히 소파 끝자락을 보곤 시선을 들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넉넉하지 않아도 잘살게 되더라고요”



라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몇십 명도되지 않는 구독자 수로 정기구독료는 바랄 수도 없었고, 그저 잡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만들어온 것이 결코 쉬웠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담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고, 그래서 매 회 잡지를 만드는 게 즐거웠고, 하기 싫은 이유도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던, 평범한 일상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만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독립잡지의 조상님.


하기 싫은 일을 안 하고 살 순 없지만, 대신에 하기 싫은 일 하나를 했다면, 그 곱절로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하라는 평범하지만, 피부에 무척 와 닿는 얘기를 늘 들려주었다.


그래서 난 “싱클레어”를 하는 동안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를 오래도록 고민해왔고 수많은 여행을 통해 여전히 디자인 쪽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디자인을 그리며 그 속에 살아왔고 올 초까지 속옷디자이너로서 오래도록 작업을 해왔다. 또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수천 가지의 하기 싫은 일을 해가며 가끔은 험한 쌈닭도 되어야 한다는 현실은 1+1처럼 부록으로 함께 한다. 언제고 피터를 다시 만난다면 이 부분에 대한 상담을 다시 한번 하고 싶다.


또한 피터를 따라서 나 또한 매일 하루에 하나씩 글을 쓰는 버릇이 생겼다. 좋은 메모지가 아니더라도 영수증 뒤나, 수첩, 엽서든 메모를 할 수 있는 어느 곳이든 짧게라도 꼭 쓰게 된다. 하루를 정리하는 딱 한 문장이라도!


지금도 매년 여름이 되면 10년 전 딱 이맘때의 그때의 그 여름밤, 홍대 거리가 생각난다. 가끔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을 만나면 앞으로 과연 이들처럼 순수한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시간이 많이 흘러 그때의 그 귀여운 꼬맹이 여고생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좋아하는 삶을 살기 위해 다른 20대의 청춘들보다 더 부지런히 눈빛을 밝히며 총총거리고 있고, 새내기 신입생이었던 감수성 풍부한 예쁜이들은 어느덧 직장인이 되어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을 함께 걱정하는 또 다른 청춘이 되어 있고, 자아를 찾기 위해 외국으로, 지방으로 떠난 이들도 있으며, 난 지금의 내 일을 제외한 또 다른 재밌고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


그리고 피터는 늘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신촌 서당을 지어 고전 읽기를 하고 있으며, 여전히 공연할 땐 파란색 운동화를 신고 기타를 메고 “너와 오키나와”를 부르며, 그 특유의 목소리와 배려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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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과 다른 그의 가장 큰 변화는 오래전 “싱클레어” 호에 적어 놓았던 것처럼 경주 어느 작은 앞마당이 있는 집에서 사랑하는 부인과 예쁜 딸을 낳아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 여전히 그 만의 방식으로 즐겁고, 서두르지 않으며, 천천히 행복하게.


어떤 이는 “싱클레어”가 블로그에 써 놓는 글을 모아놓은 것 같다는 모호한 말을 하지만 난 오히려 일기 글처럼 쉽게 더 잘 읽혀서 “싱클레어”가 아주 좋았다. 원래 심오한 것보다 평범한 것에서 가슴을 울리는 게 훨씬 많은 법이니까.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제목, 디자인, 편집, 글을 쓰는 것 등 하나부터 열 가지 모두가 피터의 손을 거친 소중한 땀방울의 작업물.


지금 “싱클레어”는 휴간을 했지만, 피터가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늘 그래 왔듯 지금처럼 중심에서 본인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그만의 방식으로 지키며 앞으로도 계속 그의 즐거운 작업과 웃음을 보고 싶다. 편집장으로서 가수로서 선생님으로서 그리고 한 가족의 따뜻하고 든든한 가장으로서.


그는 분명 먼 길 기쁘게 갈 사람이니까.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 양손 마주 잡고 더 기쁘게 갈 것이다.



[정선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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