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뼛속까지 예술가인 비운의 천재 작가 베르나르 뷔페의 일생

글 입력 2019.07.0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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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뷔페. 처음에 주변 지인들에게 베르나르 뷔페 전시를 간다고 하면 다들 음식을 무한으로 먹는 뷔페 이야기를 하면서 장난삼아 농담을 던진 게 기억난다. 그만큼 뷔페라는 인물은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중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실제로도 뷔페라는 인물의 개인 서적이 존재하지 않을 만큼 알려지지 않았고 이번 전시의 도록이 유일한 작가의 첫 번째 한국 책이라고 한다.

물론 나는 전시를 좋아하지만 전문적으로 미술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뷔페라는 인물은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샤갈, 달리, 뷔페 전시에서 이름만 들었을 뿐이다. 물론 그 전시를 보지 못해서 잘 알지 못했기도 했지만 샤갈, 달리, 뷔페 전시에 피날레를 장식했던 뷔페는 이번 예술의전당에서 뷔페 사후 20주년 기념으로 단독 전시가 열리게 된다. 이번 뷔페 전시는 샤갈 달리 뷔페 전시와 같은 소속사라고 하니 뷔페 전을 고려해두고 전시를 열었구나! 하는 마케팅적 생각도 하게 된다.

전시를 보러 가기 전 전시에 대한 기대감을 담아 프리뷰를 썼지만 메인 작품 몇 가지를 보면서 작품 속에 담겨있는 그림들은 무척 어둡고 암울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취향을 많이 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 또한 그림에 대한 호감이 크진 않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채 전시를 보러 갔지만 전시를 보고 나서 생각이 싹 바뀌었다.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었구나 하는 걸 알고 나니 뷔페라는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들었다.

뷔페전은 굉장히 어렵게 열린 전시라고 한다. 프랑스에선 뷔페라는 작가는 거의 모든 프랑스 국민이 안티였다고 볼 수 있을 만큼 비난을 많이 받았다. 최근 들어 뷔페가 다시 회자되면서 회고전을 열어 뷔페라는 인물을 다시 재평가하고 있지만 프랑스 국민들의 모든 질타를 들었던 뷔페였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그 흔한 박물관조차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을 놓을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뷔페의 박물관이 이제야 공사에 들어갔는데 박물관이 완공되기 전 그의 작품들을 대관할 수 있어 열릴 수 있던 전시였다. 만약 박물관이 있었더라면 현재 있는 작품들 대부분은 절대 한국 땅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이번 전시에 있는 구십여 점의 그림들 모두 실제 뷔페가 그린 원화 작품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도슨트를 들을까 고민을 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서 우선 오디오를 대여해서 듣다가 마침 도슨트 시간이 되어서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이 맞아서 겸사겸사 들었다. 하지만 도슨트 투어를 다 끝낸 후 이 투어를 듣지 않았더라면 뷔페라는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을 정도로 투어에 대해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작품에 대한 설명은 사실상 캡션이나 오디오 가이드를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뷔페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모른다면 그림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림은 작가를 이해한다면 그림 만 보아도 이는 훌륭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뷔페의 모습을 들을 수 있었다. 전시를 구경하게 되면 어떤 테마로 나누어져 있나부터 보았지만 이번 뷔페전은 나이가 든 할머니가 손자 손녀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베르나르 뷔페의 영원한 뮤즈인 아나벨이 들려주는 뷔페의 이야기로 담겨있는 전시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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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Buffet, Homme a l'oeuf sur le plat, 1947, huile sur toile, 96x90cm, ⓒ Bernard Buffet / ADAGP, Paris - SACK, Seou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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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Buffet, Table et chaise, 1950, huile sur toile, 97x146cm, ⓒ Bernard Buffet / ADAGP, Paris - SACK, Seoul, 2019



