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덕질은 나의 힘

내가 탈덕하지 못하는 이유
글 입력 2019.03.01 00:46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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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것으로부터
위로 받은 경험이 있나요?

특정한 시기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자신의 최애곡이 있다면 어떤 노래일까요?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일부)




기형도 시인이 생의 힘을 질투로 꼽았다면, 나는 내 생의 원동력을 ‘미루기’로 꼽을 터다. 혹자는 완벽주의를 가진 사람들이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크다고 말하지만, 내 미룸은 완벽주의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 본능에서 새어나온 것이다. 사실 이 문장들은 죄 변명이다. 얼마 전 이 공모전(?) 신청을 받을 때 분명히 질문 두 개를 체크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당당히 ‘시간 많이 남았으니 열심히 써 봐야지!’라고 다짐도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도 역시 마감을 하루 앞두고 부랴부랴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뭘 쓰겠다고 했는지 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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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각은 열두시, 내일은 내일의 오피니언을 써야 하는 몸이라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 뭐, 처음에 체크했던 질문이 아닐지라도 떨어지기밖에 더 하겠느냐는 당당한 마음으로 일단 활자를 적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첫 문장을 쓰고, 그에 걸맞은 두 번째 문장을 쓰는 걸 무한히 반복해 책을 완성한다고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게 내 생의 두 번째 원동력이니 오늘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쓰는 법을 조금 빌려볼까 한다.

생을 구르게 하는 두 힘이 ‘미루기’와 ‘어떻게든 되겠지’라니, 내가 봐도 참 헛웃음만 나온다. 세 번째 힘은 ‘덕질’이다. 이쯤 되면 웃음도 나오지 않고 한심함이 머리를 채우지만, 이렇게 살아도 어떻게든 살아졌기 때문에 조금 더 당당해지기로 했다. 아무튼 내 미룸과 체념, 그리고 덕질의 역사는 내 스스로 사고할 힘을 갖게 된 후로 쭉 이어졌기에 지면상의 이유로 몇 개 생략하고, 당장 떠오르는 사건부터 회고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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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연을 사랑하게 된지도 벌써 7년째에 접어들었다. 손가락으로 햇수를 세다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사랑할 계획은 없었는데, 계획이란 아무 소용없다는 모 뮤지컬 넘버의 가사가 찰떡처럼 걸맞다. 내가 뮤지컬과 절절한 외사랑에 빠진 계기는 중학교 음악 시간에 선생님께서 틀어주셨던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1998년 오리지널 DVD’ 영상이었다.

선생님, 왜 그걸 보여주셔서 저를 이렇게 만드셨어요, 라며 가끔씩 장난 어린 한탄을 하기도 했으나 그만큼 나는 그 뮤지컬의 노래를 사랑했다. 하지만 중학생이었던 나는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 있지 못해서 다양한 작품을 보러 다닐 수 없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부러웠던 사람은 돈과 시간 많고 혜화역이 도보 10분 이내인 사람들이었는데, 스물둘이 된 지금까지도 똑같이 부러워하고 있다.


▲한 번만 들어주실래요? 제가 이렇게 된 계기입니다.


2015년, 바야흐로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일 적에 내 인생의 커다란 슬럼프가 찾아왔다. 안녕? 나는 슬럼프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이런 달콤한 인사를 주고받을 거라곤 기대도 안 했지만, 적어도 인사 정도는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인생사란 계절의 변화와 비슷해서, 어느 한 시기에 익숙해질 만하면 금세 찬바람이 불고, 금세 뙤약볕이 내리쬐는 법이다. 봄이 오기 전 2월 말, 나는 건강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퇴원을 한 후 학교에 가 보니 내가 적응할 틈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2015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덕이었다. 일탈하지 않는 모범생 이미지를 버릴 수가 없어서 부모님께 거짓말까지 해 가며 샤롯데 씨어터를 밥 먹듯 드나들었다. 그때 성당 주보를 가져가면 2층 S석을 단돈 5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갈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학생이었던 나에게 절대 싼 돈이 아니었지만, 뮤지컬 외에 위로 받을 곳 없이 온갖 거무튀튀한 감정을 쌓아두기만 했던 내게는 절대 아깝지 않았다. 낭비라기보다 소비였고, 소비라기보다 투자였던 셈이다. 잠실에 위치한 샤롯데 씨어터를 가는 길에 너무 더워서 땀을 뻘뻘 흘렸던 기억도 있고, 너무 지쳐서 눈물을 뚝뚝 흘렸던 기억도 있다. 여러모로 참 짜디짰던 여름이었다.


