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중해의 영감>을 읽은 후의 단상들 [도서]

생각에 사로잡히는 매력적인 시간
글 입력 2018.12.23 02:3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지중해의영감-입체표지.jpg
 

지중해의 영감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1



나는 시인들의 다양한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에게 존재하는 인간 이상으로 위대한 것, 즉 인간의 그림자를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108p


‘시적인 문장’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책을 읽으며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 줄의 문장에도 그와 관련된 여러 장면이 풍성하게 펼쳐지는 것이었다. 평소에 즐겨보던 에세이와는 명확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런 문장을 어떻게 쓰지, 이런 걸 보고 듣고 어떻게 이렇게 옮길 생각을 했지 감탄스러웠다. 문장을 짚으면서 읽어나다가 보면 눈앞에 어떤 장면들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눈앞에 머릿속에 펼쳐지는 풍경은 장 그르니에가 직접 본 풍경과 완벽하게 같을 순 없겠지만, 장 그르니에의 문장들에서 어떤 풍경들이 떠올랐다는 것은 확실했다.

책, 그리고 연극 <이방인>을 보고 난 후 알베르 카뮈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당연한 수순인 건지 그의 스승이던 장 그르니에도 자연히 접하게 된다. 장 그르니에는 에세이스트이자 철학가이자 교수이기도 하다. 그가 가진 세 개의 타이틀 모두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그런지 같은 장면을 봐도 이렇게 다르게 바라보고 다르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도 장 그르니에만의 표현과 감수성 그리고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이런 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식견도 내공도 감성도 쌓여있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저렇게 묘사를 해보고 장면 하나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싶었다. 하나의 장면을 보고도 ‘그냥 좋다’가 아니라 그게 왜 좋은지를 알고, 글로 옮겨서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고, 소리마저도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떠오르게 할 수 있고, 그 장면과 관련되어 떠오른 지식들을 자연히 술술 풀어내고, 장면과 지식을 서로 엮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대단한 표현력과 방대한 지식, 남다른 시선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2



우리는 절대로 혼자일 수가 없다. 함께 있을 상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 이렇게 눈만 돌리면 어디서나 어떤 추억이, 아니 어떤 존재가 눈앞에 되살아난다.

73p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 떠오른 영감을 주는 풍경, 장면을 떠올려봤다. 나에게는 아주 신성하게 느껴지고 무언가 충만한 힘을 주는 순간들을 떠올려보니 그것은 바로 사랑의 순간들이었다. 연애할 때의 그것 말고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을 말하고 싶다. 덕분에 나는 어둠 속에서도 순간이나마 빛을 떠올려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을 타고 자랐던 어린 시절은 사랑으로 채워진 시기였다. 사랑을 체감하는 때가 ‘눈물이 날 만큼 따듯함으로 품어주는 것만 같은 순간’이라 한다면 더더욱 두 분을 떠올리게 된다. 두 분의 한없는 사랑을 느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항상 낮잠을 자던 아주 평화로운 시간, 그 시간의 장면이 떠오른다. 시야 안으로 오후 3시에서 4시쯤의 볕이 한가득 쏟아지듯이 드리웠던 기억이 있다.

하얀 볕. 무더운 한 여름의 낮이었다. 배탈이 나서 끙끙 앓다가 겨우 잠에 들었다. 날이 덥다 보니 배탈이고 뭐고 문가에 누워 그냥 이불을 걷어차고 잠에 들었던 것 같다. 배가 시린 줄도 모르고 잠든 손주의 배를 살살 문질러주시던, 땀이 난 이마에 연신 부채질을 해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문 밖에서 쏟아지는 햇빛은 하얗게 느껴질 정도로 눈부셨는데 살랑살랑 정성스럽게 불어오는 그 바람이, 할아버지의 투박하지만 다정한 손길이 좋았다. 잠에서 깼는데도 그냥 눈을 꼭 감고, 행복한 상태로 다시 잠들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것도 같다.

주홍색의 볕, 맞벌이를 하시는 엄마 아빠가 집에 계시지 않던 날엔 늘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가 집에 와 계신 게 너무너무 신나서 하굣길에도 뛰어서 집에 들어갔던 일이 떠오른다. 도착해서 ‘우리 강아지 왔나’ 외치는 할머니의 품에 푹 안기면 그만큼 행복한 일이 없었다. 할머니랑 이것저것 얘기를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거실에 누워 낮잠을 자는데, 할머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면서, 할머니의 숨소리에 맞춰 나도 숨을 쉬다 보면 저절로 잠이 들었다. 그 사람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 사람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숨소리와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눈물겹게 감동적이고 감사한 일이었다. 잠에서 깨 비몽사몽 주변을 돌아보고 있을 때에도 나는 그 풍성한 햇볕과 작은 소리 따듯한 온도에서 오는 행복감을 놓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의 평화로운 행복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오후 3시, 4시만 되면 몸이 노곤히 풀리면서 졸음이 몰려온다. 바쁘게 살다가도 시간 여유가 있어 낮잠을 자게 되면, 그리고 부스스 일어나면 그때와 다를 바 없는 평화로운 빛을 만나게 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 모두 지금은 가족들의 곁을 떠나셨지만, 모든 가족들에게 그런 따듯한 사랑의 순간을 듬뿍 주고 가셨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시절이 떠오를 때에는 항상 마음이 힘들고 지칠 때인데, 햇볕이 시야 안 가득했던 그 순간이 있었기에 나는 매일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그 순간을 양분 삼아 나는 늘 새로운 힘을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다. 내 안에 그 순간이 기억되는 한, 두 분은 항상 내 곁에 계신 것이다. 나는 두 분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따듯한 빛과 사랑 안에서.



3



사람들은 …… 자책한다. 하지만 낙오자가 아닌 한 오직 자신만을 탓할 뿐이다. 말이야 뭐라고 하든, 따지고 보면 인간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항상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102p


책을 천천히 음미하듯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문득 떠오르는 장면들 덕분에 옛 사진도 찾아보고, 옛 사진 속 장면에서 떠오른 기억들을 더듬더듬 좇기도 했다. 행복한 기억이든 슬픈 기억이든 불현듯 떠오른 장면을 왠지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잡고만 싶어서 읽는 데 꽤 오래 걸렸다. 하지만 책 한 권을 이토록 오랫동안 진득하게 붙잡고 있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영감이 되고 자양분이 되는 순간을 찾아 남길 수 있어 다행이다. 영원히 잊지 않을 나의 장면들이지만 혹시 내가 그 기억을 잊게 되면 이 글을 통해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의 기억의 실마리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지중해의영감.jpg





지중해의 영감
- INSPIRATIONS MÉDITERRANÉENNES -


지은이
장 그르니에

옮긴이
김화영

출판사
이른비

분야
에세이

규격
145*205mm
반양장

쪽 수
240쪽

발행일
2018년 6월 30일

정가
15,000원

ISBN
979-11-955523-7-5 (03860)


[심지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