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지는 별] 01. 꽃의 아름다움은 보임이 아닌 피어남에 있다

글 입력 2018.10.20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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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철학자 홉스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기적이어서 모이면 혼란을 만들 뿐이라고 주장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서로 계약을 맺고 나라라는 조합체를 만든다. 인간은 그렇게 서로 간의 권력 관계에 종속된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이기심이 계약을 맺었다고 쉽게 없어질리가 없다. 그것은 어느 정도 통제될 뿐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표출될 수 있다. 아무리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 권력 관계라 해도 부조리를 내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은 누구에게나 달콤하다. 아무리 시대가 진보해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며 보호 수단인 권력을 지키고 싶어 한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선택한 방법은 잣대를 만들고 그에 어긋나는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그 기준은 다양했다. 성별, 성적 취향, 피부색, 신체 기능, 외모, 배움의 정도‥. 그렇게 누군가는 올라섰고 누군가는 끌어내려졌다. 수많은 사람이 가려졌다.



다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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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대가 진보하는 과정에서 권력 관계는 수없이 흔들렸다. 자아가 존재함을 깨달은 사람들의 불길은 사그라질 수 없었다. 손쉽게 사라졌던 이름들은 다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불편하고 거친 과정이 반복되어도, 비난을 들어도, 심지어 누군가가 다쳐도 멈출 수 없었다. 다시, 투쟁이었다. 계약이라는 덫에 걸려 이기심조차 발휘할 수 없었던 자들은 그들이 주체가 되는 투쟁을 통해 자아를 극복하고자 했고, 자기 자신으로서 빛을 내길 원했다.

그중 여성으로서 가려졌던 역사와 투쟁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가장 뜨거운 이슈이자 담론으로 기능한다. 누군가는 인류 최초의 불평등이 성차별이라고 했다.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다른 기준들을 초월하고 인류를 가르는 첫 번째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 자체가 차별의 시작이라는 흥미로운 논의도 있다. 이 세상은 이미 남성 중심으로 짜였다는 것이다. 최초의 불평등을 타파한다는 원대한 목표 아래 오늘도 수많은 여성은 투쟁하고 있다.

투쟁의 시대에서 요구되는 것 중 하나는 타인의 편의에 의해 기술되었던 여성의 역사를 여성의 주체성을 전제한 채로 다시 기록하는 것이다. 수 천 년의 차별의 역사를 거치며 여성은 철저히 지워졌고 가려졌다. 한국 사회 평범한 여성의 인생사를 죽 나열하며 역사서 못지않은 하이퍼리얼리즘을 보여준 <82년생 김지영>이 그토록 많은 주목을 받은 이유를 생각해본다. 또 한 명의 김지영으로서, 스스로가 중심이 되지 못해 유독 사랑하기 어려웠던 나의 역사를 온전히 나 자신의 관점으로 다시 써보려고 한다.



1. 여자는 힘이 세다


호주제가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지 얼마 안 된 때였을 것이다. 지금처럼은 아니더라도 여성주의 논의는 힘껏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학교 도서관이나 집에 있는 작은 서재에 놓인 책들을 자주 읽곤 했는데, 가장 나의 눈길을 끌던 것은 단연 여성에 관한 책이었다. 공주가 되어 왕자님을 만나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이상향으로 제시하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결말이 왠지 성에 차지 않았을 때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들은 남다른 쾌감을 선사해주었다. 호주제 폐지라는 당시의 이슈와 맞물려 여성주의 도서는 다양한 형태와 주장을 담은 채 출간되었고, 그중 제도 안에 숨겨진 성차별을 고발하는 어린이용 권장도서를 읽은 나는 일상 속의 사소한 것에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애교가 없어 ‘여자답지 않다’는 어른들의 말, 명절에 여자 식구들만 작은 상에서 식사하는 것, 주민등록번호와 출석번호가 남자보다 뒷자리인 것 등 이유도 모른 채 기분이 나빴던 것들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차별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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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꿈을 멋지게 펼쳐낸 그들의 이야기는
왕자님이 등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2. 여자는 만들어진다


