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독서의 계절, 아니 필사의 계절이 왔다. 많은 사람들이 글을 잘 쓰고 싶어서 혹은 좋은 문장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필사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필사에는 더 큰 매력이 있다. 아마 어떤 이유에서든 필사를 해 본 사람들은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바로 문장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음미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냥 독서가 차를 타고 풍경을 스쳐 지나가는 여행이라면, 필사는 그 사이를 거니는 여행이다. 조금 다리가 아프고 오래 걸리지만 그때 나를 둘러싼 풍경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함으로 남는다. 익숙한 문장이 낯설게 느껴지고, 보이지 않았던 색이 선명하게 피어나는 경험. 그 경험을 도와줄 책 4권을 소개한다.
1. 채식주의자, 한강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들었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 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있었다.
- 한강, '채식주의자' 중
2. 쇼코의 미소, 최은영

2013년 젊은 작가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7편의 중/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으로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감정과 생각들을 볼 수 있다. 젊은 감각과 다정하고 부드러운 문체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특히 장편을 끝까지 필사할 자신이 없는 사람들에겐 7가지 단편이라는 부담 없는 선택권이 주어지니 일석이조. 가장 추천하는 작품은 역시 이 책의 메인, ‘쇼코의 미소’다.
쇼코는 나를 보고 조용히 웃었다. 친절하지만 차가운 미소였다. 다 커버린 어른이 유치한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중략)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 최은영, '쇼코의 미소' 중
3.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 롤랑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
4. 데미안, 헤르만 헤세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문장일 것이다. 나는 데미안을 3번은 읽어야 진정으로 이 책을 읽었다고 믿는 사람이다. 단 한 번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가 그곳에 있다. 필사는 되도록 한국 작가의 책을 하는 게 좋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문장력에 중점을 두고 필사를 하는 경우의 이야기다. 하나의 책을 완전하게 내 것으로 만들고 하는 목적이라면 그런 말에 개의치 않아도 좋다. 올가을에는 싱클레어가 되어 데미안과 만나보는 것이 어떨까?
그렇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
5.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약간의 사심픽. 하지만 선택한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책. 내 인생의 단 한 권의 소설을 꼽으라면 나는 고민 없이 이 책을 고를 것이다.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잘 쓰인 소설은 없다고 감히 확신해서 말한다. 모든 종류의 사랑, 모든 형태의 애정이 그곳에 담겨있다.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울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랑을 믿는 사람, 사랑을 해본 사람, 사랑이 필요한 사람. 누가 됐든 좋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 끝까지.
아무튼 나는 행복해지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좋다.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 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 쓴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