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영화보는 페미니스트들에게_도서 시네 페미니즘

글 입력 2018.08.25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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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보는 페미니스트에게                

페미니즘을 꼭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여러 계기 중 하나는 문학비평 수업이었다. 커리큘럼에는모든 학생들이 최소 하나 이상의 문학작품이나 영화에 대한 비평문을 작성한 다음 돌아가면서 그 내용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수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이 한 명 한 명 발표를 하던 중, 평소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한 여자분의 차례가 되었다. 그 분이 선택한 비평이론은 다름 아닌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지금보다도 더 낯설고 금기어처럼 느끼던 시기였다. 그 분은 어떤 원로 남자 시인의 작품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그려지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의견을 전개해나갔다. 지나치게 남성중심적인 관점에서 시 속의 여성이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 주된 요지였다. 어렴풋하게 기억하기로는, 화자인 남성이 자신의 이상향을 노래하면서 그저 술이나 먹고 '계집'이나 끼고 놀았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시가 흘러갔던 것 같다. 처음엔 흰 바탕에 점 하나 찍힌 그림을 본 사람처럼 어이가 없었다. ‘아-나도 할 수 있는 건데. 나도 여자라 저 정도는 불편하게 느껴왔는데.’ 하지만 이내 그 학생의 비평을 과소평가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럼 난, 그 동안 왜 단 한번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그 이후로 나는 드라마를 보든, 영화를 보든 계속해서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최근에 봤던 드라마 < 김비서가 왜그럴까 >도 그랬다. 배우 박민영이 연기한 김비서는 극 초반엔 프로페셔널한 비서계의 레전드로 그려지지만, 드라마 막바지에 가서는 결국 그녀가 비서가 되는 것 자체가 남자주인공의 ‘지극히 사사로운’ 감정때문이었음이 밝혀지더라. 탄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듯 아직도 미디어 속 여성은 남성의 도움 없이 홀로서지 못하는 ‘대상’으로 그려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익명으로 토론이 이루어지는 온라인 공론장에서는 가지각색의 반박들이 쏟아진다. ‘그냥 불편하다고 생각하니까 불편한 거 아니냐’, ‘여성이 그렇게 밖에 그려지지 못하는 건 그게 현실이니까 당연한거다’ 등등. 사실 이런 목소리들은 나를 둘러싼 외부로부터만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서도 끊임없이 고개를 든다. 어디서부터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지...이러한 질문들에 스스로도 답을 정리하지 못하다 보니 타인을 설득하기엔 그 논리가 터무늬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지금처럼 공론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미디어컨텐츠, 그 중에서도 영화를 중심으로 페미니즘 연구를 진행해온 주유신 시네페미니스트로부터 모종의 가르침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 시네페미니즘 >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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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01 여성의 눈으로 영화보기

02 서구 페미니스트 성 정치학의 쟁점과 지형들

03 ‘천만 관객 시대’를 맞이한 한국영화의 성 정치학

04 초민족 시대의 민족영화 담론

05 1950년대의 근대성과 여성 섹슈얼리티
< 자유부인 >, < 지옥화 >

06 사적 영역 / 공적 영역 사이의 근대적 여성 주체들
<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 , < 자매의 화원 >

07 ‘위안부 영화’와 역사쓰기의 새로운 도전
< 귀향 >, < 눈길 >

08 멜로드라마 장르와 여성 관객성

09 공상과학영화 속의 새로운 육체와 성차
 
10 십대영화와 여성주의 영화 미학의 가능성
< 세 친구 > , <고양이를 부탁해 >, < 나쁜 영화 > , < 눈물 >

11 남성 멜로와 액션영화에서 남성 정체성과 육체
< 주먹이 운다 >, < 달콤한 인생 >

12 퀴어 정치학과 영화적 재현의 문제
< 지상만가 >

13 페미니스트 포르노 논쟁과 여성의 성적 주체성
< 로망스 >, < 에로띠끄 >
 



  영화는 '철저하게' 만들어진다            


책은 '여성의 눈으로 영화를 보는 법'이라는 부제 아래 총 13가지 시각 및 방법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을 총괄하고 있는 큰 틀은 아래 제시된 몇 줄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제는 '재현되는 여성들의 이미지 자체'에서부터
'여성들이 재현 체계 속에서 어떻게 여성으로 구성되는가'라는 과정의 문제로, 그리고
 '그 과정은 특수한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가'의 문제로 나아가게 된다.

즉, 재현된 여성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이미지를 빚어내는 전반적인 재현 체계 속에 내포된
성차별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위계화된 남녀 관계라는 문제와 더불어 분석되고 비판된다.

p.19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장면과 대사, 행위는 일상에 등장하는 사소한 사건들처럼 어쩌다가 일어나지 않는다. 작은 소도구부터 장소, 카메라의 위치와 구도, 말 한마디까지 그 모든 것을 선택하고 배치하고 편집하는 행위는 제작자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의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류의 장면을 찍는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나라의, 어떤 문화권에서 살아온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졌고 어떤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노브라가 흔한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영화 속 여주인공이 노브라로 등장하는 건 크게 놀라울 일이 아니지만, 한국 영화 속 여주인공이 노브라로 등장하는 건 한국인 관객들에게 커다란 이슈거리가 될 수 있고, 제작자 역시 노브라라는 행위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때문에 < 시네페미니즘 >의 저자는 영화가 의도에 의해 ‘철저하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영화 텍스트 자체를 넘어 영화 속에 담기기 마련인 사회정치적 맥락과 대중심리까지 광범위하고 깊이있게 다루는 방식으로 책을 꾸려나간다.


