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존재가 이토록 아름다우니 절망할 필요 없다. 법화경 마음공부

글 입력 2019.05.21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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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존재가 이토록 아름다우니 절망할 필요 없다

법화경 마음공부


기능하고 사고하는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 수치화될 수 없는 무궁무진한 존재다. 우리가 삶이라고 정의하는 시간의 흐름은 개인의 사고와 정서에 큰 영향을 준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순간 발생하는 인간의 감정을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 당장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정의하지 못한다. 자아의 기본적인 재료인 기억과 인지조차도 왜곡되기 쉬운데, 어떻게 자아를 정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고 자유의지를 가졌다. 그 과정에서 연대와 차별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수많은 역사 속에서 빛나는 문명을 일궈냈다.

이처럼 우리는 복잡한 체계를 존재지만, 하나하나 따져 나가면, 우리의 존재는 작고 미세하기 짝이 없다. 우주 안에서는 우리의 행성 자체가 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는 아직까지도 동력원을 가진 거대한 돌덩이가 스스로 기울어진 채로 회전하며 생물들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자연 앞에서 우리는 땅에 묻히는 나뭇잎만큼 작고 순간적이다. 범위를 축소시켜도 마찬가지다. 인간 사회 안에서 한 인간의 삶은 모두 기록되지 않는다.

우리는 거대하면서 미세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세계를 품고 있는데,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위대하고 작은 세계에서 필연적인 고통을 마주한다. <법화경>은 석가모니가 말년에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경전이다. <법화경>의 정식 명칭은 <묘법연화경>으로, 제목에 연꽃의 이름이 들어간 유일한 불경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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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은 은밀한 곳에서 조용히 피는 꽃이다. 또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가 맺힌다. 연꽃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결실임을 의미한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존재의 꽃이다.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연꽃은 더러움 속에서도 깨끗한 것이 나온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시끄럽고 연기가 뿜어나오는 도시든, 물 한모금 없는 벌판이든 연꽃은 은은한 향기를 담담하게 풍기며 고요한 경지로 사람을 이끈다. 연꽃이 불교의 꽃이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다시 <법화경>에 대한 정의로 돌아가서, 연꽃을 이름으로 다록 있는 <법화경>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조화롭게 아우르는 책이다. 개인의 해탈과 중생의 구원이라는 두가지 방향 속에서 불교 내부에서 여러가지 이견이 있었다. 석가모니는 <법화경>을 통해 중생에 따라 각기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일 뿐, 성불하는 방법은 같다고 했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융의 말이 떠오른다. '개성화(자아통합)에 이르는 방법은 반드시 상담일 필요는 없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인간은 진정한 그 자신이 된다'.

석가는 자아를 잊으라하고, 융은 자아를 통합하라 했기 때문에 두 문장은 모순되어 보일 수 있지만, 필자는 결국 이르는 길이 같다고 생각한다. 결국 만들어진 자아-페르소나-를 이해하는 것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나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니었지만, 내 것인 것처럼 굴었던 것들을 이해하다보면, 만들어진 자아를 구분할 수 있다. 필자는 이것이 불교의 공의 사상이나 보시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성화된 존재는 결국 나를 넘어선 존재다.


융도 이 수준에 이른 것들은 성인 뿐이라 여겼다. 해탈한 보살, 개성화된 존재는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법화경>을 읽어야 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이런 맥락에서 존재한다. 부처는 중생에게 <법화경>을 받아 수시로 외고 전하라 했다. 이 과정 속에서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고 모든 집착이 사라진다 했다. 집착이 없다면 우리를 누가 괴롭게 할 수 있을까?

오늘 소개할 책, <법화경 마음공부>는 법화경을 일반대중에게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은 책이다. 책은 법화경의 주요 내용과 쉬운 언어로 저술한 해설의 구성을 갖추고 있다. 저자인 페이융은 중국의 대표적인 불경 연구가다. 중국 저장 출신인 저자는 15세에 대학에 입학해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90년부터 불경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수천 년 이어 온 지혜의 보고인 불교를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데 30여 년의 세월을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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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르주나 : 용수의 불상화



법화경, 불타는 집에 대한 비유


아주 큰 집에 대가족이 살고 있다. 이 집에 불이 났는데, 아이들은 불난 줄도 모르고 뛰어놀고 나이 든 아버지만이 이 집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서 불타는 집에서 나가야 하는데, 아이들은 불났다는 말도 믿지 않고 밖에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가지 꾀를 낸다. 바깥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보물이 있다고 알려 준 것이다. 그러자 아이들이 줄지어 집 밖으로 나와 탁 트인 길에서 마음껏 뛰어다녔다.


집에 불이 나면 문을 찾아 빠져나와야 한다. 이 당연한 이치를 <법화경>은 불타는 집의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법화경>의 핵심이며, 불법의 기본 교리도 이 말 한마디에 담겨있다. 석가는 세상의 진정한 모습이 고통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고통에 관한 진리, 즉 고제다. 석가의 설법은 고제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태어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이를 만나는 것도,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그림자는 빛으로부터 생기는 것과 같이, 괴로움이 있다면 즐거움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즐거움도 영원히 지속할 수 없다. 존재의 한계란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불타는 집과 같다. 우리는 불타는 집안에서 해맑게 뛰어다니는 아이처럼 자신의 현실에 갇혀산다. 그것은 익숙하고 편안한 현실이 편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은 불타는 집이고, 밖이야 말로 탁트인 곳이다. 부처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현혹되기 쉬워 믿을 수 없는 것들이니 그 속에 빠져있지 말고 벗어나라 했다. 인도의 한 수행자는 제자로 들어오는 자들에게 당신의 집을 모두 불태우라는 이야기를 했다. 말 그대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를 속박하는 사회의 선입견과 습관을 벗어나고 오라는 뜻이다. 하지만 부처는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 한다. 왜냐면 이미 불타는 집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보시할 필요 조차 없다. 일본 선사의 요시다 겐코는 적극적으로 돈을 벌라고 이야기 했다. 돈을 벌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으라 했다. 결국 돈이나 빈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만 마음만은 깨끗하라는 것이다.

