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유쾌하고 통쾌한 현대의 전통 - 적벽 [공연]

정동극장 기획공연 <적벽>
글 입력 2019.04.0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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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극장 기획공연 <적벽>을 만나보다.



시청역을 빠져나와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서울 시립미술관을 지나쳐 조금 더 걸으면 정동극장이 나온다. 어쩐지 옛것들의 박물관 같기도 한 그곳에 뮤지컬 적벽이 있다. 일전에 이곳에서 정동극장의 기획공연인 ‘판’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당시에 나는 판소리라 함은 고수와 소리꾼이 함께하는 단출한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지루한 음악만을 생각했더랬다. 물론 그것은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일테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화려하고 번쩍이는 아이돌들의 댄스음악을 좋아하던 나에게는 그런 형식이 낯선 탓도 있을 것이다. 뮤지컬과 연극에 흥미를 가지고 보게 된 뒤에도 판소리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을 둔 적이 없었는데, 그중 그나마 나에게 전통에 대한 흥미를 샘솟게 했던 작품이라하면 종일 눈물을 쏟으면서 보았던 뮤지컬 ‘서편제’와, 앞서 말한 정동극장 기획공연 ‘판‘이 있겠다.


적벽을 보기로 결심한 것은 그 두 작품의 덕이 컸다. 그 작품들을 보며 판소리에 대한 작은 흥미가 생겼고, 인터넷을 둘러보다 우연히 적벽의 무대 사진을 봤을 때, 그 세련됨에 놀랐던 터였다. 실제로 공연을 보면서도 그렇게 느꼈다. 하얀고 선적인 무대,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배합으로 모던하게 제작된 의상들, 거기에 멋들어진 부채까지, 전통의 현대적인 재해석이라면 이런 것이 아닐까?


공연 내내 부채의 사용에 감탄했다. 시원한 소릴 내며 펴지거나 접히거나 하고, 극 중에서 활이 되기도, 검이 되기도, 마음이 되기도, 목숨이 되기도 하는 다양한 이용은 의미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을 한 번에 잡은 느낌이었다. 특히 조자룡이 주유가 보낸 병사를 놀래어 쫓아내는 장면에서 동시에 허공을 가르고 바닥으로 떨어지던 붉은 부채가 참 멋졌다. 그리고 이렇게 멋진 조자룡을 이토록 멋진 여성배우가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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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시류를 읽은 것인지, 그저 때가 맞아 그렇게 된 것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적벽의 젠더프리 캐스팅은 확실히 흥미롭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삼국지의 적벽이다. 삼국지에 관련된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하자면 소개팅의 자리에서 여성이 삼국지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그 여성의 지적 수준을 평가하는 남성이 있다는 인터넷에 떠도는 우스운 이야기이다.


그런 사람이 진짜로 존재하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만큼이나 황당한 일이다) 그런 이야기가 생겨날 정도면 삼국지라는 장르가 소위 말하는 ‘남성적’인 문학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삼국지의 한 장면을 차지하는 조자룡과 주유, 제갈량이 여성 배우라니, 캐릭터가 행하는 능력과 성취에 대한 감탄과 통쾌함이 그야말로 배가 되는 기분이었다.


합창과 군무, 시선을 사로잡는 부채의 다양한 이용 외에도 조조의 유머러스한 장면 역시 재미를 책임지는 요소였다. 초반부에 붉은 옷을 입고 멋들어지게 등장한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해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는 모습이나, 조조의 군사들이 그를 조롱하고 때로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군사 점호’ 장면은 절로 웃음을 자아낸다. 군사들이 부르는 '새타령'은 그야말로 언어유희와 비유가 가득하다.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유공지사와 자탁유자의 이야기를 외는 조조의 모습 역시 보고 듣기가 즐거운 만담꾼의 모습이다. 이렇듯 적벽에는 전쟁과 술수의 싸움이라는 화려함과 일면 투박할 수 있는 큰 줄기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유쾌한 해학이 동시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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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한편에는 한글과 영어로 자막을 제공하는 스크린이 있었다. 판소리 가사에는 지금에 와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오래된 단어들이 많이 쓰이기에 확실히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들이 종종 있었고, 그럴 때마다 스크린으로 자꾸만 눈이 돌아갔다. 가끔은 한국어로도 무슨 말인지 명확히 알 수 없어 영어 자막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간혹 영어로 풀어진 말이 더 이해가 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스크린의 글씨들을 보느라 무대 위의 화려하게 펼쳐지는 장면들을 모두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모든 말소리를 전부 알아듣지 못해도 그 상징과 행동으로 가득한 시각적인 요소만으로도 큰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가 있다.


라이브밴드의 존재도 인상적이다. 무대 뒤편에 사각형의 공간 안에 위치한 라이브 밴드에서는 장면마다 다양한 느낌의 음악이 연주된다. 판소리와 어울리는 음악은 물론이다. 유비의 방문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제갈량에 대한 장비의 분노는 신나는 비트와 함께 시작된다. 형제들과의 의리를 재차 다짐하고 싸움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관우의 노래는 현대 뮤지컬의 한 장면 같았다. 이렇듯 때로는 판소리 같고 때로는 뮤지컬 같고, 또 때로는 신나는 비트와 함께하는 음악들이 귀를 즐겁게 해 준다면 현대무용과 스트릿 댄스, 전통무용 등 다양한 장르가 혼용된 춤은 눈을 즐겁게 해 준다.


공명을 설득하는 유비의 모습을 표현한 절절한 현대무용은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이렇게 다양한 들을거리와 볼거리가 어색하지 않게 한 공연 안에 어우러져 있는 적벽을 만개하는 봄과 함께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적벽은 5월 12일까지 정동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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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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