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안락함으로부터 예민함에 이르기까지 - 연극 < 노라이즘 >과 페미니즘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8.15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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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노라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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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진행된 페미니즘 연극제에서 헨릭 입센의 < 인형의 집 >을 각색한 < 노라이즘 >이라는 극이 올랐다. 연극은 노라가 가부장적인 남편 '아래'서 집안일을 열심히 하며 남편을 보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편은 그런 노라를 하대하는 것은 기본, 노라를 잘 구슬리고 가르치면서 그녀가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만든다. 노라가 끝까지 현모양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관찰하는 리얼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이 가정의 모습을 방영하고, 패널들은 그들의 모습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한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현모양처 서바이벌에 참여하고 있던 노라는 우승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투입된 주변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며 집안일에 열심이다.
 
특히, 방해꾼으로 투입된 지인들 중 누군가가 각본대로 행동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녀를 일깨워주려고 했을 때 그녀가 이를 거부하는 장면은 관객의 답답함을 유도한다. 관객의 스트레스는 극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그녀의 낙태 진단서를 들고 나타난 방해꾼과 집 바깥의 세상을 일깨워주기 위해 나타난 친구, 그리고 부인을 압박하는 남편의 말소리와 소음들이 어지러운 조명과 함께 겹쳐지면서 심해진다. 결국 노라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 모든 것을 그만두겠다며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를 막는다.
 
상기한 바와 같이, 연극을 보면 노라의 모습이 참 답답하게 묘사된다. 그녀의 친구는 그녀가 집안 세계에 갇혀있다는 것을 답답해하며, 남편과 자식을 벗어난 바깥세상에는 더 좋은 무언가가 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런 노라의 모습을 정말 답답해할 수 있을까?



재생산된 정체성의 안락함

 
우리가 소위 '상식'이라고 믿고 따르는 행동들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변화되어온 일종의 편견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상식이 매우 '보편적'이며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10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고였다. 마찬가지로 100년이 지나면 이 '상식'이라는 것은 또 변화되어 지금 우리가 가졌던 사고가 매우 편협한 시각이었던 것으로 드러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와 세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깨어있는 사고를 갖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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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그녀는 '현모양처 서바이벌'에서 우승 직전까지 올라온 성실한 가정주부이지만 그런 그녀가 마치 무언가에 세뇌되어있으며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답답하게' 묘사된 점이 아쉬웠다. 그녀는 그저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며 살아온 한 세대의 사람일 뿐이다. 현모양처, 혹은 가정주부라는 것에 대해 그렇게 묘사한 것이 혹여나 자신이 가정을 위해 봉사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진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집안사람으로서의 생활에 처음부터 불만을 느꼈거나 가족을 벗어난 생활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그녀의 처지가 매우 잘못된 것이었겠지만, 노라는 나름대로 그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살던 사람이었다. 혹자는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불편한 옷을 입으며 바깥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채 노예처럼 사는 것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남편은 다른가?
 
남성을 위해, 집안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릴 것을 요구받는 여성상. 마치 노라의 남편이 그것을 강요하는 시대착오적 악역인 것처럼 나오는데, 남편 또한 어찌 보면 노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편 또한 그런 시대와 집안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노라처럼 집안일을 하며 안사람으로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노라가 '세뇌' 당한 사람이라면, 남편 또한 그럴 것이라는 이야기다. 연극에서는 집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진정한 자아실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비슷비슷하게 생긴 불편한 넥타이를 졸라맨 노라의 남편 또한 수많은 이름 없는 '김사원', '김대리'일 뿐일 수 있지 않는가. 과연 집 안에 있느냐, 집 밖에 있느냐가 개인의 자아실현 여부를 결정하는가? 또 노라의 지인들은, 수익을 창출함으로써 사회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노동에 가치를 두는 구조적 사고의 희생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집안일을 하는 것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노라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행동에도 의문이 들었다. '리얼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명목 아래 자신의 모든 사생활이 폭로된 노라는 외적, 내적 압박과 혼란 끝에 지금의 생활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다음은? 집안의 안정을 위해 노력해왔던 노라와 그녀의 남편은 어떻게 되는가? 집안 관리에 대해 숙달된 노라는 파괴된 가정 바깥의 경쟁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 수 있는가? 자식과 홀로되었을 남편은 이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 둘에게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낯선 생활만이 남게 되었을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동의를 얻지 않고 관찰 프로그램에 지원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할 일이지만, 그들의 생활에 훈수를 두고 그 생활이 '불편하고 나쁜 것'이니 벗어나라고 말하는 사람들 또한 노라네의 삶을 책임져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무책임하게 한 가정을 파괴한 사람들로 평가될 여지가 있다.

