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노래할 줄 안다면, 나를 구원할텐데: 연극 비평가 [공연예술]

글 입력 2018.09.04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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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마요르가의 2인극, < 비평가 El critico >가 초연에 이어 두 번째 무대로 돌아왔다. 최근 여성인권에 대해 연극계의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감에 따라, 리버스, 혹은 젠더프리 배역이 시도되고 있는 현재의 흐름을 따르듯 연극 < 비평가 >는 2017년 초연과 달리 남성 2인극을 여성 2인극으로 개편해 돌아오며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내가 노래할 줄 알면, 나를 구원할 텐데.”라는 흥미롭고 강렬한 부제와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화장기 없는 얼굴에 냉철한 눈빛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두 여성 배우들. 포스터만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인 연극 < 비평가 >를 만나보았다.
 
연극 < 비평가 >는 극작가 스카르파와 비평가 볼로디아, 단 두 명의 인물만으로 무대를 채운다. 공간적 배경은 볼로디아의 집 내부. 무대는 거창하지 않게 상징적인 소품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특이하게도 무대의 양 방향에 객석이 위치해있다. 이곳에서 관객들은 스카르파의 연극의 관객이 되기도, 그들이 벌이는 격투의 관중이 되기도, 예술가를 둘러싼 군중이 되기도 한다. 시간적 배경은 밤. 오랜 침묵 끝에 발표한 작품의 초연이 올라오던 날 무려 15분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대성공을 거둔 극작가 스카르파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비평가 볼로디아를 찾아온다.


 
극작가와 비평가

거센 노크 소리에 볼로디아는 누구냐 묻고, 스카르파는 자신의 이름을 댄다. 볼로디아는 믿을 수 없어 하며 그를 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볼로디아가 망설이는 사이 스카르파는 문을 열어젖히며 볼로디아의 공간으로 들어온다. 스카르파는 볼로디아에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날 공연의 평론을 써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볼로디아는 이 일련의 상황들에 대해, 의아할 정도로 눈에 띄게 당황한다. 그는 다음날 아침 신문에서 평론을 확인하라고 하지만, 스카르파는 막무가내로 버티며 그의 평론이 아닌, 평론을 쓰는 그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
 
*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는 그들 사이 통용되는 암묵적 규칙이 있다. 극작가와 비평가의 경우, 극작가가 작품을 내놓으면 비평가는 평론을 하고 그의 평론은 다시 극작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는 방식이다. 이렇듯 극작가와 비평가는 글을 매개로 맺어진다. 그리고 글로만 맺어진 관계는 오직 글로써만 이어야 한다. 그러나 스카르파는 볼로디아의 공간을 침범해 그들 사이 암묵적인 금기를 과감하게 깨버린다. 무려 10년을 이어온 둘의 관계는 극의 시작부터 변화를 암시한다.

극작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수평이 아닌 수직적 구조인 것이 일반이다. 스카르파와 볼로디아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볼로디아는 거짓으로 얼룩진 연극계에 염증을 느끼고, 오롯이 진실만을 보여주며 세상을 변화시킬 글을 기다린다. 그는 원로 비평가의 권력으로 <거짓된> 작가들의 글을 무참히 짓밟는다. 그러던 중 볼로디아는 신인 작가 스카르파에게서 어떠한 가능성을 엿보고, 그를 성장시킨다는 명목으로 그를 매번 시험에 빠뜨리고 좌절시킨다. 그리고 그때마다 조금씩 ‘발전’하며 자신을 좇는 스카르파를 통해 볼로디아는 그에게 전에 없는 기대와 환상을 투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러기를 10년, 스카르파는 볼로디아의 기대와 달리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성공한 극을 내놓는다. 스카르파의 극에 대해 차분히 평론하던 볼로디아는 어느새 이성을 잃고 그를 비난한다. 종이 위의 활자를 뛰어넘어, 사람 대 사람으로 맞닥뜨린 스카르파와 볼로디아 사이에는 더 이상 기존의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는 해체되어 재조립되며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충돌을 통한 새로운 진보를 암시하고, 이는 언제나 금기를 깨부수는 사소한 노크 소리에서 비롯된다.


