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들을 위하여 - 환희, 물집, 화상

연극 <환희, 물집, 화상>리뷰
글 입력 2019.05.10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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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강의+막장 코미디=?



사회 여러 분야에서 페미니즘이 활발하게 언급되는 시대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은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까지 공공연하게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엔 여러가지 위험 부담이 없지 않다.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하게 되는 이유는 안티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이 두려워서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페미니즘을 논하며 이런 말과 행동을 해도 되는지, 스스로를 검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듯 페미니즘은 뜨거운 감자이지만 잘못 이야기한다면 어느 쪽에서건 비난 받기 쉬운 주제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페미니즘 렉쳐 퍼포먼스'와 '코미디 막장극'을 동시에 표방하는 <환희, 물집, 화상>은 도대체 어떤 극인지 궁금했다. 강의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지루해지기 쉽고, 주제가 주제인 만큼 잘못하면 반발심을 사기 쉽다. 그렇다고 막장 코미디에만 집중한다면 굳이 페미니즘을 끌어올 이유가 없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요소를 어떻게 같이 다룰지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연극은 렉처 퍼포먼스로도, 막장 코미디극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극은 2세대 페미즘을 대표하는 베티 프리단, 대중문화와 페미니즘과의 관계 등 꽤 학문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인물들의 실감 나는 대화와 영상자료를 통해 어렵지 않게 관객에게 내용을 전달한다. 여기에 여성학 교수인 '캐서린', 캐서린의 친구이자 가정주부인 '그웬', 그웬의 남편이면서 케서린의 전 남자친구인 '던', 던과 그웬 부부의 베이비시터인 '에이버리', 그리고 케서린의 어머니 '앨리스' 까지 개성 있는 인물들과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극의 흥미를 더한다.

강의는 강의대로 진행되지만, 현실은 그렇게 물 흐르듯 잘 풀리지 않는다. 책 속에 가지런히 인쇄된 활자와는 영 다르게 흘러가는 네 여성의 이야기는 웃음과 공감을 자아낸다.



구원자vs훼방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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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더 많은 여성서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성서사 작품을 유난히 까다롭게 평가하곤 한다. 물론 여성서사라는 이유로 무조건 칭찬만 하는 건 옳지 않지만, 기존에 있던 수많은 남성서사 작품에는 유하면서 유독 여성서사 작품에 많은 것을 기대하는 모습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페미니스트라 밝힌 여성을 검열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페미니즘을 내세운 작품이나 페미니스트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현상은 페미니즘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이면에는 페미니즘이 단번에 우리 모두를 구원할 열쇠 또는 모두에게 들어맞는 정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환희, 물집, 화상>에서 볼 수 있듯 현실 속에서 페미니즘은 마법처럼 모두를 구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여성은 단일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극에 나오는 인물들을 결혼 여부에 따라 나누면 기혼 여성인 그웬과 앨리스, 비혼 여성인 캐서린과 에이버리로 분류된다. 세대를 기준으로 인물들을 나누면 노인인 앨리스, 기성세대인 케서린과 그웬, 20대 초반의 신세대 에이버리로 나눌 수 있다. 속한 집단이 다른 만큼 이들 각자에게 페미니즘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기혼 여성이자 가정주부인 그웬은 페미니즘이 왠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한편, 신세대인 에이버리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페미니즘의 기본 사상을 '이미 지나간 너무 오래된 것'이라 여기고, 반대로 가장 나이가 많은 앨리스는 오히려 페미니즘이 여성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감정과 생각 곳곳에는 모순이 자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무작정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들이 모두 페미니즘 문제의 당사자인 여성이므로 어떤 것도 함부로 틀리다 말할 수 없다고 믿는다.

페미니즘이 여성에게 건네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돼' 라는 말에서는 '그렇게 살면 안 돼.'라는 메시지 역시 읽어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그럭저럭 잘 흘러가는 중인 우리의 삶에 딴지를 거는 훼방꾼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페미니즘으로 더 시끄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질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은 책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전하고 논의된다. 연극은 각기 다른 네 여성을 통해 페미니즘 이전에 개인의 삶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언제까지 여성은 양자택일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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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을 방불케 하던 소동은 의외로 허무한 결말을 맞는다. 살아온 시간이 이미 몸에 켜켜이 쌓여 굳어버린 인물들이 갑자기 바뀐 역할에 적응하는 건 애초에 어려운 일이었다. 그웬은 던과 재결합하고 캐서린은 홀로 남겨지며, 에이버리의 남자친구는 돌아오지 않는다. 삶은 때로 지난하다.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는 힘들고, 당시에는 옳다고 믿었던 선택이 후회를 부르기도 한다.

여성은 특히 많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 아이를 낳는다면 일을 계속할 것인가,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할 것인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열망해 역할 바꾸기를 원했던 캐서린과 그웬은 결국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해야 했다. 둘은 모두 욕심 많고 성실한 여성이었지만 일과 가정 모두를 가지지는 못했다. 삶에 대한 의욕 없이 대마초를 피우고 포르노를 즐기는 던이 비교적 손쉽게 일과 가정 모두를 움켜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늘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여성의 모습은 공감이 되면서도 답답하다. 그래도 조금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는 건 극의 말미다. 마지막 수업 시간, 애이버리는 지난 수업에서 주로 독립적인 여성을 닥치는 대로 죽이며 성평등을 둘러싼 사회의 두려움을 보여준다고 배운 슬래셔 영화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오히려 슬래셔 영화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여성'이라는 인물형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친페미니즘적이라는 해석이다. 그 얘기를 들으며 막연하지만 앞으로 더 맣은 새로운 여성상이 탄생하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되었다.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 지금보다 선택에 자유로운 여성이 등장하는 날을 기다린다.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들이 바꾸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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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 참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들이구나"

홀로 남겨져 낙담한 캐서린과 에이버리에게 앨리스가 하는 말이다.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소질 있는 페미니스트도 있을까? 선천적이고 타고 났다는 의미가 있는 '소질'이라는 단어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페미니즘은 현재 주류인 남성중심 사회에 저항하는 운동 및 사상이므로, 사회의 부조리를 경험한 다음에야 그것을 바꿔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선천적인 페미니스트'는 없다. 우리는 모두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다. 사회관습을 내면화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 사회관습을 부정하는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 연극에서 뜻밖에 돋보이는 인물은 다름아닌 캐서린의 어머니, 앨리스다. 두 사람을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남자 때문에 풀 죽어 있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도, 마지막으로 건배를 하며 여성의 자유를 언급하는 것도 그다.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 가장 페미니즘적인 대사를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는 여성학 교수로 여성학을 가르치는 사람조차 현실에서 이론을 완벽하게 내면화할 수는 없으며 페미니즘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을 것 같던 사람이 오히려 페미니즘 전체를 관통하는 말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혼, 비혼, 기성세대, 신세대. 이 밖에도 여성 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는 기준은 많고 많지만 그게 훌륭한 페미니스트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완벽한 페미니스트' 되기란 완벽한 여성이 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불가능한 일인데 비난하기는 쉽다는 의미다. 세상에는 완벽한 페미니스트 대신 모두 다른 얼굴로 다르게 살아가는 수많은 '불완전한 페미니스트',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 들이 있다. 이들은 분명 세상을 바꾸고 있다.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저마다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거대한 흐름을 함께 이끌어가는 그들에게 힘을 얻는다. 앨리스와 캐서린, 에이버리가 건배를 하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나도 동참할 수 있다면 이렇게 외칠 것이다.


모든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들을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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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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