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취는, 빈집살이 (1) [사람]

방 빌려 사는 어느 20대의 집 이야기
글 입력 2019.05.17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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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 지 두 달 남짓이다. 주말마다 본집에 돌아가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내 여섯 평짜리 방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가득이다. 이 공간을 가리키기 위해 나는 ‘방’이라는 말을 고집한다. 이곳을 ‘집’이라 부르지 않기로, 아마 스무하루쯤 전에는 결정했던 것 같다. 매일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위를 뜯어보는, 피로한 토끼같은 사람에게 이 방은 전혀 좋지 못하다. 전처럼 천장 가까이에 생각을 마구 펼쳐놓고 어떤 것은 공기 중에 날아가도록, 어떤 것은 청사진이 스며나도록, 또 어떤 것은 네모접히도록 만져볼 수 없다.

 

밤이 되면 누군가 종일 손에 넣고 움켜쥐었기라도 한 마냥 충혈된 눈을 비빈 후, 솜이 조금은 부풀어오른 차렵 이불 밑에 긴장된 몸을 누인다. 이 새로운 은신처는 머리를 숨기기 퍽 괜찮은 동굴, 아주 크고 깊은 동굴이 되지 못했다. 몇 달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은회색 벽지 냄새는 몸의 모든 구멍들을 메워버렸다. 엊그제 설거지를 끝낸 정돈된 조리대를 볼 때마다 생명활동의 필연, 찌꺼기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몇 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문을 밀어 열 때, 두려움의 향은 벽지의 그것과 함께 두터운 잉크가 되었고, 이 조밀한 냄새 분자가 기록된 양피지 조각들은 견고한 기억의 집을 쌓았다. 나는 더 이상 내 집을 누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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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육십일 가량의 ‘혼자 살아보기’ 놀이가 남긴 기억은 이게 전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두 달간 관찰한 ‘나'에 대한 기억이다. 사실 내가 수년간 자라고 잠들어왔던 곳인 '집'에서 깨어, 처음으로 발끝을 문밖으로 향했을 때 한 발 늦은 나의 생각이 황급히 붙잡은 것은 집의 기둥과 서까래인, 가족들이었다. 자취를 시작한 후로부터, 걷자면 꽤 먼 곳에 있는 그들을 새삼스레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 초입의 기억이 생생할 때 그들에 대한 거친 기록을 남겨보고자 한다. 그들이 읽어주기를 바라기도, 바라지 않기도 하는 방백의 목소리로 말이다.




할머니와 음식



내 '방'의 음식들은 전부 그의 두터운 손바닥 안에서 태어났다. 마트에서 산 물건은 명함도 못 내밀 만큼 그의 음식은 내밀하고, 또 가지런하다. 자취생의 너절한 살림살이, 이를테면 그 근방에선 나름 큰 규모를 자랑하는 동네 슈퍼마켓이 제공한 식량들은 이 정성진 집반찬 앞에서 위화감을 자아낼 지경이었다. 정말로, 내가 봄 틀 무렵의 허기에 냉장고에 욱여넣은 포도 몇 송이와 요거트, 생수 두 통은 차고 신선했지만 지독히 비루해 보였다. 배를 채우기 위해 입에 넣어볼 수 있는 것들 중 9할은, 그의 집반찬과 함께라면 발갛게 열이 올라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의 음식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이 방 안 첫 식사의 첫 숟갈이 행해질 때였다. 나는 고작 여섯 평 바닥에서 덩치를 자랑하는 옹졸한 가구들 틈에 몸을 겨우 펴고 앉아, 기억 속에 켜켜이 쌓인 그의 상차림 몇 장을 흉내내보려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칼같은 가지런함과 투박한 속도, 정돈된 온전함을 베끼려 애썼다. 불행히도 이 초짜 살림꾼은 그와 달리 서툴렀고, 무능을 직감한 나는 서둘러 식탁 위에 가상의 횡렬을 그었다. 무경력 신입 자취생은 모든 집안일에 좌표가 필요했다. 충혈된 눈길이 잿빛 나무 상 위에 가로줄을 짓고 있었다. 그의 팔놀림, 그의 움직임새를 따라하려면 멀었다. 피로를 의식할 틈이 없었다. 그의 발치에 나의 조급함이 엉겨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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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 밥 하나를 데우고, 그가 챙겨준 반찬통 전부를 꺼내놓았다. 컵에 물을 따르고, 그 옆에 대열 맞춘 수저를 늘어뜨렸다. 이제 먹으면 된다. 부족한 내 딴에는 그다우려 노력했던, 미숙한 한상이었다. 맘먹고 정돈한 손가락으로 숟가락을 들어올렸다. 밥 한 숟갈이, 낮새 줄줄 새 나가던 몸속 물덩이를 도로 길쭉이 길어올렸다. 등에 닿아내리는 햇빛이 그다지 따스하지 못했다. 들기름과 된장 향 가득한 깻잎찜도, 어렸을 적부터 죽 나의 자랑이었던 김 부각도, 맛이 덜하다 했던 김치 조각도 모두 다 그의 것이었다. 서늘한 바닥과 피로한 어깨가 공허한 시간을 메꾸었다. 낮꿈에 총성이 흘러내렸다. 정서는 횃불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주말, 생기가 조금씩 꺼져갈 때쯤 본집에 갔더니 그는 나의 안부를 먹거리로 물었다. 그건 다시 ‘방’으로 돌아가, 벽시계에 꽤나 많은 시선이 꽂히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는 나의 대답을 결코 믿지 않는 그는 내가 그날, 혹은 그 주에 밥을 잘 챙겨먹었는지를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는 여러 번씩이나, 돈 아끼지 말고 든든히 챙겨먹으라며 현금 십 만원이 든 종이 봉투를 내게 급히 건넸다.