1. 뷔페의 불운한 어린 시절


프리뷰에서 이미 찾아보았지만 뷔페는 192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거울 공장에서 일했던 아버지. 그리고 가톨릭 신자의 어머니가 있었지만 가정에 관심이 없던 아버지여서 뷔페에게 있어 행복한 순간은 전부 어머니였고 뷔페에게 있어 사랑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몸이 약하고 소심했던 뷔페는 학교에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하기 어려웠고 그는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와서 혼자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우연히 그림을 보던 어머니는 뷔페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차렸고 낮에는 학교, 밤에 미술 학원에 다니게 해주었다. 뷔페는 해가지는 밤이 되면 그림을 그릴 수 있어 행복해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학교 교육 과정에 대해 비판을 하다 퇴학을 당하게 되지만 그때 뷔페의 재능을 알고 있던 선생님이 미술 학교를 추천해주었고 15살에 시험을 치르고 최초로 조기에 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파리 에콜데보자르 라는 학교인데 프랑스의 대표 미술 학교로 이곳에서 제대로 된 고전풍 그림을 익히며 그곳에 나의 개성을 넣는 방법들을 알게 된다.

뷔페의 어린 시절엔 주로 정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에 걸맞게 첫 공간엔 과일, 유리병, 유리잔 등이 많이 보였고 과일들을 주로 말라비틀어져 있었고 유리병이나 와인잔은 비어있었는데 이는 빈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생기 없는 모습 그리고 이차 세계대전을 겪어 메마르고 황폐한 현실을 정물로 표현 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테이블이 원근법을 어기고 있는데 유독 테이블만 어긴 이유는 바로 뷔페 그림의 특징으로 테이블을 어긴 작품은 바로 나의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하니 뷔페 그림이구나 하는 걸 단번에 알아차리도록 놓은 구성이다.

그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배경인데 물감을 칠하고 다시 칠한 부분을 다 긁어놓았다. 주로 초창기에 쓰인 특징인데 그 이유는 바로 뷔페는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정물의 재료들은 얻어서 쓴 것이고 물감을 얇게 칠하고 그걸 긁어냄으로써 물감을 아끼는 것과 동시에 뷔페의 아픈 상처를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중에는 뷔페는 자신의 뮤즈를 만나 상처를 치유하고 이렇게 긁는 부분이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뷔페의 초창기 인물화 또한 정물화와 비슷하다. 세로로 길게 그려진 말라비틀어진 사람들. 생기가 없이 표현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 뷔페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로 테스 하다. 무섭다는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뷔페의 초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다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차 세계대전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이 모든 프랑스의 물건을 다 빼앗아갔기 때문에 사람들 모두가  영양실조에 걸려 빼빼 마른 모습이었고 너무 추우면 공공장소에 모여 서로의 몸을 녹였다고 한다. 심지어 뷔페는 폭격도 직접 마주쳤는데 15살의 어린 나이에 계속해서 마을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죽음에 집착을 하게 되는 모습을 장례식이라는 작품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뷔페의 그림들을 보며 뷔페 "네가 20세기의 증인이다."라는 말을 남겼으니 그가 그린 그림은 지극히 현실적인 당시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계 대전은 끝나고 모두가 해방이 될 때, 뷔페의 엄마가 뇌종양으로 죽게 된다. 뷔페는 최악의 고독을 느끼게 되는데 그림만 그리면 어머니 생각을 지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회와 단절이 된 채 방에서 일 년 동안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18세가 되었을 때 세상에 나와 작정이라도 한 듯 여러 작품들을 출품하면서 프랑스 예술의 판도가 뒤바뀌기 시작한다. 그의 작품의 특징처럼 시대를 제대로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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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Buffet, Interieurs - Homme assis, 1953, huile sur toile, 218x195cm, ⓒ Bernard Buffet / ADAGP, Paris - SACK, Seou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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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Buffet, Travesti, 1953, huile sur toile, 81x65cm, ⓒ Bernard Buffet / ADAGP, Paris - SACK, Seoul, 2019



