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angle] Episode 2. 야자수 : 초여름

내게 처음으로 초여름을 선물해준 작품이자, 꿈과 나의 합작
글 입력 2018.06.14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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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화가가 친구와 커피를 마시면서 전날 밤에 꾼 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생생해서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정확하게 떠오르는 그런 꿈이었다. 한 화랑에 들어가 둘러보니, 벽에 너무나도 아름답고 열정적인 놀라운 그림들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꿈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 화가는 말한다. "그런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텐데"

"잠깐!" 그의 꿈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소리쳤다. "모르겠나? 그 그림들은 바로 자네의 그림들일세. 바로 자네의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자네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그것들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누가 그릴 수 있을까?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中
by. 데이비드 베일즈 · 테드 올랜드
(원제: Art & Fear)


적어도 나는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뻔한 대답인가. 그래서 나는 그렸다. 책 속의 화가처럼 놀랍고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느낌이 든 건 아니지만 그냥 안 그리면 후회할 것 같아서. 안 그리면 그릴 때 까지 계속 내 머리 속에 나타날 것 같아서.


*

조금은 드러나지 않은,
감각만 있을 수 있는 이야기.
거기에 톡톡 조금의 단단한 생각을 뿌리고
짙어지는 햇빛에 구워낸다


초록 파랑
따뜻함
애매함
그대로

'초여름'


Epi2_title.jpg
 


{Untangle}
Episode 2. 야자수 : 초여름



[ 4월 10일 ]

꿈.

정말,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잠만 자는 날, 깨고 자고를 반복하는 날이면 적어도 세 편, 네 편씩 꿈을 꾼다. 사실 평소에도 두 편씩은 꾸는 것 같다. 가끔 악몽이 오긴 하지만, 나는 꿈꾸는 걸 즐기는 편이다. 생생하게 전체가 기억나는 꿈은 많이 없으나 인상 깊은 장면은 며칠 간 마음에 두기도 한다.

특히 낮잠을 잘 때 종종 일어나는 상태가 있는데, 꿈이랑 현실 딱 중간에서 애매하게 깬 순간에(?) 내 생각대로 다시 꿈을 이어나갈 때가 있다. 그렇게 한 달 전인가 낮잠을 자면서 그러다가 꿈에서 그림을 그렸다. 내가 자는 모습을 그렸는데, 내 의도대로라면 전혀 나올 수 없는 이미지가 나와서 새삼 흥미로우면서도 묘한 느낌이었다. 내가 그렸지만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이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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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그린 그림 1 - 나 : 낮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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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어떻게 자는 모습이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이 그림이야 말로 나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서 아직 충분한 설명을 위한 고민을 하지 않은 상태다. 설명하자면 몽롱함의 최고를 찍은 순간 내가 감각한 나의 잠자는 자세다. 구체적인 설명이라면 나의 어깨, 머리, 그리고 팔을 그렸다고나 할까. 흠 내가 말해도 너무 불친절한 설명이다.


*


야자수

그러다 이틀 전날 밤, 또 꿈에서 그림을 그렸다.

꿈에서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야자수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아마 자기 전에 스쳐가며 본 한 사진작가의 야자수 사진이 인상 깊었나 보다. 꿈에서 나는 왜 야자수를 일자로만 그리느냐고 질문하다가 360도로 한번 꺾어 버렸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검은 선과 흰색 면을 이용해서 이미지를 완성한 채 꿈에서 깨어났다.

정말 알 수 없다. 내가 현실에서 떠올린 이미지들은 바로 메모든 스케치든 해두지 않으면 점점 흐릿해지는데 꿈에서 그린 건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내가 그리는 그림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 것으로 완성되는 데도 특별한 꾸밈없는 그 자체로 만족스러움을 느낀다. 현실에서 떠올린 걸 그릴 때에는 빈 공간을 채우고 채워야 만족하는 것과는 반대로.

…….

나도 알 수 없는 나
라는 게 있는 걸까. 



[ 4월 20일 ]

아직 시험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남은 일주일의 시험기간을 위해 오늘 하루는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꿈을 꾼 그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급하게 그려두었던 이미지를 다시 펼쳤다.
지금도 마음에 든다. 딱 좋다. 샤프부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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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야자수를 그리고 있자니 여름이 떠오른다. 짙은 초록색과 눈이 따갑도록 햇빛을 반사하는 밝은 푸른빛의 바다색이 만나있는 장면을 생각해본다. 내겐 아직 상상 속에 있는 장면이다.

