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실체 없는 공포에 관해서,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도서]

글 입력 2019.03.0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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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웹서핑을 하며 시간을 축내다가 우연히 게시물 하나를 클릭했다. ‘디즈니 직원들을 위한 메모’ 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디즈니의 직원들은 고객의 안전과 편안함을 최우선시합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걸로 봐서는 얼핏 평범한 직원용 매뉴얼 같았다. 그런데 어쩐지 읽어나갈수록 의문이 생기더니, 나중에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었다. 나열되어 있던 규칙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 미키 마우스는 한 번에 단 한 명만 나갑니다. 만일 두 번째 미키 마우스가 사인회장에서 발견됐을 시 눈 부분을 확인하십시오. 모든 디즈니 코스튬은 눈의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 만일 눈 쪽의 구멍을 찾지 못했다면, 사인회는 계속해서 진행하되 사진촬영을 불허하십시오. 사인회가 마무리된 이후 즉시 보안 요원에게 연락하십시오.



대체 두 번째 미키 마우스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없지만 공연히 읽는 사람의 머리를 쭈뼛하게 만드는 글이다.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인 레딧(Reddit)에 올라온 흔한 창작 괴담 중 하나인 이런 유형의 글을 ‘나폴리탄 괴담’이라고 부른다. 결말을 분명하게 짓지 않는 것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웹상에서의 은어에 가까운 이런 용어가 생기기 전에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르가 있었으니, 바로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가 그것이다. 코스믹 호러는 인간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인력으로 피하거나 대처할 수도 없는, 한 마디로 우주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이용한 공포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장르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작가가 바로 ‘H.P.러브크래프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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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의 대표작을 모아둔 단편집인 본 책을 접하게 된 건 재작년 여름쯤이었다. 기나긴 폭염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때, 기왕 잠들기는 틀렸다면 가벼운 공포물이라도 보면서 몸을 식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고전 공포물의 대가라는 그의 책을 읽고 처음 느낀 점은 의외로 신선함이었다. 족히 백 년은 되었을 고전 작품이라면 장르문학의 특성상 이미 후대에 반복되어 익숙해진 클리셰로 점철되어 있을 거라는 우려는 선입견이었다(어쩌면 간이 작아 공포물을 자주 읽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새 다시 읽어봐도 뭔가 기묘하면서 신비로운,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단편들 중 <에리히 잔의 연주>는 러브크래프트식 호러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오제이유 가는 주인공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지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서 거주하던 주인공은 위층 다락방에서 에리히 잔이라는 노인의 연주를 듣고 매료된다. 그에게 여러 번 찾아가 연주를 청하기도 하지만 그는 신경과민 증세와 함께 타인을 달가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요청 끝에 들려주는 그의 연주는 공포와 광기로 가득 차 있고, 연주가 계속될수록 에리히 잔의 증세는 심해진다. 어느 날 그는 주인공을 방으로 불러 자신을 괴롭히는 것의 정체를 설명해주겠다며 종이에 글을 써나가다가,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성을 잃고 다시 광기 어린 연주를 시작한다. 그 때 돌풍이 거세지면서 깨져버린 창문 사이로 종이가 날아가고, 그것을 붙잡으려던 주인공은 무심코 창문 바깥을 바라보고 경악한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어떤 빛도 형체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다.




대체 그 어둠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러브크래프트의 설명대로라면 그것은 미지의 우주이다. 그야말로 코스믹(Cosmic) 호러가 아닐 수 없다.

유명한 <허버트 웨스트> 시리즈 중 한 작품도 담겨 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Mad Scientist: 천재적인 두뇌와 상식을 벗어나는 가치관을 보유한 과학자 캐릭터를 일컫는 말)의 전형인 그의 이야기는 마치 추리 소설처럼 관찰자 포지션에 해당하는 친구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허버트 웨스트는 시체를 되살리는 연구에 매진하다가 타락해 버린 의사로, 종국에는 시체 대신 살아있는 사람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등 반윤리적인 실험을 계속하다 기어코 좀비에 가까운 괴물들을 탄생시킨다. 그는 결국 자신이 되살린 그 괴물들에게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이와 같이 도저히 실제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이 보이지만, 묘하게 독자를 상황 속으로 이입시키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연이어 이어진다.



러브크래프트 하면 떠오르는 고대신 크툴루가 등장하는 <크툴루의 부름>도 실려 있다.크툴루는 이 이야기에서, 망망대해에서 마주친 나약한 인간들에게 단단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크툴루 시리즈의 대표작으로 자주 손꼽힌다. 읽다보면 마치 대처할 수 없이 거대하고 갑작스러운 자연재해를 다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비록 작가는 지구상의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의도했다기보다는 우주적인 규모로 시선을 돌려 공포로 승화시키고자 했겠지만 말이다.

크툴루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딱 이 작품 한 편 뿐이기에 이 시리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러브크래프트의 다른 작품집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크툴루가 등장하는 작품이 적게 실려 한편으로는 아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크툴루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공포로 어필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크툴루라는 존재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상대할 수도 정체를 알 수도 없는 ‘그레이트 올드 원’이라는 존재인데, 그런 공포의 대상이 되기에는 오늘날에는 당대 사람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과학기술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크툴루 신화의 이야기가 더 비중있게 실렸다면, 이번 단편집 전반에 흐르는 적당한 공포물의 기운이 갑자기 판타지물의 그것으로 변해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두족류를 식재료로 삼는 문화권에서 살아온 우리에게는 크툴루의 모습이 그다지 기괴한 형체로 느껴지지도 않으니 말이다.





세상의 이치를 손 위에 올려두고 있는 듯이 살고 있는 현대에도 실체 없는 무언가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우리 마음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도입부에 언급했던 ‘나폴리탄 괴담’으로 대변되는 이런 심리는 아직도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미신을 믿고 위험한 주술에 매료되게 만든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이 아직까지 독자들에게 읽히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밤잠 못 이루게 하는 찜찜한 공포와는 거리가 멀지만, 여전히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느낌을 주는 데다 특유의 고딕적인 분위기가 더해져 마니아층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또 한 차례의 폭염이 예고되는 이번 여름 역시 나는 러브크래프트와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을까 싶다.


[한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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