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스크린 너머 전해 들은 그날의 이야기 - 겨울의 눈빛 [공연]

어떤 연극은 관람이 아니라 듣게 된다
글 입력 2019.04.1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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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는 관람이 아니라 체험된다.”

 

연극 <겨울의 눈빛>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 ‘그래비티’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이었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어떤 연극은 관람이 아니라 듣게 된다.



[혜화동1번지]2019세월호 포스터_웹용.jpg



‘2019 세월호 [제자리]’는 연극인들의 모임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7기 동인 및 세월호 유가족 극단이 함께 구성한 7개의 연극을 공연하는 프로젝트이다. 잣 프로젝트의 <겨울의 눈빛>이 바로 그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연극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느낌은 ‘당혹감’이었다. 공연장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당혹스러웠다. 배우의 안내를 받고 들어간 그곳엔 무대, 그리고 그 무대와 분리되는 관객석 대신 군데군데 보이는 의자들만이 있었다. 나는 어색한 양반다리를 하고 공연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두리번거리며 배우들이 어디에서 공연할지 추측했다. 그러다 내 눈에 어떤 스크린이 포착되자 저 스크린이 걷히면 배우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배우들은 이런 나의 예측과 달리 관객들 사이 구석구석 자리를 잡고 대본을 펼쳤다. 한 배우는 바로 내 옆에 앉기도 했다. 공연장 구석구석에서 대본을 읽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처 당혹감을 수습하지 못한 사이 연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떠한 동작도 없이 오로지 대본을 읽는 주인공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여야 하는 연극의 형식은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형식이어서 피로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배우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다. 배우들이 격한 감정 연기로 세월호 참사가 남긴 슬픔을 재현해주길 바랐다. 어서 나의 이목을 끌 시각적인 무언가가 나타나주길 기다렸다. ‘연극은 그래야 하잖아.’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배우들은 그런 나의 조바심을 비웃듯이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대본을 읽어나갔다.


그렇게 이 지루한 도입부가 언제 끝날지를 기다리고 있던 순간, 배우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옳지, 이제 진짜 연극이 시작되는구나! 그러나 나의 환희는 금세 거품처럼 가라앉았다. 배우들이 자리만 바꾸고 다시 대본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그제야 이 연극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겨울의 눈빛>은 가상의 사고인 고리 발전소 사고를 소재로 삼고 있다. 연극은 그 사고로부터 3년 뒤 주인공 ‘나’가 고리로부터 70km 떨어진 K시의 극장에서 그 사고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내용이다. 이야기 속 다큐멘터리는 영화감독이 태어나 사고 며칠 후까지 지냈던 해운대가 주된 배경이다.

 


(고리와 부산 시내의 거리는 약 30킬로미터)


(핵발전소 사고에서 주요 위험지역이면서 가장 먼저 주민 대피의 대상이 되는 지역은 반경 30킬로미터이다)



시끄러웠던 그곳, 자갈치 시장이 있고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고 단체로 모래밭을 걷는 어린아이들이 있던 그곳,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그곳. 감독은 해운대에서 살다 발전소 사고 후 강아지 ‘모자’와 함께 친구네 집으로 대피한다. 다큐멘터리는 그때의 기억, 그리고 사고 이후 해운대를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연극이 진행되면서 어느새 내가 혜화에서 연극을 보는 것이 아니라 K시의 극장에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 시작했다. 공연장엔 고리 사고 현장도, 울고 있는 유가족도 없었다. 그 대신 배우들의 목소리와 공허하게 글자와 영상을 보여주는 스크린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그날의 이야기가 멀게 느껴졌다.


내 마음도 주인공과 같이 고리로부터 70km 떨어진 K시에 있었다. 고리 발전소 사고 역시 나에게도 주인공처럼 스크린 너머의 세상 같았다. 그러다 배우가 내뱉은 어떤 대사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연극을 보는 내 모습이 여태까지 세월호 참사를 대했던 지난날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K시에 있다. 그렇지? 고리가 아닌 K시에 있지. 그러므로 우리는 괜찮으며 괜찮겠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세월호 참사가 대한민국을 국가적 애도의 바다로 빠트렸을 때, 나 역시 매우 슬펐고 괴로웠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일로 이렇게 감정적으로 동요하게 된 건 세월호 참사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슬픔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4월이 지나자 나는 대입에 집중했고 시간이 더 흐르자 세월호 광장을 지나도, 세월호를 다룬 예술작품을 접해도 내 마음은 평온했다. 당연한 것이었다. 세월호는 ‘남일’이었으니까. 2014년 4월 16일에 나는 그 바다가 아니라 안전한 학교에 있었으니까. 그곳에 내가 아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나와 완전히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내가 아는 누가 또 누구누구가 지금 무얼 하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토록 모멸감이 드는 이유는 무어야."



내가 직접 겪지 않았다는 이유로 눈앞에 피해자들을 외면했을 때 찾아오는 그 감정을 연극은 모멸감이라고 말했다. 스크린 너머 전해들은 것에 불과한 그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현실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애써 망각해왔던 나에게 나보다 더 큰 모멸감이 찾아왔다.


연극을 보고 동명의 원작소설을 찾아 읽었다. 소설을 읽고 연극이 원작을 거의 그대로 재현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창작과 비평 2013년 여름호에 실린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내 예상과 달리 고리 발전소 사고는 세월호 참사를 빗대어서 만든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은 내게 내가 모멸감을 느꼈어야 할 일들이 과연 세월호뿐이냐고 질문하는 것 같았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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