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음 복잡할 때, '최악의 하루' [영화]

이상하게 설레는 하루. 위로받고 싶은 날 추천하는 영화
글 입력 2018.07.0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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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피를 좋아했다. 몸은 피곤해도 정신은 맑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에 아메리카노 두세 잔은 아무렇지 않게 마시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카페인만 먹으면 몸이 뻣뻣해지고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이렇게 갑자기 체질이 바뀐다고? 의아해하며 마지못해 시켰던 차와 스콘이 나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적당한 차 온도에 온몸이 편안해졌고 적당한 빵의 밀도에 허기졌던 마음이 뿌듯이 채워졌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항상 과제나 공부를 하러 갔던 카페에서 온전히 차 한 잔에 집중했던 적은.

나에게 영화 ‘최악의 하루’는 이런 차와 스콘 같은 존재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힘들고 괴로울 때는 내가 ‘왜 힘든지 이유를 모를 때’였다. 그럴 때 잠깐 멈춰서 조용히 내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 영화가 ‘최악의 하루’였다. 그리고 괜찮다며 나를 숨 쉬게 해주었다.



사실 전 다 솔직했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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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원하시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전 원하는 걸 줄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전 다 솔직했는걸요.”


우리는 오늘 세 명의 은희를 만났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 료헤이, 지금 남자친구 현오, 전에 만났던 이혼남 운철을 각각 대할 때의 은희의 모습은 판이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은희는 천생 배우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길을 물어보는 료헤이에게는 상냥한 웃음을 보이고, 현오가 자신을 다른 여자 이름으로 잘못 부르자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며, 전에 바람피웠던 남자 운철 앞에선 마음 정리를 못 한 처연한 여자의 모습을 보인다. 근데 희한하게도 거짓말이 몸에 밴 은희가 밉지가 않다. 왜냐면 은희는 남은 속일지라도 자기 자신에겐 솔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마다 그녀가 보여주는 감정은 진짜다. 그래서 최악의 하루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상큼하다. 더불어 한적한 서촌의 골목과 선선한 바람 부는 늦여름의 남산은 보는 이를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사는 게 연극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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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하루 끝에서 은희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은 사는 게 연극 같아요.
연극이라는 게 무대 위에 있을 땐 진심이거든요.
근데 끝나면 가짜고.”


울림을 주는 대사다. 우리는 삶이라는 연극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휙휙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면 무슨 말인지 공감이 갈 거다. 그렇지만 무엇이 진짜 내 모습인지 알지 못해도 좋다. 그 역할 속에서 진심이면 된다. 하지만 한 인간관계가 끝이 나면 그 관계속에서의 내 배역도 사라진다. 다시는 그때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또 다른 배역으로 살아가야 한다. 영화 속 은희도 이 과정을 겪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처음엔 이질감이 들었던 은희라는 인물에 점점 정감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은희는 현오와 운철과의 관계가 폭풍이 몰아치듯 끝나버렸지만, 후회와 미련보단 의연하고 홀가분한 태도를 택한다. 비록 거짓말은 했을지라도 그들에게 은희는 늘 진심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하루 끝에 다시 만난 료헤이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연극이 끝난 배우 같았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은희는 자유로워 보였다.

나도 처음 영화를 봤을 땐 양다리를 걸치다가 들통이 난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다. 근데 영화를 여러 번 보고 난 지금은 그런 잘잘못보단 다른 것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은희가 삶이라는 연극 안에서 보여주는 자유로움과 솔직함, 의연함과 강인함이다. 이 영화가 생동감으로 넘쳐흐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가 제일 어렵다는 말에 공감한다. 꼬이기 시작하면 한순간에 끝나버리기 때문에 늘 불안하다. 그러나 은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사람 관계가 힘들고 꼬일 때도 있지만, 그 관계에 집착하고 다시 되돌리려 하기보단 배역을 빠져나와도 된다는 것이다. 남의 시선보단 자신의 마음을 따라 자유롭게 헤엄치듯 살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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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료헤이라는 인물도 꽤 흥미롭다. 영화의 첫머리에서 소설가인 료헤이가 ‘곤경에 빠진 한 여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고 말하며 영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실제로 곤경에 빠진 은희의 하루가 그려지고, 영화의 마지막은 “하지만 걱정 마세요,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라는 료헤이의 말로 마무리가 된다. 이로 미루어보아 료헤이는 은희의 하루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의 작가·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료헤이는 한 번도 해피엔딩을 써본 적이 없는 소설가이다. 그런데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가 끝난 뒤 그는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기자는 료헤이에게 왜 그리 주인공들에게 잔인하냐고 물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부끄러웠어요.
저 자신과 그 안의 인물이 점점 닮아가더니
저는 벼랑으로 떨어지고 땅에 묻히더군요.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


책 속의 인물들이 실재 인물은 아니지만 자기가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료헤이에게 던진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 인물들을 정말 잘 알고 이해한다면 과연 그들에게 그렇게까지 가혹할 수 있는가? 료헤이가 감독을 대신하는 인물이라고 상상해본다면 이 질문은 곧 감독의 고민일 것이다. 창작자로서 고민해볼 법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리처드 로티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세상에는 비관주의의 손을
들어줄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단념하고
두 손을 들어버리는 것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시나리오를 따르도록 만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엔딩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절망과 어려움을 감내하고 얻은 희망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서사 장르의 창작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값진 일이 아닐까. 료헤이도 이런 고민을 했던 건지 처음으로 해피엔딩인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라며 관객을 위로한다.


[김초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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