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른들의 위선과 폭력으로 물든 학교 <수레바퀴 아래서>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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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서 학생으로 살아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다. 누군가 내게 학창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겠다. 학창시절, 특히 고등학교 시절은 내가 가장 열심히 살았던 때이자, 동시에 절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들었던 때이다.
나는 반에서 한 명쯤 있을 법한 학생이었다. 공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지만, 성적은 잘 나오지 않는 그런 학생. 그때의 나는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무리 힘들고 좌절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다. 내 노력의 끝에는 반드시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노력했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 두 번째는 실패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다. 이 두 가지 이유로 내가 가장 열심히 공부했었고, 내가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어른들이 내게 준 선택지는 단 두 개뿐이었다. 성공 아니면 실패. 성공하지 않는다면 그건 바로 실패를 의미했고, 실패자가 되었다.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경쟁은 불가피했고, 자기 자신조차 이겨야 하는 극한의 경쟁을 해야 했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열등감에 빠져 심연 아래로 점점 가라앉았다. 그래도 노력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근거로 나는 계속 힘든 시간을 버텼다.
수능이 끝나고 남들이 말하는 ‘실패’를 경험했다. 원하는 대학은커녕 점수에 맞춰서 대학에 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내가 믿고 있던 ‘노력=성공’이라는 공식이 깨졌다. 그제서야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했어야 할까’, ‘공부보다 의미 있는 게 있었을 텐데.’라며 지난날을 후회했다.
선생님들은 노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왜 공부가 전부라고 말했을까? 남을 이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괜찮은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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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는 어른들의 정서적 폭력과 개성을 지우는 교육으로 희생당한 학생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성실하고 총명한 한스 기벨라트가 신학교에 합격한 후, 엄격한 신학교 생활과 권위적인 선생님들에 적응하지 못해 떠난 후 공장일을 배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들과 술을 먹은 후 물에 빠져 익사하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수재라 촉망받던 한스 기벨라트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 특히 지역 목사님과 교장 선생님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한스가 공부 이외의 딴짓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신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전부터 예민한 한스에게 어른들은 반드시 합격할 거라고 단언한다. 한스는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어른들에게 시험에 떨어질 거란 말을 했을 때 목사님은 “그런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야.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라.”라고, 아버지는 바보 같은 소리라며 한스를 나무랐다. 어른들의 반응에서 이미 한스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구둣방 플라이크 아저씨는 다른 어른들과 달랐다. '시험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뛰어난 학생도 시험에 떨어질 수 있으니, 만약 그렇게 된다 해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며 한스에게 조언했다. 그러나 한스는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만약, 한스가 이 말을 귀담아 들었다면, 어른들 모두가 이런 말을 해주었더라면, 아니면 선생님이라도 이 말을 해줬더라면 한스는 물에 빠져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씁쓸했던 부분이다.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해줬더라면 학창시절이 어둡지만은 않았을 텐데.
한편, 시험에 합격하고 여유를 즐기던 한스에게 목사님은 신학교에서 뒤떨어지지 않도록 미리 공부를 시켰다.
“한스야, 가끔 있는 일인데, 어떤 학생은 시험을 잘 치른 뒤 성적이 뚝 떨어지기도 한단다. 신학교에서는 배워야 할 과목이 많아서 미리 공부해 두는 학생들도 많다는구나. 특히 성적이 좋지 않았던 학생들이 그렇대. 어느 날 그 학생들이 우수한 성적에 자만하여 편안하게 지낸 학생들을 앞서 버리는 거야.
너는 여기에서 언제나 1등이었지. 하지만 신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하나같이 똑똑하고 성실한 아이들일 거야. 그들을 쉽게 앞설 수는 없을 거다. 내 말 잘 알아듣겠지?”
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면서 말이다. 나도 자주 들었던 말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면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심지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으로 넘어가는 시기에도 어른들은 성적이 떨어질 거라면서, 뒤처진다면서 겁을 준다. 그러면 학생들은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쉬지도 못한 채 공부에 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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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에서 사귄 하일너는 한스와 성향이 전혀 달랐다. 성실하고 순종적인 한스와 달리 하일너는 감성적이고, 반항적이었다. 진취적인 하일너의 영향을 받아 한스는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더는 공부에 매달리지 않게 되고, 학교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둘은 계속 어울렸다. 하지만, 둘의 우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선생님들은 자기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 열 명의 보통 학생들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선생님의 역할은 빗나간 학생들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와 수학을 잘하는 성실한 인간을 키워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처럼 학교에서는 해마다 규칙과 자유의 충돌이 되풀이된다. 국가와 학교는 천재적인 학생을 억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지만 선생님들에게 미움을 받고 학교에서 쫓겨난 천재들이 훗날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훌륭한 인물이 되기도 한다.”
어른들은 대드는 천재 한 명보다 말 잘 듣는 보통의 학생 10명을 원한다. 아무 비판 없이 자기 말대로 움직여, 그들의 자리가 위협받지 않게 말이다. 학교에서는 하일너와 한스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하일너는 눈엣가시였는데, 그가 어른들에게 대들고 그들의 위선을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하일러의 천재성을 억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결국 하일너가 학교를 떠나게 된다. 하일너는 자신을 옥죄는 학교를 뛰쳐나가고, 한스는 이제는 성실하고 모범생이 아닌, 선생님들의 눈 밖에 난 학생이 되어있었다. 한스는 결국, 신경쇠약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하일너가 학교를 떠나고 방황하는 한스에게 선생님은 그를 위로는커녕 일종의 경고를 한다.
“기운이 빠져서는 안돼. 그렇게 되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고 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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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떠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있는 고향으로 내려온다. 어린 시절이 지나 이제는 자신의 수레바퀴를 짊어져야 할 때이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지어준 학생이라는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도 견습공이라는 타인이 지어준 수레바퀴를 짊어지게 되었다. 수레바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걷다가 결국 물에 빠져 죽는다. 한스는 자신을 옥죄는 수레바퀴에 깔려 죽고, 죽음으로써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스의 죽음에 누구의 책임이 있을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겨내지 못한 한스의 연약함을 탓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스를 헤아리지 못하고 성적, 공부로 억압한 어른들을 탓해야 할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린 한스를 자신들의 뜻대로 하려는 어른들의 책임에 한 표를 던지지만, 이 사회에서는 한스에게 책임을 돌렸을 거다. 왜 반항하지 않았느냐, 왜 학교를 박차고 나오지 않느냐 라며 책임을 회피한다. 소설 속에서도 어른들은 죽음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단지, 똑똑한 학생의 미래를 안타까워 하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어른들의 평가는 위선적이라는 게 드러난다. 그들은 한스에게서 공부 이외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저기 저 사람들을 보세요. 저 사람들도 한스의 불행을 거든 셈입니다.”
…(중략) …
“저는 다만 학교 선생님들에 대해 말했을 뿐이에요.”
이 상황이 20세기 초 독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상황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학교에서 어른들의 정서적 폭력과 권위를 내세움으로 학생들은 희생되고 있다. 아직까지도 어른들의 폭력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오지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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