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죄 ‘많아진’ 소녀 [영화]

그러는 당신은 정말 무죄인가?
글 입력 2018.09.2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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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사라지고,
모두가 나를 의심한다
 
같은 반 친구 ‘경민’의 갑작스런 실종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전여빈)’는 가해자로 지목된다.

딸의 실종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경민’의 엄마,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형사,
친구의 진심을 숨겨야 하는 ‘한솔’,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싶은 담임 선생님까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영희’를 의심한다.

죄 많은 소녀가 된 ‘영희’는
결백을 증명해야만 하는데...

 
< 죄 많은 소녀 >는 한 소녀의 죽음, 그 이후의 이야기이다. ‘왜 죽었는지’를 파헤치는 미스테리 스릴러는 아니다.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더욱 낱낱이 파헤쳐지는, 뼛속부터 이기적인 인간의 면모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여 사건의 요지는 이것이다. 첫째, 경민이 죽었다. 둘째,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영희가 경민에게 죽음을 강요했다는 소문이 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과연 영희는, 죄인일까?

  
 
과연 영희‘만’ 죄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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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기 위해 엄마의 수면제를 조금씩 빼돌려놨다고, 어차피 죽어도 아무도 신경 안 쓸 거라고 말하던 경민은 이미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아이였다. 그런 경민에게 영희는 같이 콘서트 가겠느냐고 물어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준 유일한 친구였다. 기쁜 경민은 영희에게 고백한다. 너가 너무 좋다고. 짖궂은 영희는 뜬금없는 이 친구에게 호기심이 든다. 하여 의도치 않게 경민이 서있는 벼랑 끝, 그 아래를 가리키는 몸짓을 해버린다. ‘내가 좋아? 정말? 그럼 목숨도 걸 수 있겠네?’ 친구를 뺏기고 싶지 않은 영희의 단짝, 한솔이 갈팡질팡하던 경민의 앞을 막아선다. ‘니가 진짜 죽을 수 있어? 죽을 용기도 없는 게.’ 진심을 의심당한 경민은 온 몸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하여 한 마디만 남긴 채 벼랑 밑으로 몸을 날린다. ‘진짠지 아닌지, 내일이면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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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는 분명 죄인이다. 장난이었을지라도, 어쨌든 벼랑 아래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덴마크 영화 < 더 헌트 >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 더 헌트 >의 주인공은 정말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마녀사냥을 당하는 반면 영희에게는, 비록 사소해보일지라도, 분명 죄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오직’ 영희에게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솔은 친구를 뺐기겠다는 위기의식에 이미 삶의 의지가 약해져있는 경민을 자극했다. 대형 학원의 원장이던 경민의 엄마는 (경민 아빠의 표현에 의하면) ‘일에 미쳐’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담임들은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있는’ 자기 반 학생이 ‘이상한’ 북유럽 밴드 음악을 듣고, ‘자주 혼자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별다른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반 친구들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경민과 그닥 친하지 않았고 경민을 잘 알지도 못했다.
 
따지자면 경민의 죽음은 벼랑 아래로 기어 내려간 영희, 등을 떠민 한솔, 경민이 벼랑 끝까지 가도록 방치해둔 엄마, 선생, 그리고 친구들 모두가 힘을 합쳐 만들어낸 공동창작물인 셈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가방 들어주기 내기를 하는 것처럼 한 사람, 영희에게 각자의 죄를 신나서 내맡긴다.

 
 
‘죄 폭탄’ 돌리기 게임: 경민의 죽음,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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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죄를 밀어내는 방식은 참으로 다양하다. 학교 측은 학교의 문제가 아닌 학생 개인의 문제로 밀고 나가자고 입을 맞춘다. ‘친하지도 않았던’ 반 친구들은 경민의 장례식장에서 갑자기 오열하기 시작한다. 한솔은 너가 걔한테 죽어보라 했잖냐며 영희의 말을 왜곡하고, 위증 한다. 살아생전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엄마는 딸이 죽고 나서야 제발 우리 딸 좀 찾아달라고, 혹은 우리 딸 좀 기억해달라고 애먼 사람들을 붙잡고 늘어진다. 이들은 모두 성공적으로 죄 폭탄을 넘겼다. 그 다음은, 영희의 차례다.
 