 
에릭과 타우베스

스카르파의 선전 포고를 받아들이며, 볼로디아는 4권의 책으로 경기장을 만든다. 그가 모아둔 4권의 책은 그가 어떤 재난이 닥칠 경우 가장 먼저 챙겨두는 책으로,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책이며 빛나는 지성의 집약체이다. 책으로 둘러싸인 가상의 링 안에서, 두 사람은 스카르파의 극 속 에릭과 타우베스가 되어 충돌한다. 이때 신세대인 에릭은 볼로디아, 구세대를 대표하는 타우베스는 스카르파의 목소리로 나타난다.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육성으로 읽어내면서 그들은 세대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 왜 자신을 더 큰 판으로 보내지 않느냐는 에릭과, 아직 이르다는 타우베스. 타우베스는 에릭에게, 그가 무엇보다도 경기 중 관중을 생각하고 경기에서 이기면 따라올 부와 명예를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닌 관중들을 위해 싸우기 때문에 계속해서 아직은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스카르파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타우베스의 대사는 볼로디아가 스카르파를 다루는 논지와 동일하다. 그렇게 스카르파는 ‘아직 안 돼’에서 10년 동안의 방황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안 돼’의 늪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예술적 성과는 고작 해봐야 ‘볼로디아의 예술’에 근접해지는 것에 불과하다. 스카르파는 타우베스의 대사를 읊으며 볼로디아의 입장에 서 본다. 너를 위해서, 너의 고통 끝에 꽃피울 예술을 위해서 그랬다는 말 속의 모순을 꼬집으며, 그는 10년의 세월동안 다져진 사제관계를 박살낸다.
 
볼로디아는 스카르파의 작품 속 ‘여인’에 대해, 진실하지 못한 결말이라며 분노한다. 그는 스카르파가 여인을 알기는커녕 한 번 안거나 사랑해본 경험도 없을 것이며, 진짜로 여자에 대해서 안다면 그런 글은 나올 수 없다고 일갈한다. 그러자 이때, 스카르파는 의기양양하게 볼로디아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볼로디아가 그토록 거짓되었다고 주장하는 극 속의 여성은 사실 볼로디아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의 아내였던 것이다.
 
볼로디아의 혹평에 괴로워하던 10년 전, 스카르파는 그가 지나쳐온 수많은 여인 중 하나에게서 ‘차라리 그를 찾아가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물어보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 말을 듣고 볼로디아를 찾아 나선 그는, 집을 나서는 볼로디아의 뒤를 좇으며 만난 인물과 사건들을 재료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볼로디아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끄는 길을 따라 밟으며 스카르파는 다시 펜을 들게 된 것이다. 혹평에 짓눌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던 그에게 나름의 환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볼로디아의 뒤를 밟던 스카르파는 그의 집 창문의 깨진 틈을 통해 기묘한 광경을 보게 된다. 남편에게 입을 맞추려는 볼로디아의 아내와, 아내를 거부하는 볼로디아.
 
극작가와 비평가, 스카르파와 볼로디아는 서로의 글을 통해 소통한다. 작품과 평론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세계를 엿보고 복사하며 때로는 쳐부순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창구가 글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어떨까. 스카르파는 마치 볼로디아의 뒤를 밟듯이, 그가 쓴 글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수천 번을 읽고 되새기면서 만난 하나하나의 문장과 단어들은 스카르파가 새로운 글, 볼로디아에게 칭찬받을 수 있는 글을 쓰게끔 한다. 그렇게 볼로디아의 뒤를 충실히 쫓던 스카르파는 그들을 이어주는 글이라는 창에서 한 조각 틈을 발견하게 된다. 유리를 매개로 두지 않고 그 틈을 통해 처음으로 직접 바라본 볼로디아의 모습이 바로, 아내를 거부하는 모습인 것이다.


 
여자

볼로디아의 아내는 현실과 연극의 경계 사이에서 존재하는 인물이다. 극 속에서는 코치의 아내로, 극 바깥에서는 볼로디아의 아내로. 그는 남편에게 거부당한 날 집을 나와, 자신의 노래를 찾고자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두 조용해진 밤이면 여자는 맨발로 지붕 위를 걷는다.

