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음 속 어둠에 대한 고뇌 [기타]

글 입력 2019.04.1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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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랩퍼가 꺼낸 고백의 말이 나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여러 매체의 방송과 트렌디한 작품들로 이름을 꽤나 알린, 소위 잘 나가는 랩퍼였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지쳤다. 음악을 그만하고 싶다. 이제 그만해도 괜찮겠지란 생각이 든다. 이쯤이면 사람들이 내 이름 세 글자는 잊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놓아줄 차례인 것 같다.


많이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고백의 말보다 그의 표정이 너무도 피곤해 보여서. 정말 지친 얼굴이 보여서 그게 더 놀랐다. 어떤 고민과 어떤 시간을 지내왔는지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모습이 안타깝고 아파 보여서, 크게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좀 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같은 사람으로서 일종의 가여움을 느꼈다. 이렇게 표현한다면 그 사람의 기분이 나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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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언가를 계속해서 창작하는 사람들은 남들에게 쉽게 말하지 못할 어둠이 있을 것이다. 그 어둠을 직면으로 마주하고 그것 또한 작품으로 소화해내는가, 아니면 계속해서 외면한 채 더 깊은 바닷속으로 잠식되는가, 그것의 문제인 것 같다.


나는 사실 정말 괴롭게도 후자다. 난 앞서 말한 랩퍼처럼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한 사람도 아니고 이렇다 할 무언가를 만들어낸 사람도 아니지만, 글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남들에게 쉽게 말하지 못할 동굴 속 어둠과 매번 함께 한다. 그 동굴 속에서 만족할만한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날이면 나는 빛을 보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계속해서 동굴 안에 갇혀있을 수 밖에. 동굴에서 꺼내달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 나는. 그 동굴은 곧 나이고, 그 동굴을 제 발로 들어간 것 또한 나이다.


예전에는 그 동굴을 좋아했던 것 같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눈에 띄는 주위의 아늑함을 즐겼달까. 좋아했다기 보다는,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쪽이 더 맞다. 내가 나를 조절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이 어둠 속 동굴 또한 작품이 되겠지. 라는 일종의 작은 자만?


지금은 아니다. 이 동굴이 너무 무섭다. 어둡고 침침하다. 가장 두려운 것은, 나갈 길을 모르겠다. 아니, 이 동굴을 나가서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과연 동굴 밖을 나서서도 빛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그 빛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갈 길은 있을까? 이런 정답 없는 문제들이 계속해서 나를 동굴로 밀어 넣는다. 담담히 마주할 용기가 전혀 없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마음을 해소하기가 어렵다. 누군가에게 말하면 그 사람에게 이 기운이 전해질까 봐. 그 사람은 동굴이 없는 사람이라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 아마 나는 나를 이해시킬 용기조차 지니지 못한 채 밝은 바깥으로 나갈 방법을 찾고 있었나 보다. 예전에는 스스로와의 대화가 용기가 되었는데, 지금은 나약한 자신을 확인하는 방법 101가지 제목의 영화를 찍을 수 있을 정도랄까.


심드렁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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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기분이 지속되고 있는 원인을 알고는 있는데, 그것이 아무리 외부의 것이라고 한들,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담아내고 있는 내 자신 또한 문제가 많다. 그래서 나는 계속 여기에 맴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렇지만 알고 있다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 정말 솔직히 말해서,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이 나를 괴롭게 한다. 일종의 몽상가처럼 살아왔던 나에게 누군가가 너무도 현실적인 장애물을 앞길에 뿌려주고 갔다. 뿌려주었다기보다는 내 눈앞에 갖다 놓았다, 정말 친절하게도. 사실은 무례했지. 그 무례함에 상처 입었다기에는 그 아픔의 기간이 꽤나 길어서, 왜 그런지 찬찬히 생각해보았는데.


누군가가 던져놓은 무례함은 무시할 수 있다. 그 사람이 틀렸음을 내가 인정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는 게 문제다. 물론 인생에 정답은 없지. 그렇지만 정답은 없기에, 나의 몽상을 깨버린 그 사람의 당당함이 더 정답자처럼 보인달까. 물론 정답은 없지.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렇지만, 그 당당함에 내가 잠식된 것 같다. 때론 누군가의 말이 파도처럼 나를 덮쳐올 때가 있다. 반항 없이 맞아야지, 그럴 때는 그냥. 아, 그 파도가 사랑과 위로와 존중의 말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서핑하듯 파도를 탈 수 있었을텐데.