그러나 불편을 주장했던 나의 목소리는 번번이 제지당했다. 태어나서 인터넷에 처음 남긴 글이었을까. 항상 여성이 두 번째가 되는 것에 대한 의문을 글로 썼고, 엄청난 악플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단시간에 많은 욕을 들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이후로도 사회는 계속 내가 틀렸다고 했고, 저항의 대가에 트라우마를 경험한 나는 점차 사회의 정답지에 맞춰가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삶을 편하게 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줬고, ‘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하니까 정말 불편한 것이 없었다. 그 이유를 지금 생각해보면 자아의 성립 자체를 체념했기 때문인 것 같다. 순백의 여성상을 좇으며 나는 나를 열심히 지웠다. 그때 한 명이라도 나의 의문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때의 나는 조금 더 당당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춘기를 맞으며 자아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샘솟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나는 다른 방법으로 자아를 나타냈는데, 바로 ‘남자가 되는 것’이었다. 또래 남자아이들의 취미, 행동, 말투를 그대로 따라 했고 거칠고 성긴 마초성을 추구했다. ‘남자다운’ 것이 우월하고, ‘여자다운’ 것이 열등하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었으나 그들과 동등해지고 싶은 본능적 욕구 역시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3. 트라우마의 연대


남성 중심적 환상에서 일순간에 깨게 된 계기는, 한국 사회에서도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던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었다. 사실 201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점화되기 시작한 여성주의 논의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강남역 살인사건의 충격은 보다 급진적으로 방향을 틀게 만든 전환점이 되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특정다수 집단에 공격을 받았던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가 재생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이제는 공감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나의 트라우마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2등 시민'의 아픔이 모인 광장에서 그동안 기록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던 나의 역사는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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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 지난 지금 수많은 투쟁과 연대 가운데 여성주의 논의는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고, 나는 여성으로서 이 시대에 서서 지난 삶을 나만의 관점으로 기술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 아직 과정 중에 있는 투쟁이나, 십 수년 전 놀란 마음으로 글을 지워야 했던 어릴 적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이야기를 함에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는 것은 참으로 감개무량한 변화인 것이다. 필사적으로 가려졌던 나의 작은 의문들은 이제 하나의 현상이 되어 토론장의 중심으로 담대히 전진한다.



가려진 꽃의 가치


가려진 채 태어나, 진실을 가리는 사회에서 스스로 가려지기를 자처했고 이제는 가려지기를 당당히 거부하기에 도달했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고 하는데, 여성은 권력 관계의 강압에 의해 패배자가 되어 역사에서 쉽게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 여성은 자신이 살아온 역사를 직면하고 훑어낼 수 있는 시선을 쟁취함은 물론이며 공동체 내에서 그것을 마음 깊이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불평등이 성별 불평등이듯 최후의 불평등도 그러하다면, 여성은 가장 멋진 승리자로 역사에 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것에 이름을 붙이면 나에게로 와 꽃이 된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에 등장하는 비유를 좋아한다. 이 에세이를 계획하는 데에도 큰 영감이 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꽃은 동시에 여성의 수동성에 비유되는 여성 혐오적 상징이기도 하기에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나는 관상용이 아닌 피어나는 꽃의 역동성에 주목하고 싶다. 꽃이 피어나는 과정은 예쁘지만은 않다. 아무런 방어막이 없는 상태에서 거센 바람과 빗물을 고이 감내해야 하고 거친 흙 속에 힘껏 뿌리를 뻗쳐야 한다. 여성이 꽃이라면 그것은 전시되기만 하면 되는 화훼가 아닌 수많은 권력의 장애물에도 아름답게 만개하며 저마다의 의미를 갖게 된, '흔들리며 피는 꽃'에 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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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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