2. 짧은 뷔페의 전성기


뷔페는 피카소랑 견줄 만큼 굉장한 인기를 얻으며 "피카소는 구식이고 프랑스의 예술은 뷔페다"라고 할 정도로 뷔페의 세상이 펼쳐지게 된다. 실제로 22세에는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하니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이 5명 중 하나가 뷔페였다고 한다. 그는 돈이 점점 생기면서 프로방스로 가서 다시 미술 기법을 익히는데 그전에는 주로 무채색의 색이 많았다면 점차 컬러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는 돈이 생기니 물감을 산 거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전시회만 열었다면 전시회가 아니라 폭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올 만큼 대단했고 당시에는 피카소보다 뷔페의 그림이 더 비쌌다고 하니 말을 다 했다. 그래서 피카소도 뷔페의 그림을 보러 온 적도 있다고 하니 대단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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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Buffet, Paysages de Paris - La Cite et Notre-Dame, 1956, huile sur toile, 114x162cm, ⓒ Bernard Buffet / ADAGP, Paris - SACK, Seou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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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Buffet, Annabel en robe du soir, 1960, huile sur toile, 130x81cm, ⓒ Bernard Buffet / ADAGP, Paris - SACK, Seoul, 2019



3. 사랑하는 여인이자 뮤즈 아나벨과의 만남 그리고 추락하는 명성


뷔페는 1958년 전속 사진작가 루코넬이 앉아있는 할머니를 찍고 싶어 연출을 위해 자신이 아는 사람 둘을 부르게 되는데 그게 바로 아나벨과 뷔페였다. 아나벨은 뷔페의 동네에서 가장 이쁘고 인기 있던 모델 겸 가수였다. 둘은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되었고 두 번째 파티에서 만나 사귀게 된다. 뷔페와 에나벨은 100킬로 정도 떨어진 거리였는데 뷔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나벨을 보러 갔다고 하니 굉장한 사랑꾼임을 알 수 있다.

뷔페는 그림을 그리고 아나벨은 글을 쓴다.  둘 다 예술가였기 때문에 한 사람의 뮤즈가 아닌 둘은 서로의 뮤즈였다. 둘 다 가지고 있는 아픔도 비슷해서 서로를 위로해주는 영혼의 동반자와 마찬가지였다. 그가 에나벨을 얼마나 사랑했냐면 에나벨의 자화상 그림 시리즈를 제작하기도 하고 그림으로 유언장을 남겼는데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을 에나벨에게 주라는 글의 유언장이었다. 이 유언장이 공증이 안될까 봐 자신의 손으로 물감을 묻혀 그림 이곳저곳에 찍어 놓았는데 바로 자신의 지문을 표시하기 위함이라니 에나벨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었다.

뷔페는 아나벨과 여행을 떠나면서 도시의 랜드마크들을 그림으로 남기게 된다. 그러면서 풍경 작업을 시작하지만  60년대부터는 그의 명성이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매우 복합적인 요소로 보는데 뷔페는 어린 나이에 빠른 성공을 했고 천재 예술가보다는 셀럽이나 스타로 보았기 때문에 작품성을 보는 것보단 얼마에 그림을 팔렸는지 무엇을 샀는지 등의 가십이 더 떠올랐고 예술적으로 평론가들은 그를 철저하게 왕따를 시키는데 뷔페가 전시회를 열어도 아무도 전시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뷔페는 젊은 나이에 돈도 많이 벌고 잘생겼고 키도 크고 연예인 아내가 있으면서 타고난 천재성에 사람들이 질투와 시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돈을 많이 버니까 풍경화만 그리고 변했네?"라고 비판을 하였고 뷔페는 프랑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뷔페는 사회성이 좀 떨어졌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당시에 비난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롤스웨이드 명품 차를 사면서 엄청난 욕을 먹게 된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차를 산 이유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부의 상징인 그 차를 산 이유는 단순히 이뻐서 샀다고 했다. 예쁜 차를 보고 영감을 받아 자동차 시리즈도 그렸고 실제로 죽을 때까지 그는 운전을 못했다고 한다. 정말 그림을 그리는 영감을 위해 샀음을 통해 그가 얼마나 순수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프랑스에서 뷔페가 이렇게 비판을 받은 이유는 예술의 중심지가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옮겨지면서 다시 프랑스 예술을 부흥 시키기 위해 구상미술을 누르고 추상미술을 홍보하면서 뷔페가 점차 묻히게 되다. 이건 시대의 흐름이나 상황이 복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뷔페는 죽을 때까지 한마디도 비평에 대한 반박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나를 향한 비난은 나를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시켰다"라는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필자는 뷔페는 뼛속까지 예술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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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Buffet, La mort 10, 1999, huile sur toile, 195x114cm, ⓒ Bernard Buffet / ADAGP, Paris - SACK, Seoul, 2019