서핑은 커녕 그냥 가라앉아버렸네. 끝도 모르는 검은 심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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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안다. 이런 끝 없는 심해에도, 언젠가는 빛이 들어올거라는 사실을. 그것은 대개 생각지도 못한 외부의 행운으로 인해 나의 고민이 해결되는 순간이다. 예상치 못한 외부의 무언가로 인해 맞는 나의 감정 변화이다. 다시 눈을 번쩍 뜨면 이곳은 용궁이다. 맑게 숨을 쉴 수 있는 행복한 환경이 찾아온다.


그러니 나의 불만은 이거다. 나는 왜 그렇게 외부 환경에 잘 휩쓸리는 거냐고. 언젠가 나아질 거는 아는데, 그렇다면 왜 그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스스로 좀먹음을 멈추지 않는 거냐고.


나는 고민이 해결되는 순간에 언제나 수동적인 입장이었고, 동굴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기쁨에 젖어 나의 지난 좀먹음은 단숨에 잊어버렸고, 다시 바깥세상을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찾아오지. 흑과 백의 반복.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항상 '운 좋은 사람'이라고 칭했다.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 운, 내가 굶지 않고 좋아하는 마카롱을 사 먹을 돈이 있다는 것도 운, 오늘 비가 내리는데 집에만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운. 운, 운. 누군가는 운명이라고 칭할 그것은 나에게 모두 운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일종의 운 좋은 사건이고, 이 어두컴컴한 글이 내 일기장에만 적히지 않고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읽힐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운이다. 아, 그것은 정말 운이다. 행운이다. 항상 감사하다.


그리고 질문. 나는 언제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까?


모르지. 그리고 의미도 없지, 뭐. 맘에 들게 되면 내 앞길이 꽃길로 바뀔까? 전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시밭길로 바뀌겠지. 왜냐면 그때쯤이면 또 자학에 빠질 테니까.


나의 부족함은 너무도 크게 보이는데, 나의 노력과 능력은 항상 운으로 비쳐지니까, 그렇게 내가 바라보니까. 인생이 고독할 수 밖에. 나는 나를 진심으로 칭찬한 적이 많이 없다. 행운을 가져다 준 누군가에게 감사했을 뿐이다. 99프로를 내가 만들어놨어도, 1프로의 운이 없다면 100이 될 수 없는 거니까. 항상 행복의 마지막은 1을 건네준 누군가를 향한 감사의 마음이었다.


사실 중요한 건 99의 내 자신이었을텐데. 100을 채우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행복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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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과 행복을 말하면 항상 그것이 떠오른다. 세잎클로버와 네잎클로버. 사람들은 세잎클로버에 둘러싸인 채 네잎클로버만을 찾는다. 야, 네잎클로버 찾아봐. 여기 있어! 우와. 네잎클로버다. 오늘 운 좋겠다!


그 상황을 보면 재밌다. 우리의 인생을 정확히 보여준다. 주변의 행복을 무시한 채 그것을 짖밟으며 행운만을 찾는 모습들. 사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 곁의 크고 작은 행복들인데. 사람들은 그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지. 눈길조차 주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일상 속 행복을 알아차리는 게 가장 제일 어렵다.


그래서 나는 네잎클로버보다 세잎클로버를 더 좋아한다. 보다 눈길을 주고 싶다. 사람들은 모두 행운을 간직한 네잎클로버만을 찾으니까. 나라도 세잎클로버에 눈길을 주고 싶은 마음. 행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잎클로버에 눈길을 주면, 일상 속 크고 작은 행복들에 젖어 그것들과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자학에 빠지는 일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 며칠간 동굴 속에서 시간을 죽이면서 느낀 것은, 그 죽은 시간 또한 내 몫이고, 그 시간은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평생 주어지지는 않는다. 지금 당장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나의 삶이 끝날 수도 있다.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이토록 한정적이고, 예측불가이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오로지 나의 몫이다. 그것의 소중함과 한정됨으로부터 내 그저 죽여버린 시간에 아까움을 느낀다.
 

답도 없는 문제로 끙끙대던 시간.. 그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딘 노래나 들을걸.. 이번에 나온 뮤직비디오를 보며 한 번 더 감탄할걸.. 이런 말은 글을 쓰며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상태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농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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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것은 딱 하나이다. 나는 아직 어리다. 그리고 바쁘게 돌아가는 시대 속 한가운데서 살고 있다. 어제의 내가 다르고 오늘의 내가 다르다. 아마 내일의 나는 또 다를 것이다.


그런 내가 추후에, 이 글을 읽게 되면 피식 웃으며 낯뜨거워질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끼며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으면 좋겠다. 너무 어릴 적에 쓴 글이구나. 내가 너무 어렸구나. 어린 애의 징징거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숙된 내가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이 동굴과 어둠, 심해의 이야기는 코웃음치며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어른이 되어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나를 조금 더 마음에 들어했으면 좋겠다.



[김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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