불행히도 영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재빨리 죄 폭탄을 넘기지 못한다. 경민과 가장 마지막까지 같이 있었다는 상황적 불리함 때문이다. 무죄인 척 하는 죄인들의 시선이 모두 영희에게 향한다. 너가 경민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다녔다며. 너가 경민이한테 죽어보라 했다며. 죄 폭탄을 떠안은 영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전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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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는 억울하고, 또 두렵다. ‘목숨도 걸 수 있겠네’ 한마디 한 것밖에 없는데 모두가 자신의 책임이라고 해서 억울하고, 동시에 ‘목숨도 걸 수 있겠네’ 한마디 때문에 정말 경민이가 죽은 걸까봐 두렵다. 해서 영희는, 자신에게 폭탄을 넘겨준 사람들에게 배운 것처럼 열심히 죄를 밀어낸다. ‘걔 원래 죽을 애였어요, 저 만나기 전부터 자살할 생각이었다고요.’ ‘내가 먼저 죽을걸. 걔가 내 자살방법 뺏은 거에요.’ 하지만 사람들은 도무지 영희에게 떠넘긴 죄 폭탄을 덜어줄 생각을 않는다. 얘 말하는 꼴 보라고, 너 이렇게 말하는 거 경민이한테 정말 못할 짓이라고 머리를 쥐어박으며 오히려 더욱 죄인으로 만들 뿐이다.
 
마침내 영희가 떠안고 있던 죄 폭탄이 터져버렸다.

  
 
‘죄 폭탄’ 돌리기 게임 2탄: 영희의 자살소동, 그 후.

 
영희가 목소리를 잃은 채 자살소동에서 겨우 살아났다. 이제 ‘죄 폭탄’ 돌리기 게임 2탄이 시작된다. 새로운 인물들도 여럿 추가되었으니 기대해도 좋다.
 
가해자를 처단하겠다며 영희에게 칼부림을 벌인 일찐은 ‘경민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다닌 진범을 제물로 잡아다 바치며 ‘얘 때문에’ 내가 오해했다고 말한다. 딸이 칼부림을 당한 걸 알면서도 무심히 넘기던 아빠는 이제야 ‘우리 딸 괴롭히지 말라’며 영희 앞에 나선다. 한때 가장 열심히 영희를 욕했던 반 친구 다솜은 영희가 느낀 것과 똑같은 고통을 느껴보라며 제 한 몸 희생해 선생을 마녀사냥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던 한솔은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에야 실은 자신이 경민을 등 떠밀었다며 눈물의 참회를 한다. 학생의 죽음을 대하는 과정에서조차 교장 눈에 잘 보이는 것이 최고이던 담임은 뒤늦게야 영희와 소통하겠다며 수화를 배워온다. 이제 영희는 더 이상 가해자가 아니다. 경민과 마찬가지로, 보호받아야 하는 불쌍한 피해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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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죄책감이 너무나 커서 당장 누구에게 넘겨버리지 못하면 숨조차 쉴 수 없는, 하여 끝까지 영희를 죄인 취급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경민의 엄마이다. 병실로 들이닥쳐 너가 분명 숨기는 게 있다며 몰이붙이고, 경민의 사망보험금으로 영희의 수술비를 대주며 영희 안에 ‘경민’이라는 죄의식을 뿌리박아 버린다. 이제 영희가 죄인이라는 낙인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경민의 엄마를, 자신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오늘 내가 죽을 거에요.
내일 아침, 사람들이 나를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당신에게 찾아와서
내가 왜 죽었냐고 물을 거에요.
그 때 말할 이유나 잘 생각하세요."
 
 



결국 영희가 죄 ‘많은’ 소녀가 된 이유는, 다른 죄인들이 영희 위에 자신들 몫만큼의 죄를 차곡차곡 쌓아줬기 때문일 것이다. 따지자면 죄 ‘많은’ 소녀가 아니라, 죄 ‘많아진’ 소녀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점은, 그렇게 ‘죄 폭탄’ 돌리기 놀이를 하느라 정작 벼랑 아래 널부러져 있는 경민의 사체에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민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관심을 받지 못한다. 아무도 경민의 죽음 그 자체를 애도하지 않으며, 그저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할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언제나 관심 밖의 인물이었던 경민은, 죽는 순간까지도 엄마와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경민의 주변은 마지막 순간까지 싸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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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를 소수로 추려내는 건 분명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닐 것이다. 결국에는 직접적인 피해를 입힌 누군가와 그저 방관한 누군가, 즉 우리 모두가 가해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확한 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보다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에 있는 경우가 더욱 많다.
 
하여 나는 우리가 마녀에게 던질 돌을 집어들 때, 한 번씩 자문해봤으면 좋겠다. 이 사건의 원인은 오직 저 사람 뿐인가? 그러는 나는, 정말 무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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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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