결론적으로 노라와 남편은 재생산된 정체성의 안락함 속에서 살아온 인물일 뿐이다. 남자는 밖에 나가 육체노동을 하고, 여자는 집안에서 집안일을 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정생활을 분담한 사람들. 남편이 부인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드는 장면 또한 그가 특별히 나쁜 인물이라서라기보다는 그 또한 그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어서 일 가능성이 크다. 진짜 문제는 그것이 직접적인 폭력으로 번지거나, 둘 중 하나가 그것에 대해 상처를 입었거나 했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라가 남편의 강요를 피해 낙태를 했다는 설정은 이 극에서 유일하게 설득력 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또 다른 관점과 상식, 생활방식에 대한 접근이 열려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방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애초에 2018년 노라의 가정은 둘 중 하나가 원치 않으면 깰 수 있는 가정이었다. 노라에게 주어져야 할 것은 새로운 관점들에 대한 제시와 '선택권'이어야지, 또 다른 '강요'여서는 안된다.



예민함과 상처

 
누군가 '여성스럽다', '남성스럽다', 혹은 '오늘 예쁘다'라는 표현을 썼을 때 그것에 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그런 표현을 쓰지 말라며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준다면 어떨까. 요즘은 이런 표현들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는 인식이 많이 생겨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면박을 준 사람에게 동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악의 없이 그 '문제시되는' 표현을 썼던 사람에게는 어쩌면 그 일이 평생 가는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 만약 당사자가 범죄의 가능성이 있거나 악의가 있는 언행을 한 게 아니라면 그에게도 조금은 온화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구시대적 인식, 아니, '구시대적 인식이라고 생각되는' 인식을 고치기 위해 악의 없는 누군가에게 트라우마와 상처를 안기는 것은 옳은가? 쉽게 '그렇다. 시대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상대방이 어느 지점에서 예민한 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욕먹어도 싸다. 원래 그런 식으로 사회적 인식을 고쳐나가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페미니즘도 결국 성별 여하를 막론한 모두가 함께 공감하고 참여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이상인데, 몇몇 논쟁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욕보이는 결과만 증대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작금의 사회 분위기를 보면서 느끼는 바는, 불편함은 언제나 또 다른 불편함과 만나며 강요에 대한 반발은 또 다른 강요를 낳는다는 것이다. 여자는 페미니즘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고, 남자는 페미니즘에 참여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다. 때때로 그들에게 의무와 자격의 문제가 거론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회적 평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성에게 아직 많은 장애물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모두가 더 많고 균등한 선택권을 갖기 위해 가끔은 급진적인 방법이 있어야 하지만 이러한 방향은 우리에게 필요한 그 '급진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사료된다.

'좀 더 예민해져도 된다', '아니다 싶은 건 바로 말하고 고쳐야 한다' 라는 등의 논의가 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 언행인지에 대한 기준이 끊임없이 재설정되고 있는 요즈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상대방의 의도를 헤아리고자 하는 노력이 아닐까. 우리가 구시대적 정체성에 안락함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비난할 수 없듯,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입법관과 재판관이 되어 남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더 새롭고 평화적인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하며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을 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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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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