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Culture letter 02. 마지막 봄에는 울지 않기 [문화 전반]

봄의 마지막에는 울지 않기를. 그리고 다음 번 봄에도 울지 않기를.
글 입력 2019.05.0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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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이었다. 한창 우울 우울 열매를 먹어 세상을 세 배쯤 풍부하게 받아들일 때 블로그에 한 이웃이 찾아왔다. 엄청나게 유명하거나 빼어난 사진이나 문장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내 눈길을 끌었던 건 블로그의 제목이었다.
‘마지막 봄에는 울지 않기.’ 

이상하게 그 문장이 계속 머리에 남아있었다. 봄은 계절의 흐름과는 다르게 우울증을 앓는 이들에게 견디기 힘든 계절이다.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은 상처를 숨기게 해주지만, 봄의 따스한 햇빛은 그 상처를 훤히 드러내 보이기에 봄만큼 우울을 돋우는 계절도 없는 셈이다.

한창 바빠진 일상을 뒤로하고 내가 문득 이 문장을 다시 떠올린 건 빠르게 사그라져가는 봄의 마지막을 서서히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남쪽은 벌써 여름의 정취가 물씬 풍겨온다. 한낮엔 이글거리며 이지러지는 빛의 일렁임을 마주하고, 아침과 저녁에서야 다소 서늘하고 시원한 공기가 웃돈다. 벌써 초여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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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봄기운이 부풀어 오르던 시기에 나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느라, 나에게 붙어있던 그늘을 떨쳐내느라 바빴다. 야금야금 글을 읽고, 글을 쓰고, 그러면서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해나가며 조금씩 나를 다시 일구어나갔다. 덕분에 봄의 한창 때에 나는 그리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활자가 주는 감미로움을 읽어내지 못할 정도로 메마른 적도 있다. 그런 나를 붙잡아준 봄의 슬픔과 희망들이 있다. 오늘은 봄의 마지막을 보내며 봄빛이 스민 이야기들을 소개해 볼까 한다.



01. 여덟의 계절 _ 이여덟



가벼움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고
나를 다녀갔던 머뭇거림들이 
알려주었다.

그 말은 아직도 비틀거리고 있다.

 _ 시인의 말 _


이 주전쯤 대구의 한 독립서점에 들렀다. 누군가의 마음을 담은 글들이 여기 저기 성기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용을 읽지 않고 책을 사는 모험은 늘 설렘을 동반한다. 실패하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가끔 아주 보물 같은 책들이 내 책장에 들어오기도 하기에. 여덟의 계절. 책을 고른 이유는 다분히 책의 제목 탓이었다. 사계절이 아닌 여덟의 계절, 계절을 그리 깊게 느끼는 사람이라면 분명 풍부한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여덟의 계절은 계절이 8개가 아니라 작가의 계절이라는 뜻이었지만, 뭐 어떤가. 이 작가가 풍부한 사람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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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표지가 두 개다. 하얀 색과 검은 색. 비틀어진 대칭처럼 이들은 방향도 색도 다른데 뒤에서 읽으면 사진집이, 앞에서 읽으면 시집이 된다. 삐뚤어지고 모났어도 시선을 돌리면 다른 가치가 있는 것처럼 두 표지는 완벽한 반대의 대칭을 이루며 공존한다. 이 작가의 시는 섬세하게 짜인 언어의 틈을 파고든다. 전체적인 감정은 한창 우울에 빠졌을 때 느꼈던 행복감을 다시 느끼게 했다.

이전의 나라면 공감하지 못했을 슬픔으로 짜인 편안한 감정들을 묵묵히 드러낸다. 먹먹함과 아릿함이 교차하며 만들어 내는 감정의 변주곡은 순응의 미학을 보여준다. 감정을 수용하고 흘려 보내는 일, 그를 통해 커지는 마음 크기를 실감한다. 슬픔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건 결국 슬픔을 한껏 느낀 이후이기 때문이다.

이여덟의 시는 슬픔을 통해 슬픔을 떠나 보낸다. 봄 볕 아래 제 몸을 한껏 풀어 헤친 슬픔은 이제는 충분하다는 듯 아련한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진다. 시를 읽고 난 후 끝에 남는 먹먹함은 결국 한 때 자신이 거기 있었다는 슬픔의 가녀린 흔적인 셈이다.



그곳은 시월이 해의 마지막 달이었고
바람 소리조차 멎고 있었다. 
한번씩 
거긴 어떠냐는 편지가 오면 
늘 괜찮다고 
답해주었다. 

시월에_ (34)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 고양이는 
찰리 말고는 없었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찰리는

믿고 싶었다

찰리_(39)




02. 사라지는, 살아지는 _ 안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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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다.
살아진다.

어쩌면 이런 시간에,
함께 울기 좋은 이런 계절에.


여덟의 계절과 함께 데려온 『안리타 단상집 사라지는, 살아지는』. 봄날의 슬픔과 찬란함을 동시에 노래한다. 처연하고 찬연하다. 시보다는 조금 더 부드럽게, 밝게 읽힌다. 흐드러진 꽃나무 아래 흩날리던 벚꽃이 사뿐이 내려앉는 모습을 본다면 이러할 것이다. 새벽녘의 고요함, 밝아오는 아침의 신선함, 지저귀는 새소리, 살랑이는 봄바람, 청아한 풍경소리. 달큰한 아카시아 향기. 시간과 시간 사이의 어딘가, 그 속을 걷는 나.

짤막한 단상들은 우울과 행복의 경계를 넘나든다. 처연과 찬연. 같은 단어에 모음을 한번 뒤집고 받침을 하나 넣었을 뿐인데 감정을 널을 뛰듯 달라진다. 봄이란 그런 계절이 아닐까 한다. 책의 제목도 그러하다. 리을을 어디에 넣느냐일 뿐인 차이가 커다란 차이를 낳는다. 사람의 감정도 이와 같다. 자음 하나, 모음 하나, 선 한 획처럼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위로한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듯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다. 따뜻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은 살아있는 이 느낌을 오래 만끽했다.
나를 사랑하는 시간을 살려고.
오로지 내 삶을 살아내려고. 

(76)
-

자연의 운율은 아름답다. 
나도 저들처럼 당당한 능력을, 뚜렷한 발음을 갖고 싶었다. 

(86)

-
떨어지는 꽃들을 슬퍼할 것.
실컷 슬퍼하고 실컷 그리워할 것. 
그리고 나서 다음 계절로 굳건히 나아갈 것. 

(90)




03.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들.



박봄 _ Spring



정은지_ 하늘 바라기


마지막 봄에는 울지 않기. 나에게 이 문장을 알려준 그 블로그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이 문장의 주인은 과연 올 봄에 울지 않았을까?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이를 알 순 없지만, 그 문장을 이어받아 새롭게 적는다. 봄의 마지막에는 울지 않기를. 그리고 다음 번 봄에도 울지 않기를.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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