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굴레방다리의 소극, 불행은 의지로 극복될 수 없는가? [공연]

글 입력 2019.03.22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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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공연을 보러 가던 그 날은 내게 너무 끔찍했다.



'머피의 법칙'은 이런 날을 위해 만들어진 말인가 싶었다. 3월 15일, 그 날은 친구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원래 만나서 근사한 점심 식사를 하고, 미리 골라둔 아기자기한 카페에 가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 뒤에 저녁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공연을 보러 가는 스케줄을 다 잡아 두었었다. 그런데 만나기 삼일 전쯤부터 슬슬 감기 기운이 있더니, 친구 생일 당일에는 3분에 한 번씩 기침을 하지 않고는 목이 간지러워서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머리도 어지럽고 콧물도 났다. 결국 나는 점심밥을 꾸역꾸역 먹은 뒤, 친구에게 좀 쉬다가 공연 볼 때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한참을 자고 일어난 후에도 감기 기운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제는 기침을 1분에 한번씩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체 내가 이 공연 관람을 왜 신청한 걸까 스스로에게 짜증을 퍼부으며 겨우 집 밖으로 나왔더니, 우산도 없는데 비바람이 치고 있었다. 공연 내용이 그다지 밝은 것 같지도 않았기에 이런 기분으로 어두운 공연 내용을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그렇게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 듯한 예민한 마음으로 나는 공연장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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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연극이었다.


공연장에 들어가서 최대한 기침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나오는 재채기를 안으로 밀어넣는 건 너무 고역이었다. 내 인내를 뚫고 간헐적으로 뛰쳐나오는 기침이 다른 청중들에게 방해가 되고 있는 것 같아 신경도 쓰였다. 결국 나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공연장을 나오고 말았다.

예상대로 공연은 어두웠고, 무서웠고, 긴장되는 작품이었다. 작품에는 오직 네 인물만이 출연한다. 아버지와 그의 두 아들 한철과 두철, 그리고 마트 여직원 김리. 사실 나는 김리가 등장하기도 전에 공연장을 나왔기 때문에 여배우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서울 북아현동 (옛 지명: 굴레방다리)의 어느 허름한 서민아파트 지하.

아버지와 두 아들은 서울로 오기 전 고향에서 겪었던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매일 연극으로 꾸미며 일상을 보낸다. 이들 부자에게 문 밖으로 나갈 기회는 오직 마트에 가는 일뿐.

연극에 쓰일 소품이 도착하면 그들은 먹고, 마시고, 음모를 꾸미고, 태우고, 부수고, 죽이고, 도망치는 잔인하고 난폭한 연극을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매일 가는 마트의 여직원이 뒤바뀐 봉지를 들고 집으로 찾아온다.


*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연극은 정말 기이했다. 아버지의 고향이 연변이었기에 대부분의 대사는 연변 사투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투리를 알아듣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말도 빠르고 상황도 빠르게 진행돼서 연극을 따라가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평온하게 진행되던 연극에서 아버지가 처음으로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은, 마트에 가서 장 봐오는 일을 담당하는 둘째 아들 두철이 소품을 잘못 사온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소세지 대신에 동그랑땡을 사온 것이었나?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한 가지 명확하게 알아들었던 것은, 그들의 연극 중 할머니의 유산 배분에 관한 편지를 재현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 유산이 거의 대부분 아버지에게 배분되고 아버지의 동생에게는 배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연극의 후반부 내용을 찾아보니, 사실 아버지는 유산을 노리고 동생을 살해한 뒤 본래 동생 부부가 살던 굴레방다리 지하방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연극에 대한 완벽주의는, 자신의 범죄를 기억 속에서 지워내고 자꾸만 밀려오는 죄책감을 뿌리치기 위한 노력의 발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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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의지로 극복될 수 없는가?


그런데 사실 연극 뒷부분 내용을 찾아보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아버지의 연극 뒤에 숨겨진 그의 끔찍한 범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형 한철이 결국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남겨진 두철이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결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철은 왜, 나가지 못했을까? 그를 방에 가둬놓으면서 그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던 원인은 아버지의 폭력성이 아니었던가? 아버지가 사라진 그 때에, 왜 대체 그는 집 밖으로 나가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던 걸까? 불행은 자유의지로 극복될 수 없는가? 인간은 결국 자라온 환경에 의해, 혹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기질에 의해 결정될 뿐 이미 형성되어버린 불행에서는 한 발자국도 이탈할 수 없는 존재인 걸까?
 

연극을 볼 때보다도, 이 결말을 알고 난 뒤에 더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나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공연장을 나와버린 것을 조금 후회했다. 분명, 볼 가치가 있는 연극이었다.

아마 연극의 제작자가 말하고 싶었던 건 - 인간은 결국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런 통속적 결론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비극적 상황을 통해서 - 예컨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메디아 이야기처럼 - 슬픔이 끝나는 곳에 생에의 의지가 있음을 도출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두철은 분명 언젠가 세상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단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의 눈 앞에 벌어진 비극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낼 수단이 필요했고, 자신이 아는 수단이 연극 밖에 없었을 뿐이다. 



잘 사는 인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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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연극을 보기 전에 상상했던 이 작품의 이미지(현대인의 고립과 소외)와 실제 연극을 본 뒤, 그리고 연극의 줄거리를 알게 된 뒤 갖게 된 이미지는 완전히 달랐다. 물론 고립과 소외에 대한 연극이라는 설명도 맞지만, 모든 예술은 결국 향유자의 가슴 속에서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는 내 가치관처럼, '굴레방다리의 소극'이 내게 갖게 된 의미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갈망'에 가까웠다.

결국 굴레방다리 지하방에 갇혀 버린 두철처럼, 그리고 방 밖을 나가지 못한 채 죽은 형 한철처럼 나의 의지는 좌절되고 난파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끊임 없이 방 밖으로의 탈출을 감행할 것이다. 언젠가는 내가 쓰고 있는 지금의 가면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기를 기원하며, 연극이 아닌 실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꿈꿀 것이다.

잘 사는 인생은 뭘까? 행복한 삶은, 또 뭘까? 연극에서 폭력적인 아버지로 대변되는 내 행복에의 장애물,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가로막는 환경적 요소를 나의 힘으로 밀쳐낼 수 있을까?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뜻깊은 연극이었다.


[이창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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