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공포를 느끼기 위해 놀이기구를 탄다. 공포감이 뇌하수체를 자극하여 아드레날린이나 도파민이 분비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착각을 통해 조작된 공포가 인체의 자기방어기제를 통해 곧 쾌락으로 바뀐다는 점을 공략한 것이다. 그렇다면 놀이기구의 어떤 점이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유발하는 걸까?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발이 땅에서 떨어질 때 가장 큰 공포감을 느낀다.
가령 자이로드롭을 탈 때, 아직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나는 단지 발이 공중에서 흐느적대고 있는 사실만으로 공포를 느끼곤 한다. 가장 높은 데에서 멈추어 있을 때, 내려갈 듯 말 듯 조금씩 속도를 가속할 때, 빠른 속도로 하강할 때 모두가 긴장감을 유발하는 요소들이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의 공포감이 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강아지를 비롯한 반려 동물을 품에 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을 품에 껴 안고 다니는 것을 즐기는 주인과 달리 동물들은 안기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그들은 달리기에 적합한 동물들로 외부의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되려 공격하기보다는 도망을 빨리 갈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의식보다는 본능에 의지하는 그들에게 외부는 항상 위험이 잠재되어 있는 곳이고, 그렇기에 그들은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안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그들을 안아 들어 올린다는 것은 그러한 ‘도망가려는 본능’을 억지로 막아 두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도망갈 수 있는 세계에서 억지로 분리되는 것. 바로 이 점에서 공포는 발생한다.

땅은 예로부터 어머니로 비유될 만큼 우리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 위에서 인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세계를 구성하는 3요소인 물, 흙, 공기 중에서 주체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멈춰 있어도 멀쩡히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흙 위 뿐이다. 물 속에서는 숨을 쉴 수 없고 공기 중에선 끊임없이 날개를 움직여야 한다. 즉 땅에서만 모든 존재가 비로소 자유 의지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자유 의지를 통해 자신의 이기심을 최대한으로 충족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기심은 대체로 보다 안정적인 생명이자 삶을 보전하기 위한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땅은 어느 방향으로든 뻗어 있고 어떠한 공간 과도 연결되어 있다. 곧 땅이란 늘 돌파구를 포함하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발만 땅에 붙어 있다면 우리에겐 거대한 땅 위에서 안전한 공간으로 도망 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땅에서 태어난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본능이다. 의자에 앉을 때 높이가 높아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때 느끼는 사소한 불안함조차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땅은 우리의 도피처이고 안식처이다. 정확히 말하면 도망칠 곳이 존재하기에 안심할 수 있는 세계이다. 의지할 수 있는 안전 지대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기에 도망갈 수 있는 세계에서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은 더 큰 공포로 다가온다. 명주잠자리의 유충 개미 귀신은 모래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 속에서 개미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된다. 그가 개미를 먹기 위해 만드는 개미 지옥은 끊임없이 무너지는 모래 무더기로 그 위에 서 있는 객체는 발이 땅에 닿아 있음에도 결코 도망갈 수 없다.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는 모래 사이 발이 그 속에 잠겨 들어가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봉쇄해 버리기 때문이다. 걷는다는 것은 땅을 기반으로 한 가장 일상적인 행위임에도 이 위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의지하던 세계에게 갉아 먹힘을 인지한 객체는 공포감을 느끼지만, 오히려 포기하지는 않는다.
지금껏 당연히 의지해 왔던 세계의 전제가 무너질 리 없다는 희망을 가지기 때문이다. 계속 이 땅 위에서 걷는다면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개미는 전진한다. 그러다가 결국 점점 더 깊이 잠식되어 개미 귀신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공포는 그것을 관조하는 관찰자에게 찾아온다. 그 속의 주체는 발이 땅에 붙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심하게 되기에 그것이 도망칠 수 없는 세계라는 걸 끝까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발생한 주체의 희망 앞에서 관찰자는 무력해진다. 그의 생명을 건 발버둥이 결국 먹힘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진정한 공포의 순간이다.
발이 땅에 닿음에도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은 무너지는 세계와 마주하는 일이다. 사는 게 개미지옥 같다는 말. 우리가 그 말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간접적인 공포는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개미지옥 알아요?여기서 사는 게 꼭 그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