마침 오늘은 지난날들과 달리 초여름 날씨였다. 버스 안에서 미지근한 공기와 전보다는 더 따뜻해진 햇빛을 느끼며 곧 있으면 여름이겠구나 웅얼거렸다. 입에서 나오는 더운 입김이 괜히 버스 안을 더 덥게 만드는 기분이 들었다. 창문 밖의 하늘은 구름조차 없는 파란색. 파란색이 왠지 따뜻해 보였다.

마침 과제를 하느라 새벽 늦게 잠들어서, 그 조금 더 높아진 온도의 호흡이 나를 잠재우려 했다. 풀린 눈으로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나른함이 뭔가 좋았다. 이번 해 들어 처음으로 느끼는 나를 감싸는 더운 공기뿐인 그 순간과 조금의 따가움이.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 미지근하지도 덥지도 않았다. 조금 더 온도가 높은 그 사이, 그 애매함. 굳이 애매한 그 사이를 말하는 것뿐인데 괜히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미지근하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온기라고.

애매함.
여백이 이어지다가 그냥 갑자기 애매한 사이의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소중한 것이 아닐까 라며, 생각이 들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너무 즐거운 날은 오늘 너무 즐거웠어 라고 외치는데, 그런 감정 변화를 기대 할 수 없는 날들, 그러니까 나의 평범한 일상은 그냥 아무 감각 없이 지나가 버리니까. 사실은 크게 힘들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고 그냥 그저 그렇게 보내는 날이 더 많은데.

…….

나의 일상을 유지해주는 미지근한 나의 시간들을 좀 더 읊어본다.
오늘 하루 어땠냐고 잠시 내게 물어본다.


*


2.jpg
 

생각을 굴리다 보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준비 작업이 끝났다.

다만 열흘 동안이나 그림에 마음을 두지 못한 것이 계속 신경 쓰였다. 내가 꿈속에서 처음 보고 느낀 그대로를 그렸으면 했는데, 별 다른 방법 없이 지금의 내가 꿈속의 이미지에 조금이라도 덜 손대기를 바라며 옮겨 그려야만 했다. 그때의 감정과 상상 그대로. 지금 나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그대로'의 정도를 조절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그림을 그리며 생각한 것들을 글로 옮기다 보니, 이 그림이 좀 더 따뜻해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자신은 없지만, 그런 소소한 소원 하나씩 품어보면 뭐 어때. 오늘 본 파란색의 따뜻함. 내가 꿈꾼 날 잠들기 전 본 야자수 사진도 진한 파란 하늘에 높게 자리 잡은 야자수의 모습이었다. 따뜻한 파란색. 마음 어딘가에 담아두기로 한다.

내일 완성을 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다. 얼른 완성된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사실이다.
다시 공부하러 가야 한다.



[ 4월 21일 ]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오전 일찍 카페에 왔는데도 이미 자리가 꽉 찼다. 부지런한 사람들.
오늘은 그림부터 그리기로 했다. 앉자마자 스케치북을 꺼내고 오늘 쓸 펜들을 골랐다.

이 글을 쓰고 나서 그림 그리는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아니 사실 크게 바뀐 건 없다. 종이와 펜뿐만 아니라 글을 쓸 화면과 키보드도 같이 책상 위에 올라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겐 뭔가 큰 변화를 맞이한 것만 같다.

운명인지 우연인지 꿈에서 그린 야자수를 다시 손대기 시작한 어제부터 초여름 느낌이다. 평소보다 더 얇게 입고 나왔는데도 땀이 맺혔다. 이럴 수가. 버스 안에서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있는 분을 보았다. 벌써 여름인가 싶었다. 어제처럼 미지근한 더위를 느끼는 건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인상을 살짝 구기며 한숨을 쉰다. 그 자체가 정말 전보다 꽤 많이 더워졌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렇게 또 봄을 아쉬워한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따뜻함이라는 애매함이 그리워진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커피도 따뜻한 건 입에 대기 힘들겠구나. 차가운 커피를 입에 굴리며 이 글을 쓰다 보니 떠오른다. 따뜻한 아인슈페너를 더 많이 마셨어야 했는데,

하여튼 다시 펜을 든다.


*


잠깐 아트인사이트에 들러 새로 올라온 글들을 읽었다. 내 글도 헤드라인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이따금씩 내 글이 헤드라인에 자리 잡는 게 과분하게 느껴진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이 너무 많다. 언제쯤 내가 만족스러운 글을 멋지게 완성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내가 가진 이 욕심이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익숙하다. 시간이 약이다. 아니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떠오른 김에 다시 생각해보니 이 익숙함이라는 변화는 좋다.

