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섭식장애 이야기] 뭔가, 약간, 어쩐지 모를 그런 느낌

발표를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나요?
글 입력 2018.12.18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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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내 글은 뭔가 영혼이 없는 느낌이다.
이렇게 애매한 말로 평을 내리기에도 너무 영혼이 없는 것 아닌가 싶기는 하다.
나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기 싫어서 그런가, 또 그렇게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가 예상치 못한 것들이 잔뜩 숨어있어 반격을 받을까 봐 두려워서 방어 태세를 취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만 나를 끝까지 파헤쳐 들어갔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으니 모든 걸 표면적으로만 처리해내는 것만 같다.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시작한 글쓰기이고, 상처를 치유하고자 시작한 글쓰기인데 글을 쓰면서도 내가 얼마나 스스로 벽을 치고 있는지가 느껴진다.

그래, 이 글까지만이야. 다음 글부터는 조금 더 진도를 나가보자고. 약한 척하는 것도 이것까지만.

전공 팀플을 하는데, 팀원들이 말하는 중간중간 '약간'이라거나 '느낌', '같달까?'라는 애매한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말하는 습관인가, 뭔가 있어 보이려고 일부러 말투를 만든 건가 싶었는데 그 애매한 용어를 의식하고 나니 나중에 남자친구랑 전화할 때도 '약간'과 '느낌'이 많이 들렸다. 현대 사회의 불안감과 자신이 내는 의견에 자신감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말을 꾸며내는 말투의 문제일까. 그렇게 22시간 동안 팀플을 하다 보니, 결국은 '약간'을 나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이 유행하는 말투에 탑승하여 요즘은 나도 약간 나를 모르겠다.
아니 그건 약간 한번 사용해보고 싶어서 괜히 애매한 척하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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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中 -


상담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학교 상담센터에 꽂힌 책 한 권을 살펴보았다.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읽지는 못했는데 앞부분만 보고도 너무 공감했다. 해외 봉사활동을 가는 학생들에게 2주 전에 준비가 되었냐고 묻자, 학생들은 다이어트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가 덜 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믿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대답에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옛날 같았으면 나도 그랬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분명 '영어공부를 덜 해서'라거나,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저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번 놀란 뒤 까먹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나는 언니가 우유를 먹고 토할 때도, 치킨을 혼자 몰래 시켜먹고 토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도 한번 놀라고 곧바로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를 알아차렸을 때 나는 요가 수업 실기 시험을 위해, 교양 수업 발표를 위해서, 전공 수업 발표를 위해, 아니 그냥 길거리를 걸어 다니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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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시험은 체육관에서 교수님과 많은 학생이 다 쳐다보는 가운데서 교수님이 가르쳐주신 동작이나 그를 응용한 동작을 30초 동안 시범을 보인다. 옆에서는 조교가 동영상을 찍는다.

그 짧은 30초 동안의 실기 시험을 위해서, 다이어트를 했다. 하루에 순 탄수화물을 150g, 단백질을 75g과 100g으로 제한했다. 다이어트는 정말 쉽다. 운동을 따로 하지 않아도 먹는 것만 조절하면 살은 금방 빠진다. 뱃살이 두둑이 접히는 상태였어도 일주일만 식단을 지키면 금방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은 정말 특출난 체형이 아니라면 먹는 그대로 만들어지며, 먹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기 시험을 위해 3만 원이 넘는 요가 크롭탑을 구매했다. 크롭탑이라서 배꼽이 보이는 옷이었다. 열 벌이 넘는 가지각색의 레깅스 중에서 요가 탑과 매치했을 때 나의 허리와 골반 선이 가장 잘 보일만 한 레깅스 하나를 골라 입고 혼자서 집에서 30분간의 패션쇼와 눈바디를 마친 후 요가 시험장으로 갔다. 그리고 나의 차례가 되었을 때 허리가 가장 얇아 보일 수 있는 실기 자세를 취한다. 뱃살과 몸을 신경 쓰느라 내가 무슨 설명을 하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허무한 30초가 지나고 옷을 챙겨입고 집으로 돌아와서 샐러드를 먹는다. 후련함이나 뿌듯함, 시험을 끝냈다는 안도감은 없다. 나의 몸이 여전히 날씬한지를 검열하기 바쁘다. 삶이 굴러가는 방식이 전부 몸매, 뱃살, 허벅지살, 라인 위주다. '지겨운' 눈바디라고 했지만 절대 지겹지 않다. 날씬한 나의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은 가장 큰 재미이며, 흥미로운 실험이며 완벽한 보람이다.

