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0분내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다면. [영화]

글 입력 2019.04.25 23:5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시험 공부를 하다 머리도 식힐 겸, 내가 좋아하는 단편 영화 목록을 찾아보다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했다. 여자 주인공이 인중에 면도칼을 갖다 댄 장면과 함께 제목 ‘면도’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KakaoTalk_20190425_225759832.jpg
 

영화는 세 명의 남자 회사원들 무리와 한 여자 직원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무리 중 한 남자 직원이 이 영화의 주인공인 민희에게 다짜고짜 얼굴부터 들이민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이 직원은 주인공의 얼굴을 여기저기 살피더니 그제서야 사정을 설명한다. 어제 자기가 소개팅을 했는데 소개팅에서 만났던 여자의 인중이 거뭇거뭇해서 웃겼다 더라는 식의 이유였다.



KakaoTalk_20190425_225759645.jpg


그게 주인공인 민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사실 소개팅 자리에 나온 여자의 인중이 거뭇했던 사실이 왜 웃긴 것인지도 이해가 안되었지만. 일단 그는 화면 밖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당황스러운 표정의 민희는 집에서도 거울을 보다 자신의 인중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 말이 아무래도 영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초반부터 심기가 불편해지면서 영화에 몰입이 잘 되었다. 아무래도 단편영화의 매력과 묘미는 이렇게 초반부터 몰입을 할 수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나는 계속해서 민희의 표정을 중시했다. 와중에 전 남자친구였던 사람에게 연락이 오고 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그리고 낮에 남자 직원이 건넸던 말을 떨쳐버리지 못한 민희는 면도칼을 집어 들고 결국 인중에 갖다 댄다. 와중에 면도칼에 베인 민희는 인중에 상처를 남긴 채 약속 자리에 나가게 된다.


약속자리에서 만난 전 남자친구는 안 본새에 더 예뻐졌다, 민희 너는 예전에도 지금도 참 착하며 예전의 자신은 그걸 몰랐다는 식의 목적이 뻔히 보이는 말을 늘어 놓는다. 마치 인형을 가지고 놀 듯 마음대로 손이나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인중에 상처가 나도 넌 참 예뻐, 라고 전 남자친구 본인생각에만 칭찬인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직접 겪는 민희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움과 함께 곤란함, 무언가 답답함이 느껴지는 감정이 여러 차례 겹쳐졌다.


결국 전 남자친구의 손을 뿌리치며 ‘착했던’ 민희는 소리친다. 당신과 아무 사이 아니고 너와 잘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그렇게 속 시원히 외친다. 마치 전 남자친구가 염불외우듯 말하던 ‘착하다’를 민희가 몸부림치며 부정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외친 민희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인가에서 해방된 표정이었다. ‘해방’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민희는 그 해방감을 어디서부터 느꼈을까? 영화 속에서 나온 ‘인중’사건, 단순히 그 한 사건만으로 절대 그런 표정이 나왔을 리 없다. 민희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인중이 거뭇거뭇한 ‘여자’였다는 이유만으로 뒤에서 조롱 당하는 것을 보았고, 자신 또한 그 말에 신경을 쓰며 스스로의 인중까지 살폈다.


영화 속에서는 ‘인중’과 관련된 사건이었지만 마치 현실 속 친구들과 내가 ‘여자’이기에 겪는 모든 것이 10분 동안 계속 다뤄지는 그 ‘인중’과 관련된 민희의 이야기에 함축되어 있었다. 당황스럽고 곤란하지만 애써 웃으며 참는 민희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평생을 외모적인 –그리고 행동과 태도 모든 것들을 포함한 자기검열들과 관련해서- 강박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사회가 여성의 모든 행동과 생각에 있어서 자기 검열하도록 강박을 심어주는 방법은 아주 교묘하고 다양하며 알아차릴 수 없는 곳까지 스며들어있다.


마치 영화 속 민희의 남자 동료들이 웃으면서 인중을 살피던 것처럼 혹은 민희 너는 뭘 해도 예쁘고 착하다며 이야기하던 전 남자친구처럼. 부당하다고 화를 버럭 내기엔 뭔가 애매하고 내가 나쁜 것만 같고, 웃어넘겨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상황들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차고 넘친다.



KakaoTalk_20190425_225759411.jpg
 


가만히 있고 하라는 대로 하니 착하고 예쁘네 하며 칭찬하는 것은 성장과 자신감을 북돋는 ‘칭찬’이 아니라 일종의 ‘세뇌’이다. 그 말에 대응하여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빠져야 한다. 그래서 나빠지기로 결심한 민희는 원하는 말을 외쳤고, 해방감을 느꼈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민희는 더 이상 애써 웃음짓는 표정을 짓지도 않고 원하지 않는 명령을 들었을 땐 우물쭈물하거나 애써 대답하지 않는다. 결말까지 완벽했다.


10분 가량의 단편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는 것에서 이 영화를 친구들에게 추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험기간인 와중에 알차게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생각이 들어 또한 신났다. 알고 보니 이 영화 ‘면도’는 제 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아시아단편경쟁부분에 올랐던 ‘정지혜’ 감독님의 작품이었다.


서울 국제 여성 영화제의 후보에 올랐던 것이 바로 납득이 갈 만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무력화시키는 것들이 약 10분가량의 영화 ‘면도’ 속에 은유적이며 동시에 직접적으로 녹아있다.


영화를 보는 시간은 10분가량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정말 귀하고 알찬 10분이었다. 다른 의미로 카타르시스를 강력하게 느낄 수 있었던 좋은 영화였다.



[이아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