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괴감에 죽어가는 대학생을 위한 변명 지침서 – 미루기의 천재들 [도서]

글 입력 2019.04.21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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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만개하고 다시 지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 시험 기간이 되었다. 벚꽃의 꽃말인 중간 고사가 코앞에 다가온 지금, 개강 날의 ‘미루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기’ 다짐을 여태 소중히 간직해 온 대학생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있기야 하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 학생이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미루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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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산텔라의 <미루기의 천재들>은 미루기에 대해 쓰기 위해 미루고 또 미룬 작가의 고백과 변명과 분석이 담긴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사놓고 줄곧 읽는 것을 미루다가 시험 기간이 되어서야 완독을 했다. 과제와 시험 공부를 최후의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서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잠시 누워 안정을 되찾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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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일을 미루는 사람들이 대개 저지르는 실수를 저지른 바 있으니, 주변의 친구들에게 책을 쓰겠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친구들은 나를 지지해줬다. 빨리 그 책을 읽고 싶어서 못 견딜 정도라고도 했다. 친구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최악의 저주였다.


p.22



내가 가장 공감하며 읽었던 부분은 책의 초반부이다. 작가는 자신이 미루기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했던 각종 행동들을 소개한다. 책에 대한 열정이 커질수록 글을 쓸 수 없었던 작가는 책을 쓸 수도 있었던 시간에 LP판을 알파벳 순서로 정리하고, 누군가의 개가 숟가락을 보고 짖어대는 유튜브 영상을 보고, 심지어 스포츠 라디오 방송에 귀 기울여 들었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은 일을 미루는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며 기뻐한다. 다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미루기 기술을 빨리 말해주고 싶어서 안달이다.


p.23



한동안 이 책을 늘 침대 머리맡에 두고 읽던 나에게 친구들은 ‘너랑 정말 잘 어울리는 책’이라고 했다. 말마따나 나는 늘 입에 “과제 해야하는데…” 혹은 “오늘은 진짜 공부해야 하는데…”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일단 누워서 할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럴 때 나는 겉으로 보기엔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미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머리엔 온통 과제와 마감 생각 뿐이다. 마치 ‘과제 해야 해’라고 적힌 쪽지가 들어 있는 포춘쿠키들에 온통 파묻혀 있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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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할 일을 미루는 동안 머리 속에서는 자기혐오와 자기합리화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일을 미루는 죄악을 고백하며 기뻐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말이다. 이 책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다가올 때까지 미루는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조용한 목소리로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속삭인다.


찰스 다윈도 세상을 뒤집어 놓을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에 앞서 따개비를 한참 들여다 보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자신만만하게 약속했다가 낙심하고 미루기를 반복하는’ 작업 방식에 충실했다. 심지어 리히텐베르크는 해야 할 연구를 제쳐놓고 실험실 장비를 정리하다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 될 원리를 발견했다.


물론 나는 다윈도 다빈치도 리히텐베르크도 아니기 때문에 미루는 동안 대단한 발자취를 남길 수는 없다. 하지만 위대한 사람도 피해갈 수 없었던 미루는 습관을 두고 끝 없는 자기혐오의 늪으로 빠져서 모든 의욕을 상실할 필요도 없다.



하나도 후회하지 않길 바라는 게 더 황당한 일 아닌가? 당연히 나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미 후회 머신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분히 체계적이고 이성적으로 살아간다면 100퍼센트 만족스러운 상태로 죽을 수 있다고 믿는가? 나는 결코 스스로 원하는 만큼 완벽할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원하는 만큼 끝내주게 멋질 수도 없을 것이다. 나에겐 둘 다 필요하다. 해야 하는 일에서 도망가는 것도, 흠잡을 데 없는 착실함도. 후회도, 실천도.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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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닥친 수많은 D-Day에 이성을 잃은 나를 대신해 변명해줄 책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든든한 일이다. 미루는 습관에 대해 이해하는 것 또한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는 부담감을 덜어준다. 결과적으로 글쓰기를 미루면서 <미루기의 천재들>을 읽은 내가 또다시 미루기에 관한 글을 쓰며 시험 공부를 미루는 ‘미루기 인셉션’에 빠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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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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