무엇보다 내가 바라는 성장이라는 건, 그 성장의 순간은 아무런 감각 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나를 다독여주곤 한다. 한참 멀리 나아가고 나서야, 그제야 나는 늘 내가 성장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했으니까. 그렇게 여기까지 온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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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그림이라 그런지 선을 금방 땄다. 조금 더 선명해졌다.

새삼 속으로 짧은 웃음이 나왔다. 대체 왜 나는 펜을 옮기면서 생각이 왜 이리 많으냐고. 그래도 내겐 고마운 시간이다. 언제 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 공부할 때는 공부 생각만 하고 집에 돌아갈 때는 저녁으로 뭐 먹을지 고민하고 내일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정리하고 하여튼 다른 평범한 일을 할 때는 그 일만 생각하지 나는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다.

잉크가 번지는 건 절대 싫다. 지우개를 사용하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며 글을 쓰기로 했다.


*


이제 지우개를 들었다.
연필 선들이 다 지워지고 검은 펜 선만 남은 내 그림은... 멋없다. 빨리 채워야 한다.
얼른 허한 공간을 채우란 말이야! 그림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다시 얼른 펜을 든다.


*


남들 같지 않게 왜 그렇게 괜히 생각이 많은 거야?
넌 아직 스물두 살이잖아, 왜 그렇게 복잡한 생각들에 갇혀 있는 거야?
굳이 그래야 해? 왜 이렇게 슬프고, 고민하고, 혼자 버티고 그런 거야?

…….

아직 스물두 살이든
벌써 스물두 살이든
이건 내 스물두 살이니까.

요즘 드는 나를 향한 회의적인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이건 내 스물두 살 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어떻든. 나는 그래.

그리고 이게 남들 같지 않은 건가?
나는 모르겠어.

…….

남들 같지 않다는 게 뭐지


*


조금의 변화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많은 시간이 지나버려서 꿈에서 봤던 이미지랑 느낌이 너무나 흐릿했다. 오히려 이제는 지금 감각하는 여름의 기운에 기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림을 보며 고민하다가 조금의 패턴을 그리기로 했다. 반복적인 선을 긋는다는 게 남들이 보기에는 한 면을 채우려는 노동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이 때야 말로 내 시간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순간이다. 나를 이루는 시간을 말이다. 물론 외부적인 시간은 그대로 흘러가겠지만,

연필로 선을 미리 그릴 때만 해도 야자수 잎에 잎줄기를 흰 선으로 그려 넣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다시 떠올랐다. 잎은 무조건 검은색으로 메워야 한다고, 그것만은 확실히 외치고 있었던 꿈속을. 큰일 날 뻔했다. 나는 미리 그어둔 잎줄기를 빠르게 잎과 같은 검은색으로 채워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몇 개의 공간을 채워 나갔다. 약간의 집중이 가미된 멍한 순간이라고 해야 하나, 이 상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펜을 긋는 동안 멍 때린다는 것은 그림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상태야 말로 내가 느끼는 감성, 혹은 감정 그 자체로 표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


너무 좋다. 딱 그 느낌. 완성하고 나서야 잠깐 꿈에서 봤던 이미지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렇다면 성공이다. 손을 완전히 뗐다. 내가 느낀 초여름의 호흡도 느껴지는 것 같다. 내 그림이라서 내가 그렸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겠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생각보다 완성작이 내 처음에 느꼈던 그대로 나온 적이 많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더 기뻤다. 살짝 흥분된다.

진짜 끝,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새긴다.
그리고 제목을 정해야 했다. 우선 "꿈에서 그린 그림2"가 된다. 얼떨결에 연작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3이 언제 나올지는 너무나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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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그린 그림 2 - 야자수 :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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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그리 꾸미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떠올렸다고 하기에는 꿈에서의 내가 보여준 것을 옮긴 것 같은, 내가 그린 건데 내가 그린 것 같지 않은 내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복잡하긴 한데 간단히 말하면 그랬다. 생각을 조금하다가 간단하게 저번 작품의 제목 형식을 빌린다. <야자수 : 초여름> 으로 한다.

이렇게 온전히 이 작품과의 시간을 매듭지어 본다. 내게 처음으로 초여름을 선물해준 작품이자 꿈과 나의 합작. 올해의 여름을 이 그림으로 미리 느낀다. 여름. 마지막으로 파란색의 따뜻함을 떠올려본다.



*

next.

12월 옆에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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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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