불타는 집의 노인은 부처의 비유다. 노인은 세 가지 수레로 자식들을 유인한 것처럼 부처도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라는 교묘한 방법으로 중생들에게 불법을 깨우친다. 부처가 되는 방법은 세가지지만, 진정한 불법은 오직 하나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부처가 대승과 소승의 구분을 없애고 조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부처는 모든 사람이 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업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의 공통된 업까지 짊어져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한 존재의 해탈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다. 모든 차원에 대한 관찰과 관조는 모든 울타리를 부수고 개인의 생명을 우주까지 뻗어나가게 한다.

부처에게 불타는 집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이 크게 깨달았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깨달은 바를 ‘가난한 아들’ 이야기에 비유해서 부처에게 고한다. '가난한 아들'의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법화경, 가난한 아들의 비유


어려서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간 아들이 50년간 타향을 떠돌아다녔다. 생계를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근근이 살던 그가 어느 날 한 마을에서 어마어마한 부와 권위를 가진 남자와 마주친다. 어린 시절 떠난 아버지였다. 하지만 비루한 삶에 익숙해진 아들은 그가 아버지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오히려 무서워 도망간다.


사실 아들에게는 부유한 아버지와 커다란 집이 있었다. 그는 굳이 생계를 위해 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도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욕심 부리느라 정작 자신의 본 모습은 잊은 탓이다. 아버지는 고통스러웠지만 아들을 천천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 거름 치우는 일에 고용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입고 있던 화려한 옷을 벗고 허름하고 낡은 옷으로 갈아입은 뒤 아들과 함께 일했다. 아들은 그것이 부자 아버지인줄 모르고, 자신과 같은 천한 일꾼이라 생각하며 아버지로 인정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고 서로를 믿게 되면서, 아버지는 죽기 전에 자신이 사실 굉장한 부자임을 밝힌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


아버지는 부처고, 가난한 아들의 모습은 우리와 같다. 부자 아버지를 만나면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매달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야기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부유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적인 부유함이 아니다. 부처가 말한 보배와 부유함이란 불법과 깨달음의 지혜다. 되려 물질적인 부는 앞서 말한 이야기의 '집을 불태우는 불길'이며, 가난한 아들의 이야기에서는 '가난'과 '유랑'이다. 불타는 집과 가난한 떠돌이의 비유는 세상의 명리를 쫓는 생활이다. 부처는 세상의 명리에 정력을 쏟아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불타는 집을 나오고, 부유한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 세상의 밖에 존재하는 무한한 전체를 추구해야만 완전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시작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있고, 우리의 끝은 이 세상에서 죽은 후에 있다. 태어나기 전과 죽은 후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인생은 아주 짧다. 잠시 스쳐 가는 정거장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는 인생이 꿈처럼 덧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인생을 살며 진짜 나의 것도 아닌데 그토록 갖고 싶어 욕심내고 못 갖거나 잃었다고 성내느라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 모든 게 진짜 자신의 모습을 잃고 진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었기 때문이다.

해탈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아들의 집이 멀리있지 않았던 것처럼, 부처도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부처는 자신의 모든 제자에게 미래에 모두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부처는 모든 인간을 가볍게 보거나 업신 여기지 않았다. 그 모든 것에 부처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앙숙에게도 부처가 될 것이라 이야기 했다. 부처의 말에 따르자면 어떤 사람도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어떤 것이 될 수는 없지만, 부처가 될 수는 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부처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야말로 불교가 주는 가장 특별한 가르침이다.

<법화경>의 메시지는 뚜렷하다. 앞선 두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스쳐 지나가는 정거장과 같다고 이야기 했다. 우리는 떠도는 아들처럼 자신의 집을 잊은 채 불타는 정거장을 자신의 집이라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곳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집을 찾아 돌아가야 한다. 집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세상 전체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부처 이름과 나라 이름을 가질 수 있다. 부처가 되는 순간부터 세상은 우리를 흔들 수 없다. 이미 그 전체가 되었으니 스스로 이미 그 자신이다.

<법화경>에서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깨끗하게 하면 된다했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우리가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다. 이 여섯 가지 통로가 깨끗해지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어댈 수 없다. 눈이 깨끗하면 모든 비밀을 꿰뚫어 볼 수 있고, 귀가 깨끗하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코가 깨끗하면 모든 향기를 맡을 수 있고, 혀가 깨끗하면 감동적인 말을 할 수 있고, 몸이 깨끗하면 세계를 환히 비출 수 있고, 마음이 깨끗하면 행복의 비밀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비춘다면 세상과 자신을 어떻게 왜곡할 수 있겠는가. 법화경의 마지막 목차는 삶의 조언을 간단하게 이야기 한다. 내려놓으면 세상이 나의 일부가 된다. 마음이 아름다우면 몸도 아름다우며, 지금 당장 험담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깨달음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로지 남의 고통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라.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매 순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 흐드러지게 핀 연꽃처럼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마음껏 알려라.



페이융 지음

허유영 옮김

인문교양 / 276쪽 / 2도

142x210mm / 15,500원

2019.5.7 발행

ISBN 979-11-89279-50-9 (0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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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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