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금, 난민의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

'가버나움', 폭력에 담담한 아이의 눈빛
글 입력 2019.05.18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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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장 뜨거운 화두, '난민'


제주에 예멘 난민이 왔을 때를 기억한다. 약 1만 여명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이 취업을 목적으로 '가짜 난민' 행세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엄마에게 톡으로 날아온 이 황당한 가짜 뉴스도 잠시, 이슬람 종교를 가진 난민을 받으면 성범죄가 늘어날 것이라는 뉴스 또한 접하게 됐다. 뉴스는 꽤나 큰 파급력을 가졌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예멘 난민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법개정을 통해 막아달라는 글이 올라왔고, 난민에 대한 반대 여론이 급격하게 올라왔다. 팩트 체크 이전에 급격하게 혐오 감정이 떠오른 모습은, 한국 사회가 얼만큼 난민에 대해 사유할 기회가 없었는지를 보여줬다.

영화 '가버나움'은 바로 이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난민' 문제를 그려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저주받은 마을의 이름이다. 프랑스어로는 'capharnaüm'로 '혼돈'과 '기적'을 의미한다. 레바논 출신 감독은 모든 모험이 혼돈과 같다고 생각했으며, 그 속에 작은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혼란스러운 처지에서 작은 기적을 찾는 난민의 상태를 보여주는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흥미롭고도 소름끼치는 대목은, 주인공 자인 역이 실제 난민이라는 점이다. 저 영화 속 포스터의 아이는 레바논에서 8년을 산 시리아 난민이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서 12살인데도 자신의 이름을 쓰지 못했으며, 가버나움 개봉 당시 생전 영화관에 가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인 뿐만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 중에도 난민이 있다. 배우가 아님에도 캐스팅 한 이유는, '난민'이라는 특수한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조금은 폭력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들이 연기에 만족한 인터뷰를 보고 조금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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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힘겨움이 느껴지는 그의 눈빛, 그의 삶


첫 씬부터 강렬하다.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열두살 즈음의 자인은, 부모를 고발했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다는 자인은, 사실 살인죄로 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어린 나이에 그가 살해한 사람은, 자신의 여동생 사하르(11살 정도)과 결혼한 나이 많은 남성이다. 가난하고 예쁜 어린 여성은 타의로 쉽게 팔려간다. 사하르도 그랬다. 사하르는 결혼 후 2개월 만에 임신이 돼, 하혈을 하며 병원에 실려간다. 하지만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난민이라,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는다. 이에 분노한 자인이 나이 많은 남성을 살해한 것이다.

이제 자인이 왜 '부모'를 고발했는지 답이 나온다. 어린 자인에게 '어른'의 역할을 해야 하는 부모는 없었다. 아이를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는 자신의 보호자가 아니었다.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관념이 없는 곳, 기본적인 권리가 박탈된 곳에서 아동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 없다. 영화는 그 어른을 '부모'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 사회, 국가, 이 세계의 '어른'에게도 틀림없이 묻는다.

끝내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자인은 가출을 한다. 길거리로 내몰린 자인은 놀이공원 노동자 라힐에게 신세를 진다. 그 또한 불법체류자고 2살배기 아이 요나스를 기르고 있다. 라힐은 브로커가 요구하는 돈을 내지 못해 쫓겨나고, 자인은 생활고와 삶의 힘겨움을 이유로 요나스를 불법 입양 브로커에게 팔기까지 이른다.

자신의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자인이, 요나스를 지키고자 하였지만 끝내 힘겨운 선택을 한 것이다. 자인의 눈물은 어린 아이가 감당해야 할 고통의 이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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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속에서 피어나는 배제의 권력


김영하 작가는 부자의 '부(富:부유할 부)'를 나타내는 것은 '가난에 대한 무지'라고 했다. 자인의 엄마는 후반 즈음에 변호사를 향해, 당신은 이런 삶을 모른다고 한다. "상상해본 적도 없겠지"라는 말은 그를 자인의 부모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보이게 만든다. 가난으로 찌든 삶, 굶주림이 일상인 삶, 교육받지 못해 앞을 헤쳐나가지 못하는 삶, 서류가 없는 삶을 인정해야 하는 삶을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모르는 이유는 단지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운'이다.

무지는 풍문에 의존하는 태도를 부른다. 풍문은 가짜 뉴스를 만들고,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토론을 통한 '합의'는 사라지고 권력을 통해 배제하려 한다. 이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집단도 나타난다. 덴마크의 우파는 2015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최근 이민부 장관 잉에르 스토이베르는, 거주 용인 상태인 난민을 외딴 섬에 가두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무인도 린홀름섬은 동물 전염병 연구 실험실 및 사체 소각장으로 쓰이는 곳이다. 장관은 페이스북에 "그들(난민)은 덴마크에서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그런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며 "덴마크 사회가 원치 않는다면 (그들은) 일반 덴마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섬뜩하지 않은가. 마치 21세기형 나치를 보는 것 같은 느낌. 국가 내부의 통일성을 위해 '적'을 상정하고 정치적 세를 불리는 느낌이 든다. 여기엔 난민에 대한 권리를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도,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정책을 풀어나가려는 시도도 없다. 시리아 대리전에 참여하는 서구 국가들에 대한 지적도 없다. 메르켈과 같은 과감한 결단도, 중도적 타협도 없다. '적'과 '동지'의 구분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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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분명 영화 속 마지막 장면과, 뒤이어 나오는 자인의 근황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 안도감, 감사함, 행복감은 우리의 원초적인 감정이다. 이 원초적인 감정이 난민에 대해 사유하는 근육을 기를 것이라 믿는다. 근육이 현실적인 지점을 찾아주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모두 부단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버나움'은 그런 점에서 개인에게도, 전세계적으로 소중한 영화다.


[이다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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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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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십원
    • 글 잘 읽었습니다만 오류가 하나 보여서요. 자인은 동생의 전남편을 살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칼로 찔렀지만 죽지는 않았고 나중에 법정에서 휠체어 타고 진술하러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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