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0분내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다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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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공부를 하다 머리도 식힐 겸, 내가 좋아하는 단편 영화 목록을 찾아보다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했다. 여자 주인공이 인중에 면도칼을 갖다 댄 장면과 함께 제목 ‘면도’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영화는 세 명의 남자 회사원들 무리와 한 여자 직원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무리 중 한 남자 직원이 이 영화의 주인공인 민희에게 다짜고짜 얼굴부터 들이민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이 직원은 주인공의 얼굴을 여기저기 살피더니 그제서야 사정을 설명한다. 어제 자기가 소개팅을 했는데 소개팅에서 만났던 여자의 인중이 거뭇거뭇해서 웃겼다 더라는 식의 이유였다.
그게 주인공인 민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사실 소개팅 자리에 나온 여자의 인중이 거뭇했던 사실이 왜 웃긴 것인지도 이해가 안되었지만. 일단 그는 화면 밖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당황스러운 표정의 민희는 집에서도 거울을 보다 자신의 인중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 말이 아무래도 영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초반부터 심기가 불편해지면서 영화에 몰입이 잘 되었다. 아무래도 단편영화의 매력과 묘미는 이렇게 초반부터 몰입을 할 수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나는 계속해서 민희의 표정을 중시했다. 와중에 전 남자친구였던 사람에게 연락이 오고 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그리고 낮에 남자 직원이 건넸던 말을 떨쳐버리지 못한 민희는 면도칼을 집어 들고 결국 인중에 갖다 댄다. 와중에 면도칼에 베인 민희는 인중에 상처를 남긴 채 약속 자리에 나가게 된다.
약속자리에서 만난 전 남자친구는 안 본새에 더 예뻐졌다, 민희 너는 예전에도 지금도 참 착하며 예전의 자신은 그걸 몰랐다는 식의 목적이 뻔히 보이는 말을 늘어 놓는다. 마치 인형을 가지고 놀 듯 마음대로 손이나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인중에 상처가 나도 넌 참 예뻐, 라고 전 남자친구 본인생각에만 칭찬인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직접 겪는 민희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움과 함께 곤란함, 무언가 답답함이 느껴지는 감정이 여러 차례 겹쳐졌다.
결국 전 남자친구의 손을 뿌리치며 ‘착했던’ 민희는 소리친다. 당신과 아무 사이 아니고 너와 잘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그렇게 속 시원히 외친다. 마치 전 남자친구가 염불외우듯 말하던 ‘착하다’를 민희가 몸부림치며 부정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외친 민희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인가에서 해방된 표정이었다. ‘해방’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민희는 그 해방감을 어디서부터 느꼈을까? 영화 속에서 나온 ‘인중’사건, 단순히 그 한 사건만으로 절대 그런 표정이 나왔을 리 없다. 민희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인중이 거뭇거뭇한 ‘여자’였다는 이유만으로 뒤에서 조롱 당하는 것을 보았고, 자신 또한 그 말에 신경을 쓰며 스스로의 인중까지 살폈다.
영화 속에서는 ‘인중’과 관련된 사건이었지만 마치 현실 속 친구들과 내가 ‘여자’이기에 겪는 모든 것이 10분 동안 계속 다뤄지는 그 ‘인중’과 관련된 민희의 이야기에 함축되어 있었다. 당황스럽고 곤란하지만 애써 웃으며 참는 민희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평생을 외모적인 –그리고 행동과 태도 모든 것들을 포함한 자기검열들과 관련해서- 강박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사회가 여성의 모든 행동과 생각에 있어서 자기 검열하도록 강박을 심어주는 방법은 아주 교묘하고 다양하며 알아차릴 수 없는 곳까지 스며들어있다.
마치 영화 속 민희의 남자 동료들이 웃으면서 인중을 살피던 것처럼 혹은 민희 너는 뭘 해도 예쁘고 착하다며 이야기하던 전 남자친구처럼. 부당하다고 화를 버럭 내기엔 뭔가 애매하고 내가 나쁜 것만 같고, 웃어넘겨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상황들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차고 넘친다.
가만히 있고 하라는 대로 하니 착하고 예쁘네 하며 칭찬하는 것은 성장과 자신감을 북돋는 ‘칭찬’이 아니라 일종의 ‘세뇌’이다. 그 말에 대응하여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빠져야 한다. 그래서 나빠지기로 결심한 민희는 원하는 말을 외쳤고, 해방감을 느꼈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민희는 더 이상 애써 웃음짓는 표정을 짓지도 않고 원하지 않는 명령을 들었을 땐 우물쭈물하거나 애써 대답하지 않는다. 결말까지 완벽했다.
10분 가량의 단편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는 것에서 이 영화를 친구들에게 추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험기간인 와중에 알차게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생각이 들어 또한 신났다. 알고 보니 이 영화 ‘면도’는 제 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아시아단편경쟁부분에 올랐던 ‘정지혜’ 감독님의 작품이었다.
서울 국제 여성 영화제의 후보에 올랐던 것이 바로 납득이 갈 만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무력화시키는 것들이 약 10분가량의 영화 ‘면도’ 속에 은유적이며 동시에 직접적으로 녹아있다.
영화를 보는 시간은 10분가량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정말 귀하고 알찬 10분이었다. 다른 의미로 카타르시스를 강력하게 느낄 수 있었던 좋은 영화였다.
[이아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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