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외로운 여전사들에게 - 연극 <여전사의 섬> [공연]

당신은 혼자가 아니므로
글 입력 2019.03.06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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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여전사의 섬).jpg
 

전사. 이 두 글자가 가진 공간은 아직 터무니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니 이 단어 앞에 ‘여’라는 쓸데없는 접두사를 붙여야지만 비로소 여성도 전사 카테고리 안에 들어갈 수가 있다. 아니, 어쩌면 저 두 글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지구를 배회하는 모든 단어들에 여성이 들어갈 자리는 참 많이 부족하다.

그 부족한 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던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아마조네스(Amazones)는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부족이다. 신화 속에서 아마조네스는 상당히 잔인하고 과격하게 그려진다. 남성을 발견하면 즉시 살해하고,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평생 노예로 부리거나 다른 종족으로 보내는 식이다. 신에게 딸을 제물로 바치거나 인간 여성들을 겁탈하던 남성 신들은 왜 잔인하고 과격하게 그려지지 않았는지, 뭐 이런 의문은 접어두도록 한다. 그들은 ‘남신’이 아니고 ‘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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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준비 중인 아마존 전사
Pierre-Eugène-Emile Hébert(1860)


현대에서도 아마조네스는 꽤 흔히 쓰이는 비유 표현이다. 작년 여름, 스페인 사회당 내각의 장관직 17개 중 11개에 여성 장관이 발탁된 후 아마조네스 내각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고, 원더우먼 캐릭터의 근간도 아마조네스 신화였으며, 브라질의 아마존 강 이름 또한 아마조네스에서 유래했다. 그렇게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전사 집단 이름을 마구 갖다 붙이는 걸 보면, 여성들이 사회의 리더 자리를 맡는 게 이 사회에서 얼마나 비상식적인 일인지 약간은 가늠이 된다.*

연극 <여전사의 섬>은 서울시극단 <플래시 온 창작플랫폼> 프로그램에서 개발된 작품이다. 면접에서는 싸늘한 시선을, 아르바이트 직장에서는 무분별한 해고를 당하는 ‘지니’와 결혼 전 남자친구의 폭력에 고통을 받는 ‘하나’는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우려 엄마를 떠올리기 시작한다. 한 번도 부서지거나 무너지지 않았던 엄마. 이들은 엄마가 여전사 아마조네스이고, 여전사의 섬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 ‘지니’와 ‘하나’는 엄마를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어렸을 적 키가 작았던 나는 무서운 언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커서는 여전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된 나는 세상에 여전사가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 속 판타지로 묻었다. 그리고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잊었던 여전사를 다시 떠올렸다. 이 사건은 많은 여성들에게 변화의 바람을 촉구했고 그렇게 만들었다. 그 광경을 보며 여전사는 지금 내 옆에 있고 이 사회에 숨 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여전사를 꿈꿔보기로 했다.

- 작가 임주현


대한민국 사회에 여성혐오의 경종을 울린 사건이 ‘강남역 살인사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살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그 공포로부터 나를 지켜 줄 ‘전사’가 없다는 외로움, 그 틈에서도 하나 둘 힘을 모으던 ‘여’전사들. 왜 여성은 전사가 될 수 없는가, 라는 베이직한 질문부터, 왜 나는 전사의 호위를 받아야만 안심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라는 한탄 어린 질문까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대한민국은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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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고통 받는다. 유리창은 깨져도 유리천장은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구에서 최고로 애 안 낳는 나라’라는 수식어가 생긴 이유는 멀리 있지 않은데, 사회는 자꾸만 그 주변만 빙빙 돌며 책임을 회피한다. 장관직 열일곱 자리 중 열한자리를 여성이 차지했다는 이유로 별명까지 붙는 걸 보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듯싶다. 여성이 리더가 되고, 여성이 권리를 갖는 세상을 왜 이렇게나 두려워하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100년 전의 여성들이 유리창을 깨며 외쳤던 ‘여성 참정권’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듯이, 미래의 여성들은 반드시 유리천장을 부수고 성 이분법적 굴레에서 탈피할 터다. 그때가 되면, 구태여 맞춤법까지 어겨 가며 ‘여전사’라는 비문을 쓰지 않아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성 전사와 남성 전사가 나란히 떠오르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아마조네스 신화도 잔인한 신화가 아닌 용감한 신화로 탈바꿈하지 않을까.





상세페이지 여전사의섬.jpg
 

*참고: 이현우,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여전사의 나라 '아마조네스'는 정말로 존재했을까?', 아시아경제




[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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