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피와 욕망의 늪: 테레즈 라캥 [도서]

욕망하라, 모든 걸 잃을 것이다
글 입력 2019.02.12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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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욕망의 늪: 테레즈 라캥

욕망하라, 모든 걸 잃을 것이다





한 꼬집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타오르는 초를 떠올려보자. 한 쌍의 나방이 그 뜨거운 불빛 주변을 맴돌고 있다. 적정 간격을 알지 못한다는 듯 그들은 아슬아슬 그 위를 비행한다. 무모하고 아찔하며, 대담하고 어리석다. 나방 하나가 불꽃으로 뛰어든다. 다른 하나도 그 뒤를 따른다. 죽음 뒤엔 재도 남지 않는다. 방에는 초가 타오르고 있다.

소설 [테레즈 라캥]을 읽고나면 떠오를 이미지다. [테레즈 라캥]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테레즈 라캥]을 읽고 자신이 필력이 아주 좋은 작가였다면, 분명 이런 소설을 썼을 것이라며 마치 자신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기이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박찬욱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바로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추한 것,

슬프면서 동시에 웃긴 것,

성스러우면서 동시에 천박한 것,


그런 게 좋다.


- 박찬욱 (영화 감독)





불완전함이라는 불행, 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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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의 서늘한 공기가 새어 나오는 어두운 거리, 그곳에 라캥 부인의 상점이 있다. 그곳엔 라캥 부인과 그녀의 아들 카미유, 그리고 카미유의 아내 테레즈가 살고 있다. 테레즈는 순종적인 모양새로 무료한 일상을 견뎌내고 있지만, 그녀의 안에선 어떤 욕망과 야성이 꿈틀대고 있었다. 카미유와 지긋지긋한 집구석 따위로는 해결되지 않는, 아주 깊고 어두운 본성. 그때 카미유의 친구, 로랑이 나타난다.


로랑의 거칠고 달콤한 냄새는 테레즈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고, 테레즈의 음험하고 도발적인 매력은 로랑을 유혹한다. 두사람의 사랑은 순수하게 시작되지 않는다. 로랑은 친구의 여자를 탐하고, 테레즈는 남편과 라캥 부인을 속이며 희열을 느낀다. 로랑과 테레즈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카미유로 옮겨간다. 카미유만 사라진다면 둘의 세계는 더욱 완전해질 수 있다고. 모든 게 완벽할 것 같다고...



스스로도 놀랄 지경으로, 로랑은 자기 정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번도 이런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부드럽고도 힘센 테레즈는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로랑을 꼭 껴안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뜨거운 빛과 정열적인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정부의 얼굴은 달아오른 사랑으로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 테레즈 라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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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박쥐> 스틸컷



[박쥐]의 영문 제목은 'Thirst', 즉 갈증/ 갈망이다. 이는 [박쥐]라는 제목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테레즈 라캥]의 본질을 건드린다. [테레즈 라캥]에는 온갖 종류의 갈망이 범람한다. 색色을 밝히고, 번듯한 가정을 탐내며, 돈과 방종을 꿈꾼다. 그리고 그 갈증의 해소를 위해서라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무모하며 도발적이다. 오랫동안 피에 굶주려온 흡혈귀처럼.


로랑과 테레즈는 금단의 선을 밟으며 더 나은 곳을 기대했다. 더 많고 더 달콤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하지만 손끝에 걸린 것은 쾌락도 구원도 아니었다. 끝없는 죄의식과 비열함만이 질척이는 늪처럼 지척에 깔려있다.  영원토록 그들을 불행한 불완전 속에서 살게 할 지옥. 끝없는 갈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테레즈'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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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박쥐> 스틸컷


[테레즈 라캥]은 피와 욕망이라는 두 바퀴로 힘차게 굴러간다. 하지만 나를 가장 흥미롭게 한 건 의외의 곳에 존재했다. 이 1867년에 출간된 소설이 너무나도 진취적이고 성性과 욕망에 충실한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냈다는 점이다.

19세기 말은 여성의 성욕을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다. 해소되지 못한 성욕으로 인한 여성의 이상 행동을 '히스테리'라고 규정하며, 그 치료법으로 '그네 타기', '최면', 심한 경우 '자궁 적출'을 시도하던 때다. 훗날 손가락으로 질 안쪽을 마사지 해주는 치료법이 개발되어, 의료기기로써 바이브레이터를 만들어낸 것도 이 시기다.

이런 속좁은 시대에 테레즈라는 여성을 상상해냈다는 점에서 에밀 졸라의 대담함이 엿보인다. 그는 [테레즈 라캥] 이후로도 [목로주점], [나나],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등을 통해 여성 캐릭터를 부각시켰는데, 모두 욕망에 충실하고, 매혹적인 여성들이다. 그들은 서사를 위해 소비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을 주도하고 결정적인 행동을 수행한다. (이런 점 역시 박찬욱과 많이 닮아서 재미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충족되지 않은 그녀의 육체는 끝인 줄 모르고 쾌락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했다. (...) 히스테릭한 여성의 온갖 본능이 말할 수 없이 난폭하게 터져 나왔다. 그녀의 어머니의 피, 그녀의 혈관을 태우는 아프리카의 피가 여윈 그녀의 육체, 아직도 거의 숫처녀 같은 그녀의 육체 속에 사납게 흘러 맥박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 테레즈 라캥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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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뛰어난 점을 꼽으려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에밀 졸라의 정교한 묘사는 우리를 라캥 부인의 상점으로 안내하며, 그곳의 피와 욕망과 충돌하는 에너지를 지켜보고 있으면 입술이 말라붙는다. 값싼 감동이 오가는 시체 시공장의 풍경과 로랑과 테레즈가 느끼는 죄의식에 대한 묘사는 믿을 수 없는 경지이고, 엔딩 역시 놓쳐선 안 되는 백미.

물론 [테레즈 라캥]은 에밀 졸라가 쓴 가장 훌륭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매혹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에 망설임이 필요하지는 않다. 147년동안 끊임없이 연극, 영화, 오페라로 재창조되고 있는 세기의 걸작, 세기의 문제작 [테레즈 라캥]. 이 음산하고 고요한 피와 욕망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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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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