 
  여성의 이야기와 여성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일                    


털어놓자면, 본 책이 다루고 있는 영화의 대부분을 접한 적이 없어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는 한편 나만의 논리와 의견을 개진해나가는 일이 꽤나 어려웠다. 때문에 이 영화의 13가지 장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본 적이 있는 영화인 < 귀향 >을 다루는 7장이 가장 강렬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성적 학대와 그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민족주의와 섹슈얼리티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지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민족주의를 이야기하기 위해 장 하나를 따로 구성할 정도로 저자는 영화와 민족주의의 간의 관계에 꽤나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여성 문제에 있어서 영화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나 폭력을 통해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투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말 안타깝지만, 민족의 시련과 여성의 고통이 한 데 엮이는 일은 어쩌면 불가피하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숱한 전쟁터에서 죽음이나 빈곤을 넘어 성적으로까지 고통받는 존재가 바로 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문제삼고 있는 것은 단순히 민족의 수난과 여성이 겪는 성적인 폭력 사이의 관계, 그 자체가 아니다.


 '소녀'라는 범주는 근대를 거치며 '예비 여성시민'이자 우량한 국민을 재생산하고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신체를 결혼까지 순결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규범에 의해 수립된다.
...
바로 이런 맥락에서 위안부라는 민족적 비극을 더 선명하게 하고
그들의 신체와 정신에 가해진 폭력을 더 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소녀 주인공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
물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흔히 젠더화된 용어로 설명되고,
특히 식민지배자에 의해 유린되고 침탈당하는 '순결한 여성으로서의 식민지'
오리엔탈리즘의 핵심을 이루는 표상이라는 사실 역시도 이런 설정에 기여했을 것이다.

p. 252-253


영화 < 귀향 >과 < 눈길 >의 주인공들은 모두 어린 소녀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철저히 의도에 따라 진행되는 서사물이고 그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한 각종 상징과 관습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유부녀, 미혼녀, 미성년자를 비롯한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신분 중에서도 순결함을 상징하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선택한데는 특정 의도가 개입했다고 볼 수 있다. 즉, < 귀향 >과 < 눈길 >의 경우, 위안부 문제를 '순결함의 상실'이라는 문제로 접근하는 경향이 다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록 제작자가 의도적으로 소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해도, 가부장제가 뿌리 깊은 사회에서 '소녀' 라는 단어는 '순결함'으로 읽힐 수 있기에 이러한 비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당대 식민지배의 현실에서 벌어진 일을순결함의 상실이나 그것으로서의 민족적 비극으로 묘사하는 것은 모든 위안부 피해자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초점이 사회에 의해 강요되는 '여성의 순결함'과 '민족'으로 잘못 맞춰질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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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영화


영화 < 귀향 >이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영화가 위안부 소녀들을 다루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위안소에서 소녀들이 겪었던 학대의 장면을 위에서 내려보는 방식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든가, 소녀가 일본군에게 '잘 해줄게' 라고 언급하는 대사, 일본군이 위안부 소녀에게 '열 넷에 처녀라', '처녀는 이런 맛이 있어야지'라고 말하는 부분 등이 주된 비판의 대상이었고 저자도 이 부분을 지적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거잖아'라고 하기엔 '굳이 이러한 대사와 장면이 필요했을까?', '피해자의 입장을 충분히 공감한다면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를 생각해보면 쉽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저자는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여성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며,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선과 목소리로 전달하지 않을 때 어떤 불협화음이 일어나는지를 치밀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일생에 걸쳐 피해자들에게 수치, 침묵, 고통을 안겨 주던 경험을 
성애화된 민족의 문제 혹은 민족주의화된 성의 문제로 축소시켜버리는 동시에
"< 귀향 >은 폭력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폭력이 된다,
< 귀향 >의 선정적인 재현은 '피해자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폭력 아닌가?"
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p. 259


< 시네페미니즘 >은 4장까지는 페미니즘 자체와 한국 영화의 흐름과 같이 보다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그 뒤로는 특정 영화를 페미니즘 및 퀴어의 시각에서 풀어나간다. 이 책은 전혀 가볍거나 쉽지 않다. 학술적인 용어들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콘텐츠를 분석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몇 십 년에 걸친 역사적 사실까지 끌어오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그만큼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있고 깊이 있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만약 이 글을 읽고 < 시네페미니즘 >에 도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매 장마다 다루고 있는 영화를 먼저 본 다음, 자신만의 감상을 기록하고, 그 이후에 책으로 돌아와 새로운 시각을 보충하는 식으로 독서를 하면 어떨까 싶다. 영화를 직접 비평하는 파트는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영화 속에서 여성이 공통적으로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탐구하기에도 적절할 것이다. 나 역시 < 시네페미니즘 >이 다루는 영화들을 본 다음 다시 한 번 책을 정독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이 책을 독파하고나면 과거에는 설명할 수 없었던 여성으로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찝찝함과 수치심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읽는 영화보는 페미니스트들에게 < 시네페미니즘 >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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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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