▲이것도 한 번만 들어주실래요?
3월 1일 기준 1266일째 기다리고 있는 공연입니다.


그래, 정말 계획에 없었다. 나는 뮤지컬을 사랑할 계획도, 잠실에서 위로를 받을 계획도, 그 원동력으로 고3까지 버티게 될 계획도 없었을뿐더러 두 번째 암흑이었던 새내기 시절을 뚜벅뚜벅 버텨 나갈 계획도 없었다. 인생에 몇 개의 산이 있을지 가늠은 못했어도 어떻게 버틸지 예상 정도는 했던 나였는데, 할 일도 미루는 주제에 예상대로 살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아무튼 내 ‘존버’의 역사는 공연으로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스물을 맞았다. 다행히 수능 공부는 미루지 않아서 대학은 한 번에 갔지만, 미련을 먹고 자라는 괴물은 내 안에서 소리 없이 덩치를 키워 갔다. 내 생의 원동력이 미룸이라면, 미룸의 원동력은 미련이라는 것을 난 몰랐다. 나도 모르게 입시에 미련을 가졌던 것인지, 몸에 잘 받지도 않는 술을 마구 마시기도 하고 시험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은 채 시험을 보기도 하면서 한 학기를 날렸다. 말 그대로 ‘날렸다’. 존버가 언제나 답은 아니라는 점을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버틸 힘이 없을 때는 잠시 앉아야 한다는 것, 그것도 일종의 버티기라는 점을 새내기 때 절감했다.

힘이 풀린 다리로 겨우겨우 기어갈 수라도 있었던 것도 다 공연 덕분이었다. 그 때의 나는 ‘뮤지컬 비스티’에 빠져 있었다. 사실 여전히 내가 그 공연을 왜 그렇게 많이 봤는지 납득 가지는 않는다. 캐릭터 빼고 모든 요소가 나와 맞지 않았던 공연이었으나, 캐릭터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무려 열아홉 번을 관람했다. 미쳤지, 미쳤어. 그 돈 모았으면 적금 통장도 들었겠다. 그런데 뭐, 영혼 없는 적금 통장이 다 무슨 소용이람. 그 돈 모아서 또 공연 보겠지. 나는 그 돈을 들여서 허술한 버팀목을 세웠다. 튼튼한 버팀목을 사기에는 돈이 조금 모자란 건지, 시간이 조금 모자란 건지, 아니면 둘 다 모자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금은 허접한 버팀목을 내 옆에 세웠다. 그리고 또 버텼다.

사실 여전히 나의 원동력은 미련에서 기인한 미룸, 그리고 미룸에서 기인한 ‘어떻게든 되겠지’다. 그리고 그 둘을 굴리는 힘은 공연이다. 나는 다음 주에도 대학로에 간다. 나의 절절한 외사랑을 언제나 받아줄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 짝사랑에 익숙해지고 있다. 통장을 바치고 체력을 바쳐도 좀처럼 내 사랑을 받아주지를 않아 착잡할 때도 있고, 언제나 그만두나, 하며 나를 탓할 때도 많지만 이제는 좀 즐기려 한다. 뭐, 탈덕도 미루다보면 또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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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을 잃고 나는 쓰네.
(...)
가엾은 내 사랑 혜화에 갇혔네.

/ 원문: 기형도, 빈집 (하단 첨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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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황햠
    • 저도 노담 실황으로 입덕했어요 .... 브루노 최고야 ㅠ.ㅠ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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