절대로 손틈에 나부끼지 못할 돈임을 알면서도 그는 사양과 감사, 찡그림, 또는 그 외 모든 감정들을 완강히 거부할 틈이었다. ‘배곯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은 그의 생이 놓지 못하는 것이라, 나는 그 돈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심장을 움켜쥔 이 믿음은 그의 밥을 먹고 자란 손주에게, 돌이킬 수 없어 아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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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양손에 짐을 무겁게 들고 며칠 돌아오지 않을 요량으로 처음 본집을 나섰을 때 그가 서둘러 해준 말은, 걱정 말고 밥 먹고 싶을 때엔 언제든지 돌아오라는 말이었다. 어느 화요일, 깜빡 놓고 온 것을 가지러 느즈막히 본집에 얼굴을 비췄을 때, 나는 너무 일찍 찾아온 부담스런 손님이었다. 그는 내가, 냉장고 속 까끌한 식재료들처럼 찬기에 널부러져 살 법하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온몸으로 깜짝 놀라서는 허겁지겁 부엌에 나와 가스레인지의 네 버튼을 돌렸다. 때를 맞추지 못한 나의 ‘깜짝 방문’은 그의 잠을 방해할 뿐이었다.


나의 귀가엔 이제 적시라는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평소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 가장 적절한 때에 집에 당도하는 인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이 눈치 없는 불청객은 그만 불쑥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내가 난데없이 그를 해하지 않을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걱정으로 분주한 그의 모습에 나는, 평일엔 절대로 본집에 찾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또 그는 나를 위해 깻잎찜을 다시 했을 터였다. 당장 내일 나간다니, 급한대로 반찬 그릇 맨 아래에서 끔찍하게 절여진 그해 마지막 깻잎 더미를 손녀에게 내어준 그는 분명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주에 집에 돌아온 내가 본 것은, 매끈매끈한 쑥개떡으로 보일 만큼 넉넉한 윤기를 입은 녹갈색 이파리 뭉치였다. 그가 만든 된장과 들기름의 향내는, 석유의 역함이 없어 피부에 잘 들러붙었다. 찜기의 매몰찬 수증기 공세에도 여전히 빳빳한 향이 남아있는 깻잎 수십 장. 한 장을 무리에서 덜어낼 때면 잔열의 고소함이 살갗에 익었다. 놓을 수 없는 이 애착의 냄새와 함께 그를 지우는 5등급짜리 싸구려 냉장고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언젠가 엄마가, 나의 부탁이 그에게는 기쁨이라고 말해주신 적이 있다. 그를 닮아 나의 짐을 남과 잘 나누지 못하는 성격인 내가, 그에게 한 끼를 부탁해야만 한다. 그에게 가장 걱정을 끼칠, ‘시장하다’는 말을 그 앞에서 꺼내야만 한다. 결국 나는 부채감을 미뤄두고 염치없이 그의 손을 빌려야 한다. 어쩌다 한 번, 창피함을 무릅쓰고 밥 축내는 어리광쟁이가 되면 그는 기뻐할 것이다. 이건 뭔가 불공평하다.



2편에서 계속.



[이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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