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섬과 사람들, ‘하거도’ [공연]

글 입력 2019.03.17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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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불이 켜지자 정글짐 같은 수용소의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하거도에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내 몫의 땅만 좀 챙겨주게.” 하는 등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는 사람들은 어딘가 불안하고 절박해 보인다.


서로 끌어당기고 밀치는 동작과 심상치 않은 대사가 끝나자,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보이는 것은 수감번호 26-7284의 어떤 사내와 하거도. 그는 하거도에게 어떤 재판을 오늘 안에 끝내야 한다며 그에게 용서를 빌라고 종용한다. 이내 수의를 입은 사람들이 속속 모이자, ‘하거도’는 피고자가 되고 그의 잘잘못을 가리는 재판이 하거도의 ‘환영’ 속에서 시작된다. 어떤 이유로 그들은 하거도의 환영 속에 모여 재판을 벌이게 된 것일까.

 

‘하거도’는 본래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었으나 육지에서 떠밀려온 사람들이 겨우 정착해 살기 시작한 섬이었다. 하나 둘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들에게 불현듯 닥친 군인들은 주민들을 이유 없이 모두 끌어내고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들에게는 총살을 가한다. 그렇게 주민이 하나도 남지 않은 섬 ‘하거도’에는 발전소를 가장한 수용소가 건설되고 어디선가 끌려온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서 매일 강제 노동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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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거도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강제로 사창가에 잡혀 살던 언어 장애가 있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파양되어 하거도로 돌아온 그는, 성매매 포주이자 수용소의 브로커 역할을 하던 한 모자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어머니처럼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는 수용소에 끌려가 말을 잃고 인간으로서의 삶 또한 포기해버렸다.


노동을 착취하고 이익을 가로채던 관리자들은 수용자들에게 주던 배급이 아까워 끊어버리고, 이미 인간성을 상실한 수용소의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를 보다 못한 하거도가 수용소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혀를 뽑아버리며 극은 막을 내린다.

 


 

환영 속 재판



극의 전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사건이 일어난 과거를 보여주는 장면들과 현재라 할 수 있는 하거도의 환영 속 재판을 통해 관객은 하거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유추하게 된다.


재판은 실재가 아닌 환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것이 별로 없다. 판사는 재판을 지루해하고, 검사와 변호사로 나선 이가 서로의 역할을 넘나들며 하거도를 신문하고 증인을 불러들인다. 이마저도 주인공의 왜곡된 기억으로 한 차례 꼬여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환영 속에서 재판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극의 전개에 따라 하나씩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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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하거도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현실에서 발전소의 관리자든 수용소의 강제노동자든 그 비인간적인 행실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환영 속에서나마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몰아넣고 노동을 착취한 관라자들의 행태를 고발함과 동시에,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한 이들의 삶을 비춰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가 더 선하고 악함을 가리지 못한 채 재판은 끝나버린다. 위로부터의 억압과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고려하지 않는 권력의 그림자가 판단의 범위를 넘어선 까닭이다. 또한, 그 어둠으로부터 비롯된 살생과 공포가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조차 허물어버린 까닭이기도 하다.


 

 

섬이자 사람, ‘하거도’



‘하거도’는 배경이 되는 가상의 섬이자 주인공의 이름이다. 파양되어 돌아온 그에게 할머니가 이름 지어주기를, “사람이 살지 못할 이 섬에 다시 들어왔으니, 여기서 태어나 죽을 운명이다. 그래서 너의 이름은 이 섬이다, 하거도.”라고 말한다. 달리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섬의 명칭을 따 붙인 이름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이 장면은 복선이 된다. 살아 돌아가지 못할 섬에 제 발로 들어온 그가 곧 하거도가 되어버린다는 것.

 

수용소에서 말을 하지 못한다며 천대받고 미움받아도 그는 마지막까지 스스로가 사람이길 갈망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옥수수죽 한 그릇을 더 먹기 위해 아들이 어미를 고발하고 동료를 저버리는 곳이었다. 크림빵의 달콤함을 손에 쓰며 아들에게 설명해주고 담장 밖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좋아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그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고 고백하는 그. 애초에 담장 안과 담장 밖은 없었으니 환상을 다 지워버리라는 그의 독백에서는 텅 비어버린 영혼의 씁쓸함이 느껴진다.


허울뿐인 아름다움 아래로 지옥 같은 현실을 감추고 있는 섬 하거도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사람 ‘하거도’와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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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하거도’에서 내가 또 하나 눈여겨본 것은 시대적 배경이 매우 오랜 세대에 걸쳐 있다는 점이다. 하거도가 무인도였던 30년대 혹은 그 이전부터 2018년까지 아주 긴 시간 동안 섬에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마침내 죽어가는 과정을 하나의 사건을 통해 보여준다. 수용소를 세운 이들이 공모를 시작한 시점부터 주인공 하거도가 불을 지르고 사건의 모든 정황이 관리자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극의 상황을 현실로 가져와보면 대략 일제강점기 즈음부터 현대가 될 것이다.


한 사건이지만 수십 년에 걸쳐 시나리오가 쓰인 것은 현재에도 이러한 사건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와 그 심각성을 보다 더 가까이에서 느끼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과거의 소록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최근의 ‘염전 노예 사건’을 생각해보아도 개연성이 충분함을 알 수 있다.

 

아무도 몰랐던 섬 하거도에서 일어난 이 잔인한 사건을 통해 우리는 사회와 한 개인이 가진 다양한 면모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 된다.

 

    

[차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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