4. 뷔페의 마지막


뷔페는 90년대 후반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고 병으로 인해 넘어지면서 손을 다치게 된다. 뷔페에게 있어서 그림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기 때문에 그림 없이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는 질문을 던졌을 만큼 그림은 그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했다. 게다가 당시 세기말의 분위기였기 때문에 " 21세기엔 그림 없이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라며 의문을 가지고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던 그는 아픈 몸으로 브르타뉴의 폭풍이라는 작품을 남기게 되는데 브류타뉴라는 장소는 뷔페에게 있어 어머니와의 추억의 장소이다. 어머니와의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브르타뉴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많이 남겼지만 날씨가 폭풍인 경우는 지금까지 그려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본 아나벨은 뷔페가 곧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무서움에 날카로운 모든 것들을 집에서 치웠다고 하니 뷔페의 두려움이 아나벨에게도 직접적으로 느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뷔페는 죽기로 마음을 먹은 것인지 죽음을 주제로 하는 시리즈 24점을 그리는데 24점 모두 해골이 등장하고 그 안에 생명의 징조인 장기들을 하나씩 그려놓는다. 그는 6개월 동안 24점의 그림을 모두 그리고 다시는 붓을 잡지 못하게 된다.

평화로운 어느 날, 그는 아나벨과 어느 때와 똑같이 식사를 하고 산책을 갔다가 온다. 여느 때처럼  뷔페는 작업실로 들어갔지만 그날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작업실 근처에 있던 마리아 상에게 장미 한 송이를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뷔페를 기다리다 작업실로 간 아나벨이 죽은 뷔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999년 10월 4일 뷔페는 질식사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편안하게 미소를 지은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뷔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사는 것이었고 그리지 못하는 것이 죽는 것이었으니 인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는 그림에 지배를 당했었다. 결국 그림에 파묻힌 것처럼 자신의 몸을 그림에 던진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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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Buffet, Autoportrait au chevalet, 1948, huile sur toile, 200x94cm, ⓒ Bernard Buffet / ADAGP, Paris - SACK, Seoul, 2019



5. 전시를 보고 나서


뷔페는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냐는 질문에 만약 신이 다시 생명을 주신다면 나는 다시 화가로 살 것이라며 인생이 멋지다면 예술가의 삶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전시와 뷔페가 남긴 다양한 말들을 보면서 나 또한 뷔페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정말 뼛속까지 예술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죽기 전 유언장을 하나 남겼는데 그는 유언장은 손이 너무 떨려서 알아보기 힘들었을 만큼 떨렸다고 한다. 그만큼 손을 쓸 수 없었고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괴로움이 죽음을 택할 만큼 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예술가의 삶을 통해서 작가의 인생과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었고 인간적인 뷔페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그가 남긴 작품들로 그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비난을 받더라도 그는 그저 그림을 좋아했던 순수한 예술가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던 전시였고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재미있고 감동적인 전시였다. 뷔페라는 인물은 저평가 되었지만 앞으로 재평가되며 위대한 한 명의 예술가로 이름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길 바란다.


[박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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