이제는 정상적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며, 요가 시험을 치르는지를 모르겠다. 누군가 나에게 말해준다면 나는 정말 놀랄 것 같다. 아하,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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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학교 포토갤러리


그 날은 교양 팀플이 있어 무대에 서는 날이었다. 우리학교는 연영과로 유명한 학교답게 전교생이 들어야 하는 필수교양에 ACT라는 연기 수업이 있어, 대본을 짜고 연기를 해야 한다.

우리팀은 오셀로를 각색해서 친구에게 이간질을 지속적으로 당해, 결국 여자친구를 죽이게 되는 극을 만만들었다. 나는 그 중에서 죽는 여자친구역을 맡았다. 처음에 주인공에게 반해서 주인공이 좋아하는 음료수를 자꾸만 건네주고, 과제때문에 바쁜 것을 주인공이 이해하지 못해서 자꾸만 의심하는 전개였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대사를 까먹는 것도 아니었고 준비한 물품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무대가 두려웠던 것도 아니었으며 긴장해서 버벅거릴까봐, 발연기로 보일까봐 걱정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툭 튀어나온 뱃살과 뚱뚱한 다리로 음료수를 건네기 위해 무대 양옆을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무대가 쿵쿵 거리면서 울리면 어쩌지?

그래서 다이어트를 했다. 마감 기한이라 밤을 며칠째 새는데도 샐러드를 먹었다. 식사 간격을 4시간으로 유지하다보면 중간에 당이 떨어지고 배가 고파지는데, 그럴 때면 물을 마셨다. 나트륨이 너무 부족했는지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도 그만큼 절실했다.

그냥 특정한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자기만족이지, 안 그래?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고 해도 나는 식단 조절과 운동을 할 거야. 라는 헛소리를 지껄이곤 하지.

15분에서 20분 사이의 연기가 끝나고, 팀원들은 우리보고 실전에 강하다며 칭찬을 했다. 어느 부분에서 손이 떨렸다던지 그런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인공을 맡았던 아이는 내가 음료수를 건네줄 때 손이 떨려서 자기도 긴장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전혀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떨었던 이유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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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옆에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을 때는 무작정 걸어 다녔는데, 요즘은 마지막으로 걸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제대로 나지가 않는다.

고향의 바다가 그리우면 한강을 따라 걷고, 남북을 가로지르는 한강대교를 건너서 노들섬에 잠시 앉아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노들섬에는 낚시하는 사람이 종종 보인다. 그럴 때면 아빠가 했던 말이 잠시 떠오른다. 아빠는 강태공처럼 낚시란 것은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낚는 거라고 멋있는 척을 했지만, 물고기를 단 한 마리도 낚지 못해서 하는 변명이었다.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그 일에 애착을 갖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취미'라고 하는구나.

학창 시절 때부터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독서'라고 적고는 했는데 나에게 독서가 취미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요즘도 시간이 비면 아니, 시간을 내서라도 책을 읽는데, 남들은 그것을 취미 생활이라고 하는구나, 하고 새롭게 느낄 때가 많다. 나는 무언가 나의 중대한 문제점과 결핍된 부분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데, 그것을 취미라고 가볍게 말해도 괜찮은가. 하는 남들은 전혀 궁금해하지도 않을 혼자만의 취미에 대해 고찰을 한다.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그때의 나로, 그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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