내가 노래할 줄 알면, 나는 나를 구원할 텐데.

왜 그는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걸까? 그는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라는 걸까?
 
볼로디아는 대중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진실을 낱낱이 꺼내어 까발리고, 이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야말로 연극의 순기능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극본들은 비평가인 그의 앞에서 조각조각 해부 당해왔다. 그러나 극의 후반부에서 그런 그조차도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카르파와 아내에 대한 환상만을 붙들고 살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누구보다도 진실을 부르짖던 그마저도 거짓된 인물이었다면, 진실을 말하기는커녕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나 있을까? 세상은 흑과 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서의 진실이 어디서는 거짓이고, 또는 둘 다 아닐 수도, 또 어디서는 둘 다일 수도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이냐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진실로써 세상을 구원하길 꿈꿨던 그는, 한 조각 편협한 의무에 갇혀 세상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다.
 
볼로디아의 아내는 노래를 찾는 자이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세상을 노래하기를 꿈꾸는 아내를 볼로디아는 외면하고 거부한다. 오직 하나의 올바른 울림이 아니면 전부 소음이 되는 그의 무대 위에서, 노래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로디아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스카르파는 창문의 깨어진 틈으로, 혹은 볼로디아의 글 속 부서진 논리의 틈 사이로 조용히 볼로디아의 모순을 지켜본다. 이 틈 사이 광경으로, 그들이 글을 통해 이룩한 충실한 사제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이후 스카르파가 볼로디아의 아내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비로소 볼로디아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자신만의 예술, 목소리를 되찾는다. 볼로디아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되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옭아매던 덫에서 스스로를 구원한다.
 
*
 
스카르파의 극 속에서, 코치의 아내는 에릭의 도움을 받아 노래를 찾고 미소를 짓는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노래한다는 것은 곧 세상을 보는 시선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받아들이고, 겹겹의 목소리와 화음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에는 어떠한 절대적 진실도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볼로디아의 관점에서는, 진실을 외면하고 세상에 만연한 ‘거짓’의 손을 들어주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볼로디아는 노래를 찾은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는 것에 분노했다. 그럼 현실의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스카르파는 볼로디아에게 그의 아내가 현재 자신의 집에서 머물고 있다고 밝히며 주소를 건네준다. 그가 볼로디아의 공간을 침범해 금기를 깬 것처럼,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그에게서 벗어난 것처럼, 자신의 공간을 내어준다. 그러나 문을 열어주지는 않는다.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여자가 직접 문을 열어야 하며, 그렇게 하도록 볼로디아는 직접 단어를 고르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볼로디아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아내에게로, 자신이 진리를 위해 외면하고 있던 스스로의 목소리에게로 뛰어간다.


 
구원

스카르파는 볼로디아가 떠난 집에 혼자 남아, 그러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볼로디아의 비평을 그대로 신문사에 전한다. 진실을 노래하는 데 실패했다는 그 혹독한 비평을. 그리고 그는 말한다. 현실에서 연극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왜 연극에서는 현실을 보고자 하느냐고. 예술에는 어떠한 진리도, 의무도 있을 수 없다. 현실을 반영해야만 한다는 것도, 반영하면 안 된다는 것도, 전부 예술 그 자체로서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없다. 정도가, 진리가, 절대적 진실이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바야흐로 예술은 그 어떤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그를 통해서만, 맨발로 지붕 위를 밟고 노래할 때만 ‘진정한’ 예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거칠고 부르튼 맨발에서 고개를 돌리고, <의무>라는 신을 신기고, 내면의 목소리에게서 도망쳐 타인을 위해서만 노래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꺾는 일이다. 스카르파가 펜을 내려놓고, 볼로디아가 스스로 창작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스카르파와 볼로디아는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나? 글쎄, 스카르파는 끝까지 볼로디아를 염두에 둔 글을 썼다. 볼로디아가 대면하길 거부했던 맨발을 보여주고, 그를 깨우치고, 성공을 거둔 그날 밤 누구보다도 그에게 축하를 받고 싶어 하는 그런 글을. 볼로디아는 아내를 찾아 떠났지만, 끝내 스카르파의 집 현관문을 열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이 둘이 목소리를 찾아, 노래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실패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글을 쓰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낼 것이다. 언젠가는 맞는 음을 찾아, 자신의 노래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스카르파는 한때 그렇게 자신을 옭아맸던 볼로디아의 비평을 구겨버리고, 암전 속에서 묵묵히, 흔들림 없이 글을 쓴다. 그리고 스승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그의 서걱거리는 펜 소리만이 종이를 스치고 정적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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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자’여야 하고,
왜 ‘남자’여야 했는가?

