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플라톤이 보여준 사랑의 향연 [도서]

글 입력 2019.01.07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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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친구가 울며 전화를 했다. 남자친구 때문에 너무 힘들다며 술을 마시자 했다. 기꺼이 응했고, 몇 시간동안 친구의 연애상담을 해줬다. 둘 다 진탕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고 친구는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잘 생각했다고 박수를 쳐줬다. 그리고 며칠 뒤, 친구는 남자친구와 사이좋게 찍은 사진을 나에게 보내줬다. 약간의 허탈함과 어이없음이 교차했지만 익숙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다’ 무기력한 의지를 표방하는 이 말이 연애에 있어서는 쉽게 용납되니깐. 한편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가능할 거 같은 일들을 해내는 사람들도 많이 본다. 엄청난 용기를 내거나, 희생을 치루거나. 그만큼 사랑이란 인간의 이성에 가장 대립되는 듯하며 무어라 정의내리기가 가장 힘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처럼 복잡한 감정에 대해서 하나의 ‘이론’으로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향연」에 등장하는 ‘에로스론’이다. 「향연」은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학자들이 모여 ‘사랑’에 대해서 논하는 토론이 주 내용이다. 플라톤이 전하고자 하는 ‘사랑’의 이야기는 소크라테스를 통해 전달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에로스란


소크라테스는 먼저 ‘에로스의 정의와 성격’을 밝힌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학자들은 그런 에로스의 속성을 밝히거나 찬미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에로스가 신이 아니며, 인간도 아닌 ‘중간자’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에로스란 어떤 것에 대한 에로스다. ‘~에 대한’은 ‘~를 향한’로 취급되며 이는 에로스가 어떤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떤 것을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것을 지향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며 어떤 것을 욕망하는 것은 자신이 그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사랑은 기본적으로 결핍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에로스’ 역시 에로스가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어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사랑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고 에로스가 나쁘고 추한 것은 아니다. 에로스는 아름다움과 추한 것 사이에 있는 ‘중간적인 것’, 즉 중간자인 것이다. 그렇기에 에로스는 신과 인간이 아닌 그 중간에 있는 ‘신령’이다.

또한, 에로스는 좋은 것이 자신에게 늘 있기를 욕망한다. 그러므로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출산’을 한다. ‘출산’은 남녀의 육체적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여 영혼에 있어서도 출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명성과 미덕이 그 결과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운동, 학업, 일, 지혜 등 어떤 것이어도 무언가를 지향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에로스를 지녔기에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즉, 사랑이란 좋은 것이 자신에게 영원히 있기를 욕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아름다움을 향하는 '사다리'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진정한 불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이 ‘사다리’로 비유되는 상승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한다. 에로스가 올바르게 인간을 이끄는 경우, 먼저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모든 육체에 속한 아름다움이 같은 것이라는 걸 파악해야 한다. 이를 파악하면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영혼들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아름다운 행실을 이끌고, 더 나아가 지혜와 지식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한다.

이 과정까지 왔으면 영혼의 아름다움, 즉 미덕을 산출하게 된다. 이로부터 힘을 얻어 결국 불사이며 변하지 않는 ‘앎’(이데아) 그 자체를 직관하게 된다. 이 단계를 거친 인간은 비로소 좋은 것을 소유한 채, 불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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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우)


이렇듯 ‘에로스론’은 완벽한 논리구조를 가지지만 이 개념자체가 가지는 추상성은 완전히 받아들이기 힘들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연모하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알키비아데스’를 등장시킨 것 같다. 알키비아데스는 술에 취한 채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토론을 방해한다. 그는 자신은 사랑받는 자이고 소크라테스는 사랑하는 자인데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적절히 대우하지 않았음에 원망을 모습을 보인다. 밤에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유혹했음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에로스가 지향하는 아름다움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통해 기쁨을 주고 그로부터는 그의 지성, 즉 앎의 아름다움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동으로 금을 얻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알키비아데스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워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과 알키비아데스가 사랑의 상승 과정 중 하위에 있는 몸의 감각들에 함몰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알키비아데스는 진실된 사랑이 아니라 욕망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사랑을 통해 사람은 나아갈 수 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람은 마치 재미있는 영화를 감상할 때처럼 온전히 몰두해 주변의 무엇도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한다. 즉, 어떤 위험이 나타날지 모르는 불안함을 감수하고 사랑에 나를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울고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나. 차라리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어지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사랑이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보게 해준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으로 하여금 인간은 열정을 가지고 용기를 낼 수 있다. 즉, 사랑은 인간을 전환시키고 상승시키는 데 가장 탁월한 촉진제라는 것이다. 이는 기꺼이 사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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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량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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