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히피 로드] 남미의 알프스, 바릴로체! 우프농장에서의 또 다른 삶

글 입력 2019.03.25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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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알프스, 바릴로체! 우프농장에서의 또 다른 삶



글 - 여행작가 노동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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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솔이랑 헤어진 지 몇 달 후 나는 라틴아메리카 우프 협회(WWOOF Latin America)에 가입했다. 잠깐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말하자면, 여행으로부터의 도피. 아르헨티나 도처에 있는 180여개 유기농 농장이 일손을 구하고 있었다. 어느 지역의 농장을 선택하느냐는 내 마음.


내가 점찍은 지역은 바릴로체(Bariloche)였다.


바릴로체는 사람들이 남아메리카의 알프스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나우엘우아피 국립공원에 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설산 아래 푸른 호수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곳,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에서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아르헨티나 우프 농장 리스트에서 바릴로체 호숫가에서 가장 가까운 농장을 찾아내 메일을 보냈다. 위치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다른 우프 농장과 달리 <독방 제공>이란 옵션이 눈길을 끌었다. 과연 답장이 올까?


- 다음 주 월요일 오면 됩니다. 이 주소로 찾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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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릴로체 호수가 내려다 뵈는 호스텔에서 주말을 보낸 뒤 날짜에 맞춰 농장으로 갔다. 도심에서 버스로 10분. 피오나 할머니와 아들 막심, 며느리 그레이스가 운영하는 허브 농장이었다.


원래 집 안의 빈 방을 빌려주려고 했는데 창고 위 다락방을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철제계단을 올라가 다락 방문을 열었다. 높은 천정의 목조주택, 넓은 방. 창밖으로 전나무 숲이 보이고, 삐걱거리는 마루의 느낌이 좋았다.


“맘에 드는 걸! 여길 사용할게.”


“사실 우리 아들들이 워낙 말썽꾸러기라 여기서 지내는 게 더 편하긴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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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반 기상. 막심네 집으로 건너가 아침식사. 오전엔 라벤더, 로즈마리, 재스민, 아니스, 시나몬 같은 허브를 포장하는 작업을 했다. 출하량을 차에 싣고 막심이 시내로 나가면 그레이스와 함께 모종을 옮겨 심거나 밭에 물을 뿌리거나 가래질을 했다. 농기계라고 해봐야 제초기가 전부. 삽질에 곡괭이질.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하니 사흘 동안은 해지면 죽은 듯이 잤다. 그리곤 바로 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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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치면 바릴로체 시내로 나가 영화를 보고, 날씨가 좋으면 호숫가에서 수영을 하고, 주말엔 나우엘 우아피 국립공원 트레킹을 하고, 산봉우리 카페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다가 돌아오는 일상.


TV도 인터넷도 없었지만 무료하진 않았다. 아르헨티나 가족 시트콤을 보는 듯 지루할 틈이  없었으니까. 출연진은 할머니, 아들, 며느리, 초등학생, 유치원생, 갓난애. 막심의 두 아들은 인간 청개구리들. 막심과 그레이스가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고 “그만 둬!”라고 야단을 쳐도 멈추질 않았다.


막심은 사슴 사냥이 취미인 마초형 사내, 그런데도 아이들에겐 알밤조차 먹이지 않는 게 신기했다.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보며 ‘뻑’하고 소릴 지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은 오히려 <오빠가 돌아왔다>의 아비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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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엔 막심이 어릴 때 읽던 책인지 잭 런던의 소설들이 먼지 묻은 채 뒹굴었다. 유년시절 나도 무척 좋아했던 작가. 잭 런던은  <강철군화> 이후 그가 쓰기 시작한 모험소설의 인기와 대중성 때문에 문학사에서 과소평가된 작가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소설은 재밌고 쉽게 읽히지만 대중성으로 폄하할 수 없는 심오한 메시지가 깃들어 있었다. 오래된 책 냄새를 맡으며 페이지를 넘긴다. 밀러 판사의 반려견에서 알래스카의 썰매개로, 마침내 늑대들의 왕이 되는 버크의 이야기를 담은 <야성의 부름>.


야성을 되찾은 들개는 두 번 다시 울타리 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비록 울타리 안에 따뜻한 잠자리와 배불리 먹을 음식이 있을지라도. 울타리 안의 ‘안락’에 익숙해지면 울타리가 용인하는 ‘허락’을 ‘자유’로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차츰 망각하게 된다. 자신이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는 진실을.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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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릴로체 허브농장에서의 삶> 20부작짜리 시트콤이 종영을 앞둔 밤이었다. 남극의 아기 펭귄이 발차기라도 한 것일까? 부는 바람이 차가웠다. 전나무 숲이 흔들리고, 반달이 전나무 꼭대기에서 어디로 갈까, 주춤거렸다. 어느새 울타리 안의 안락에 익숙해진 것이다. 떠나자!


아침에 일어나 마지막 식사를 하는데 막내 아들이 물었다.


“로 삼촌, 꼭 떠나야 돼? 이제 가면 언제 또 와?”


“할머니께서 네가 엄마, 아빠 말을 잘 듣고 있다고 알려주시면 돌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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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답에 호세는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어이 제군들, 다 준비했나? 자 이제 출발!” 막심이 등교를 시키려 현관 앞에서 차 시동을 걸자 호세가 내 다리를 붙잡더니 끌어안았다. 말썽꾸러기 녀석, 언제 이렇게 정이 들었나. 젖은 눈을 내 바짓가랑이에 비비고 돌아서며 호세가 말했다.


“초등학생이 되면 엄마, 아빠 말 잘 들을 게. 그럼 꼭 와.”






위 글은

<남미 히피 로드>

(2019년 4월 15일 발간)의 일부입니다.






노동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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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2년간 '장기 체류 후 이동 Long stay & Run'하는 기술을 연마한 후, 한국과 다른 대륙을 2년 주기로 오가며 '장기 체류 후 이동'하는 여행기술을 평생 수련하고 있는 여행가.


EBS세계 테마기행 여행작가. <길 위의 칸타빌레>,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길 위에서 책을 만나다>,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남아메리카를 떠돌며 전직 방랑자였거나 현직 방랑자인 자매, 형제들과 어울려 보낸 800일간의 기억. 방랑의 대륙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가 건져 올린, 사금파리 같은 이야기를 당신 앞에 내려놓는다.





[박형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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