이번 연극에서 가장 기대했던 점은 역시 무엇보다도 성별을 반전시켜 여성 주연의 극을 시도했다는 점일 테다. 여성이 주연인 극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기껏해야 사랑을 노래하고 억압에 슬퍼하며 자유를 갈망하는 역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때에, 오직 여성 배우 두 명이 나와 예술과 진실과 허구에 대해 논쟁하는 극은 필자로 하여금 단순한 보고 싶다는 흥미 이상의, 봐야만 한다는 어떤 의무감까지도 들게 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는지, 이 극이 페미니즘적 울림을 가진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크다면 큰 부분에서 굉장히 애매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동안 시대상황이 급변함에 따라 연극계 내에서, 배역에 있어 젠더를 배제하려는 시도는 간간이 있어왔다. 리버스(reverse)나 젠더 프리(gender-free) 배역이 바로 그것이다. 캐릭터의 성별을 아예 바꾸거나, 아니면 성별에 대한 언급 자체를 피해 젠더에 상관없이 연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극 < 비평가 >는 배역의 성별을 반전시키지도, 그렇다고 배역에 부과된 젠더 자체를 없애지도 않았다. 그저 배역의 성별을 그대로 두고, 배우의 성별만 반전시키는 시도를 택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시도 자체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도 불분명하며, 의도 자체가 있다손 치더라도 관객에게 얼마나 전달될지 역시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의도적인 연출의 의도가 전달되지 못한다면, 단적으로 말해 그 연출은 실패한 것이다.
 
연극 < 비평가 >는 등장하는 각 캐릭터에게 어떠한 젠더가 반드시 특정되어야 하는 극이 아니다. 그럼에도, 배역 자체의 성별을 바꾸지 않은 것은 남성 작가의 시선에서 다루어지는 여성을, 남성 배역의 옷을 입은 여성이 대면하는 데서 오는 어떠한 이질적인 느낌, (극 속에서도 꼬집듯) 여자에 대한 허상과 진실을 언어나 논리로 설명하기 이전에, 관객들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와 닿게 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회에서 주로 남성 영역의 특성으로 여겨지는 것들, 이를테면 저음의 목소리, 건들거리는 태도 등을 스카르파 역의 배우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여성’을 연기할 때는 다시 <여성>의 특성을 연기한다는 점은 배역의 캐릭터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외려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심지어는 전면으로 여성 배우를 내세우면서도 남성중심사회가 교육시켜온 여성성과 남성성을 고착화하고 재생산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이는 나아가 여성 배우에게 남성 배역을 줄 수는 있어도 여성 중심의 서사를 만들어주기에는 이르다는 태도처럼 비쳐질 수도 있고, 자칫 페미니즘을 내세운 기만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오래도록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던 연극계 내에서 이러한 시도들은 현재까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극의 제작자를 비롯해 앞으로도 이같은 시도를 하는 많은 연극 제작자들은, (극 중 스카르파가 탄식하듯) 누군가의 의도가 누군가의 미흡한 해석으로 인해 관객에게 제대로 다가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반대로 누군가의 미흡한 해석이 누군가에게 의도로 다가갈 수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무대 위에서 힐을 신지 않고 맨 얼굴에 편하고 짧은 머리, 바지정장의 차림새로 인생과 예술, 세계를 구원하는 법에 대해 논쟁하는 여배우들을 볼 수 있어 매우 뜻 깊었지만, 동시에 이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두 배우가,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많은 여배우들이 어떤 이유에서건 아직 여성만의 삶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현실은 아쉽기만 하다.


[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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