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실현으로 떠나는 길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이성과 감성, 이분법적 구조의 아름다운 묘사
글 입력 2018.10.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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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앞서서, 나는 나의 느낀 감정에 대해 굉장히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글로써 표현하는 솜씨는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여러 미사여구와 추상적인 말들로 인해 도저히 뭘 표현하려하는지 알수가 없을 때가 많다. 다만, 읽은 작품에 대해 느낀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있기에는 아까워 미숙한 실력임에도 몇자 적어본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다. 일찍이 데미안이라는 유명한 작품을 통해 그에대해 조금이나마 알게되었다. 그렇기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작품 또한 어떤 인상을 남길 지 굉장히 기대 되었다.


헤르만 헤세 본인이 수도원에서 생도로 지냈던 경험이 있던 이유였을까, 수도원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처음 만난 공간이자 그들의 인생,깨달음에 끊임없는 영향을 주는 장소이다. 희랍어에 통달한 나르치스와 그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는 골드문트는 서로에게 끌린다. 각자는 대중안에서도 고독한 존재였기에 서로에게 운명과 같이 사랑을 느꼈고, 그 사랑은 아주 천천히 탐색의 과정을 거쳐, 골드문트의 한 사건을 통해서 마침내 꽃피게 된다.


이러한 둘의 사랑에서 시작되는 전체적 내용을 작가는 계속해서 이분법적 구조로 설명한다.


사실 놀라웠던 부분은, 헤세가 표현한 사랑의 방식에서의 인물들은 각자가 아주 반대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다. 이전에 철학수업을 들으면서 있음과 없음의 상호 관계성에 대해 배운적이 있다. 있음은 없음을 낳고, 없음은 곧 있음을 낳는다.  다시말하자면 있기에 없으며 없기에 있다. 이러한 철학적 요소를 헤세는 그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두 인물으로써 시작되는 이 이분법은 아버지와 어머니, 소년과 소녀, 학문과 예술, 정신적 수양과 행동으로서 알게되는 인간의 모습 등으로 나뉘어 진다. 이러한 나눔은 언뜻보면 아주 다른 두가지, 대립되고 상반되는 두가지이지만 결국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있듯-이성과 감성이 같이있듯 서로가 같이 있어야하는 상호 작용의 관계이다.


이러한 상호작용-합의 관계는 골드문트와 나르치스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있다.



사랑하는 친구여, 우리 둘은 태양과 달이며 바다와 육지다. 우리의 목표는 서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보고 존경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 나르치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와의 다름을 자신의 망각으로 인해 인정하지 못하며, 나르치스가 끊임없이 말하는 '다름'에 대해 분노조차 느낀다. 그에게 나르치스는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기에 일종의 되고싶은 존재이며, 아버지로써 어머니를 억눌렀던 그 시기때문에 자신이 나르치스와같은 사상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바로 그 당사자로부터 부정을 받는다.(이때의 부정은 존재에 대한 부정이 아닌 이성, 아버지 등으로써의 부정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과정 중, 거의 최초이자 마지막인 대립이 바로 이 장면이다.


나르치스는 어쩌면 골드문트 그 자신보다도 골드문트에 대해 잘 알고있었기에 자신을 성장시켜줄 친우가 타고나지 않은 길을 갈려고 함으로써 자신을 버림에 대해 안타까워했고, 나름의 충격요법으로 어머니의 존재를 일깨워 그의 내면을 끄집어낸다. 결국 이는 골드문트가 여러 해 방랑생활을 거치며 자신을 찾는 시초가 된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되새기고, 어머니의 모습을 완성시키려 노력하며 결국 리제라는 집시여인에게 강하게 끌려 방랑을 시작한다. 여성들과의 사랑, 향락으로 이어지는 유랑생활은 그로 하여금 어머니에대한 확장-끝내는 골드문트 그만의 어머니만이 아닌, 이 세상의 어머니 이브의 모습까지 깨닫고-마침내 예술에 불을 지피게 된다.


어머니로 시작되어 어머니로 끝나게되는 골드문트의 생애는 곧 예술,감성,환상등을 뜻한다.  그는 어머니를 찾고, 부름에 응답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내면을 성장해 나간다. 이 과정에는 나르치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게 설정된다. 어머니를 잊었기에 자신의 본질을 잊었던 그를 나르치스가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로 인해 일종의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나르치스는 계속해서 골드문트가 그의 곁에 있을때나, 없을때나 도움을 준다. 성요한으로 현신하여 그의 작품으로 나타나고 절체절명의 위기속 그를 죽음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이만 본다면 마치 나르치스는 친구가 아닌 골드문트의 구원자와 같이 보인다. 하지만 골드문트 또한 나르치스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었으니, 그가 없을때 골드문트를 생각했던 나르치스는 다름을 생각하며 자신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간 한편 유랑생활에서 돌아온 골드문트의 예술을 보며 자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것이라 생각했던 감성,예술,어머니의 세계를 점차 알아가게 된다. 나르치스에게 골드문트는 마치 메마른 대지의 오아시스처럼, 진공속의 한모금 공기처럼 유일하고도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다시금 골드문트는 떠난다. 예술을 마치고 그 작품을 떠나보낸뒤의 공허함에 몸서리치게 두려워하며, 또다시 여인의 사랑을 받으러- 대지의 어머니 이브를 찾으러 떠난다. 나르치스 또한 하나님에게 종인 자신이 골드문트에게 너무나도 집착하고 있음을 스스로 개탄하며 골트문트를 떠나 보낸다.


그렇게 떠난 골드문트는 어느날 떠났을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귀향한다. 그리고는. 문병을 온 나르치스에게 최후의 말을 한다.



나르치스, 정말 어머니 없이는 죽을 수 없다네. 나를 다시 받아들여 무(無) 속으로, 순수함 속으로 다시 이끄는 것은 낫을 든 죽음이 아니라 나의 어머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네. 어머니가 없는 그대는 어떻게 죽음으로 가는가. - 골드문트



사실 이 마지막 문장은 아주 다양하게 해석되어있다. 위의 문장은 다양한 해석을 합친 내용이다. 결국 이 모든 해석이 뜻을 내포하고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여성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상징되는 일탈은 나르치스로 상징되는 이성과 질서와 합쳐져 결국 골드문트의 자아실현을 이뤄준다. 예술로써의 자아실현을 이룰수록 그는 어떠한 상실감, 무기력함을 느꼈고 그는 결국 자신의 목표가 죽음과 자아실현이기에 그 끝에는 죽음이 남아있다는것을 알게된다. 결국 어머니가 있기에 그는 죽음으로써 갈 수 있었다.


골드문트를 보며,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가 떠올랐다.


예술에 대해 끊임없는 갈구를 느끼며 결국 모든것을 벗어던지고 떠난 그는  죽음과함께 그의 예술을 마치고 속세를 떠난다. 타히티의 폴 고갱을 모티브로 그렸다는 스트릭랜드는 얼마나 고귀하게 그의 마지막을 불살랐는가, 골드문트 또한 자아실현과 함께 어머니의 부름에 응답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인간이 사는 이유에 대해 아주 어릴적부터 고민해왔다. 너무나도 큰 질문, 말로 표현할수 없는 형이상학적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기에 한번도 명확히 답을 내린적이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스트릭랜드, 연금술사와 같이 자신을 다바쳐 무엇가를 이룰려는 인물들을 보면 자아실현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은 납득할 수 있을것 같다.



[김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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