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글 입력 2018.07.0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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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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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이었다.
아니, 정정하자면 도망가기 전 마지막 발악이었다.

나는 고장 난 열차였다. 무엇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멈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달리기만 하는 상태였다. 비록, 스위치는 꺼져 있지만 내가 움직이는 원동력은 나의 안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 밖에서 행해지는 압력, 부담감 등이었기에 계속 움직일 수는 있었다. 힘든 걸 티 내는 성격은 아니라 아마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곤 몰랐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가 그렇게 힘들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계속 달리다간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망가지지 않기 위해 그로부터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나를 옭아매는 모든 것들로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심리적 부담감을 들키지 않고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선택한 것이 바로 교환 학생이었다. 그전부터 교환을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으니 알리바이는 충분했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고등학생 때 꿈꿨던 미국도, 영국도 아닌 전혀 관련 없는 스페인으로 교환 국가를 바꿨다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모르고 나를 신경 쓰지 않을만한 곳. 아침이면 배가 항구에 들어오는 소리에 잠을 깨고, 주말이면 해변에 나가 하루 종일 바다를 보다 올 수 있다는 평화로운 곳으로 나는 도망갈 준비를 시작했다.
 
도망을 간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일종의 합리화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더 꿀맛 같은 휴식을 누리기 위해서란 생각으로 가기 전 한 학기는 나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여 보기로 했다. 지금 돌아보니 조금 변태 같긴 하지만 그렇게 시작했던 여러 일들 중 하나가 바로 아트인사이트였다.



스위치를 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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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금방 후회했다. 이왕 시작한 것 제대로 해보자던 다짐의 유통기한은 짧았고 일주일에 한번 글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귀찮았다. 좋아하던 문화예술에 대한 글쓰기였지만 의지가 없는 상태에선 그조차도 하기 싫고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나 자신을 한계로 밀어붙여 보고자 시작했던 일들은 또 다른 올가미가 되어 있었고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중도 휴학을 고민하던 찰나에 문화 초대를 통해 공연을 보러 갔었다. 윤종신의 음악 노예라고 알려져 있던 하림과 집시앤피쉬 오케스트라의 소극장 공연이었다. 전 세계의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기에, 집시란 존재가 궁금해서 갔던 공연은 생각보다 훨씬, 훨씬 더 좋았다. 공연의 테마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떠나는 집시들과의 음악 여행이었다. 그리스, 프랑스 등 여러 나라의 집시 음악이 하림의 입담과 어우러져 잠시나마 나 자신이 여행을 떠난 집시가 된 기분이었다. 내 일상을 너무 무겁게 느끼고 있었던 때라 그런지 즐거웠던 공연이 끝날 때에는 아쉬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공연의 여운을 진하게 느끼며 리뷰를 작성할 때, 문득 공연이 내가 도망쳐서 얻고 싶었던 것들을 전해주었음을 깨달았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의 삶에 공감해주고, 음악으로 이들을 위로하며, 잠시나마 그로부터 벗어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예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 기분이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내가 느낀 것을 다른 사람들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글을 통해 좋은 문화예술이 다른 사람들에게 닿아서 그들에게 행복을 전해주기를 바라고 욕심내게 되었다. 그때부터 활동에 임하는 태도를 조금씩 바꾼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번 주는 무슨 주제로 오피니언을 쓸까 생각하게 되었고, 내가 보고 싶고 글을 쓰고 싶은 것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림의 공연은, 예술은 꺼져 있던 열차의 스위치를 켜주었다.



끝이 아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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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바로 아무렇지도 않게 힘이 불끈불끈 나는 에너자이저가 된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종종 무기력할 때가 있고 일주일마다 쓰는 글이 귀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분명 나는 변화했다. 이전의 나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움직여지는 수동적인 존재였다면 지금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도망지로 선택했던 스페인은 어느새 마음에 품고 있던 꿈을 이룰 기회의 땅으로 변했고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커졌다.

공연 하나에 이렇게 변했다고? 그렇다기엔 내가 쓰면서도 솔직히 과장 같고 그런 신화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냥 도망가기 전 마지막 발악으로 시작했던 아트인사이트는 내게 예술을 경험할 기회를 주었고 그렇게 접한 예술은 내가 변화하도록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너무 감사하다. 마지막 발악을 해보겠다고 설쳐댔던 과거의 내가, 기회를 준 아트인사이트가, 예술이 가지고 있는 따스한 힘이.

그래서 앞으로 더 나아가고자 한다. 비록 4개월간의 아트인사이트 활동은 끝이 났고 나는 예정대로 스페인으로 떠난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이 아닌 기회를 잡으러 가는 것이기에 이 끝은 마침표가 아닌 새로운 문장을 연결해주는 쉼표가 될 것이다.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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