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극 생쥐와 인간 [공연예술]

글 입력 2018.08.22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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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존 스타인벡의 고전 < 생쥐와 인간 >이 한국에서 초연의 막을 올렸다. < 생쥐와 인간 >은 대공황을 겪던 1930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장애인, 여성, 흑인, 등 사회 각계각층의 소외된 이들을 그린 작품으로, 영화, 오페라,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로 제작되며 스타인벡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한국에서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막을 올리기 때문에 10명의 등장인물을 7명으로 줄이고, 1인 2역의 배역을 두는 등 여러 가지로 각색을 거쳤다.
 
극은 누군가로부터 다급히 도망가는 두 주인공 조지와 레니로 시작한다. 총명하고 약삭빠른 조지는 지적 장애인 레니를 데리고 어떻게든 삶을 이어나간다. 극 중 레니는 조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죽은 생쥐를 쓰다듬고 있는데, 제목에도 나타나는 생쥐는 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쥐는 비위생적이라 인간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 때문에 기피되는 생물이다. 또 동시에 부드러운 것에 대한 레니의 욕망이 표출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생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문명화된 인간 세계의 규칙으로, 조지는 이를 인지하고 죽은 생쥐를 내던져버린다. 하지만 어린 아이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레니는 문명화된 인간 세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위생 따위의 어려운 말보다도, 당장의 욕망이 더 중요하다. 생쥐로 대변되는 레니의 욕망의 대상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억압을 잊게 해주는 따스하고 자그마한 위로이다. 그러나 동시에 레니가 한 손으로도 죽여 버릴 수 있을 만큼 여리고 사라지기 쉬운 신기루 같은 것이다. 조지는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레니로 인해 처지가 곤란해지면서도, 그를 놓지 않고 끝까지 감당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레니가 집착하는 부드러움의 대상은 생쥐에서 담요로, 담요에서 강아지, 강아지에서 컬리 부인으로 그 크기를 부풀리고, 그만큼 위험도가 높아진다. 결국 레니의 욕망은 컬리 부인이라는 인간의 단계로 확장되어 인간 공동체의 금기를 건드리게 되고, 인간 세계에서의 퇴출이라는 결말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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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에는 2가지의 갈등 양상이 그려진다. 컬리로 대표되는 지배 계층과 그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조지와 레니를 비롯한 농장 일꾼들 사이의 갈등, 그리고 문명화된 공동체 속에 섞이지 못하는 레니와 그를 둘러싼 환경의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사고로 팔이 잘리면서도 생계 문제로 농장을 떠나지 못하는 노인 캔디와 지적 장애인 레니, 그를 돌보는 일꾼 조지는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으로, 지배계층의 부조리한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아늑한 가정을 꾸리고자 한다. 그러나 지배 계층인 컬리와의 갈등으로 희망은 위기를 맞게 되고, 이내 컬리와 레니의 격투라는 극단적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레니는 조지의 만류로 컬리의 폭행을 참아내지만, 결국 조지의 묵인을 통해 컬리의 팔을 부러뜨리게 되고, 3명의 일꾼이 품었던 희망은 무참히 깨어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레니를 중심으로 전이되었던 희망은 레니를 통해 사라졌으며, 결국 문명화된 인간 공동체와 발이 맞지 않았던 레니가 죽음을 맞게 되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작중 캔디는 냄새나고 늙은 개를 오래도록 품고 있다. 그의 개는 살아있는 생명이기는 하지만, 공동체 생활에 불편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캔디의 개는 레니에 비견된다. 비록 레니로 인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조지는 레니를 쉽사리 놓지 못하는데, 이는 단순히 레니에 대한 사랑이나 그의 외숙모로부터 입은 은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조지는 레니에게 입버릇처럼 그가 없다면 자신의 인생이 훨씬 더 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루 벌어서 하루 진탕 쓰고, 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런 삶. 그러나 그런 하루살이 같은 삶에는 어떠한 기대도 희망도 없다. 레니를 돌보면서 조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아닐지라도, 레니의 삶에 책임감을 느끼고 그를 통해 매일을 살아낸다. 또한 그에게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희망찬 환상을 통해 조지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희망을 느끼고 삶에 대한 기대를 품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 레니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은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레니를 통해 느끼던 희망과 삶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이후의 조지는 어떻게 됐을까? 레니를 통해 삶을 지속시키던 원동력이 사라진 상태의 조지는 삶을 더 이어나갈 수 있을까? 희망이 없는 삶,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삶을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직 생물학적 죽음만이 죽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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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 생쥐와 인간 >은 아름다운 무대와 잔잔한 스토리로 한 번 이상은 보고 고민할만한 작품이었지만, 불편한 점 역시 없지 않았다. 특히 컬리 부인의 묘사가 그러한데, 그녀가 처음 등장할 당시에 컬리 부인에 대한 성적인 뉘앙스의 대사는 극의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불필요한 대사였다. 거기다, 레니의 죽음이 암전으로 처리된 것과는 달리 컬리 부인의 죽음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소위 대놓고 묘사된 데에 대해서는 이 극이 소외된 계층을 다루면서도 그 사이에 여성에 대한 배려는 고려하지 않았다고밖에 느낄 수 없었다. 원작이 꽤 오래 전에 나온 작품이니만큼, 현대의 무대에서 그를 각색해 올리기 위해 충분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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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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