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개껍데기는 어디에나 있다 : 나의 산티아고 순례기 #0 [여행]

머물러있으면 이대로 고여버리고 말 것만 같아서
글 입력 2019.03.06 04:28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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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우습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나는 신을 만나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작년 이 맘쯤의 바르셀로나에서였고, 그의 모습은 부랑자였으며, 내가 그에게 한 행동은 적선이었다. 2천원 남짓한 샌드위치나 맨날 사 먹던 곤궁한 교환학생이 할 만한 짓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백발 노인은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떠안은 것처럼 보였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는 아틀라스라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분명한 건 내가 단순히 측은한 마음에 주머니를 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더 신비롭게, ‘알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 때문이라고 해 두겠다. 동전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나자 근심의 그늘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던 그의 눈동자가 보인다. 우주를 담은 듯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였다.


그 순간 평안이 내게로 쏟아졌다. 정말 간만에 느끼는, 완연한 평안이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하지 말라며 타박할 수도 있다. 내가 있던 곳은 온종일 밝은 기운이 생동하고, 사람들은 따스하며, 샹그리아로 된 바닷물이 있을 것만 같은 즐거운 도시였으니까. 헌데 타지 생활이 대개 그렇듯이 힘든 시기가 존재했고, 나는 당시 그걸 길고 굵게 겪고 있었다. 코트 하나 제대로 챙겨오지 않은 탓일까, 아니면 학교 생활이 생각만큼 신나지 않았던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잃어버린 관계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까.


재킷 하나와 얇디얇아 쉽게 벗겨지는 예민한 마음으로 버티기에는 그 겨울이 유난히도 시리게 느껴졌다. 창밖엔 꿈에 그리던 유럽이 있는데도, 꿈을 얻고 현실을 잃은 사람이라며 우울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강렬한’ 느낌에 끌렸다는 건 꽤나 반가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노인의 눈에서 절박함이 희망으로 바뀌는 걸 목격한 순간, 체내의 수많은 잡음은 사라지고 단순한 충동 하나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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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러있으면 이대로 고여버리고 말 것만 같았다. 낯선 곳보다 더 낯선 곳으로 계속해서 굴러가는 돌멩이가 되고 싶었다. 절박함을 희망으로, 우울을 동력으로, 눈물을 해소로 바꾸기 위해서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부활절 방학 여행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집에 가지 않고 그 길로 곧장 스포츠용품점에 들렸다. 값싼 등산화, 얇은 침낭, 칙칙하고 챙이 넓은 벙거지 모자를 샀다. 다 해서 한화로 5만원이 채 안되는 금액으로, 유럽 어딘가를 여행하기엔 상당히 비범한 준비물들을 구했다. '반드시 할거야'라기 보단 '행운이 따른다면 어쩌면 시도해 볼 수는 있는'의 의미가 강한 나의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이룰 완벽한 찬스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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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야고보의 길(Camino de Santiago), 일명 산티아고 순례길.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을 이른다. 다양한 루트가 있지만 순례자들 사이에서 정석으로 취급되는 곳이 바로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생 장 피드 포드에서 시작하는 ‘프랑스길’이다. 총 800km로 완주하는 데 30일 남짓 소요된다. 생 장 피드 포드에서 바르셀로나는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부활절 방학은 이주일 정도여서 프랑스길 중간의 도시 ‘레온’에서 나의 순례를 시작하기로 했다.


이 주 뒤의 비행기 티켓을 편도로 사는데 기분이 묘하다.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티켓만 사다니, 갑자기 걸어야 할 길이 아득하게도 느껴진다. 사실 어떤 기대를 품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길에서 만날 자연들에 경탄할 준비는 되어있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도망자 신세인 셈이었다. 최대한 잘 달아날 수 있도록 짐을 가벼이 했고, 허둥대며 가방을 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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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바르셀로나 북터미널에서 레온행 버스에 올라탔다.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물과 간단한 음식조차 사지 못해서 가진 거라곤 전날 챙겨둔 부활절 달걀 초콜릿과 귤 몇 개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날씨는 맑았고 낯선 공기가 폐로 기분 좋게 밀려들어왔다. 그저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뿐인데 나의 여정에 ‘순례’라는 말을 붙이는 게 좀 거창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남들은 구원을 얻고 싶어서, 치열하게 고민해왔던 답을 얻기 위해서 등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서 순례를 하는 것일텐데,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떠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구실이 잔뜩 생겨서 다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냥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했다.


나는 모자로 둔갑한 제단에 적선이 아닌 일종의 봉헌을 한 것일까? 이렇게 목적조차 불분명했던, 준비되지 않은 순례자가 무사히 돌아오고 심지어 그럴싸한 이야깃거리도 챙겨왔다. 순례를 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다시 그 길에 존재하고 싶은 지독한 향수를 느낀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최예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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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딩똥
    • 잘 읽었습니다. 평화로운 오후시간대에 걸맞는 차분해지는 듯한 기분이에요 :)
      다음 글도 기대됩니다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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