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장 완벽한 피해자는 아닌, 제시카의 진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6.08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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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 시리즈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드라마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니 이왕이면 보고 오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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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8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 시즌 2가 방영됐다. 워낙 유명하고 명작으로 유명한 시리즈니, 두 시즌의 줄거리를 길게 늘어놓진 않겠다. 드라마는 평범한 고등학생 해나 베이커의 자살 이후 학교와 아이들, 부모님의 모습을 다룬다. 시즌 1은 해나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내가 자살한) 13가지 이유'를 따라갔다면, 시즌 2는 법정에 선 리버티 고등학교 학생들이 들려주는 해나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전반적인 주제는 '순수하고 예민하고 감성적인 피해자 해나' 프레임 부수기 정도. 왓챠 리뷰 같은 데를 보면 '내가 알던 해나가 아니어서' 시즌 2에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던데, 루루루 시즌 2는 애초에 그런 사람들 저격하려고 만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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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글에서는 해나가 아닌 다른 등장인물, 제시카 데이비스 얘기를 하려고 한다. 예전부터 루루루를 봐온 시청자라면 제시카의 스토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시즌 1에서는 테이프 2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다. 제시카가 겪는 문제는 시즌 2에 들어서면서 더 복잡하고 무거워며 그로 인한 상처는 곪아간다. 천진하고 거침없는 성격, 앳된 얼굴에 유머감각을 갖춘 리버티 하이스쿨의 치어리더 제스는 전형적인 popular kid, 핵인싸였다. 또 다른 주인공 클레이의 호흡에 맞춰 해나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을 알아갔던 시청자 입장에선 제스가 겪는 좌절과 우울을 보며 함께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뉴스 기사와 SNS를 통해 진행되는 사건을 통해 제시카를 알아갔다면 어땠을까.


* 아래 내용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 등장인물 중 제시카가 겪은 일이 사회에 알려질 때 일어날 법한 해석과 반응들을 임의로 재구성한 것으로, 드라마의 실제 내용 진행과 다릅니다.


1. 2018년 초, 제시카 데이비스, 브라이스 워커의 성폭행 사실을 폭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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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 후 자신을 둘러싼 더러운 소문에 힘들어하던 제시카 데이비스가 마침내 경찰을 찾아간다. 한 학년 위의 운동선수 브라이스 워커에게 지난여름 있었던 개강 파티에서 강간당했음을 밝힌다. 브라이스가 혐의를 전격 부인하며 이들은 법적 공방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SNS 상에는 리버티 하이의 간판스타 워커가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제시카의 용기 있는 폭로를 응원한다.


2. 제시카 데이비스가 증인으로 내세운 저스틴 폴리의 신상이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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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의 폭로를 뒷받침한 결정적인 증거는 제시카의 전 남자 친구이자(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현 남자 친구), 브라이스 워커의 절친인 저스틴 폴리의 증언이었다. 그는 2017년 여름 있었던 파티 내내 제시카와 붙어 있었으며, 술에 취한 제시카를 2층 방 침대에 재우고 나왔으나 브라이스 워커가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를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증언을 한다.

일각에서는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파티에 도움을 청할 사람들이 많았는데 브라이스를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이 의심스럽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놨다. 뒤이어 저스틴과 제시카는 모두 지난해 있었던 동급생 해나 베이커의 자살에 관련된 재판에서 증인 출석을 요구받았다는 점이 알려졌다. 그러나 증언을 한 사람은 제시카뿐이었다는 점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저스틴 폴리의 신상을 캐기 시작한다. 저스틴이 재판 출석을 거부하고 몇 개월 간 가출 후 잠적했다는 것과 헤로인 중독 치료를 받고 있단 점, 어머니 역시 마약 중독자며 함께 사는 양아버지(어머니의 남자 친구)는 딜러라는 점이 밝혀진다. 어릴 때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렸으며, 현재 가족과 의절해 생활고가 심각한 수준인 것 역시 밝혀진다.

해당 기사에 달린
댓글 1: 음.. 일단 사태를 더 지켜봐야겠네요. 진짜 피해를 당한 것이라면 힘들겠지만.. 저런 남자랑 만났던 것도 솔직히 이해가 안 되고ㅎㅎ
댓글 2: 이런 댓글 달면 또 욕먹겠지만 솔직히 남자애랑 여자애가 짜고 한탕 잡으려는 것 아님? 보니까 가해자로 지목된 애가 학교에서 평판도 좋고 잘 나가는 운동선수에 집안도 빵빵하다는데.
댓글 3: 일단 중립 유지하겠습니다.


3. 제시카, 번복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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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 베이커와 리버티 하이스쿨의 재판 과정에 다시 관심이 쏠리며, 당시 제시카가 파티에서 어떤 일도 겪지 않았다고 증언한 점이 알려진다. 순식간에 논의의 프레임이 바뀐다. 브라이스 워커의 성폭행 사실 폭로와 베이커가 재판에서 했던 증언 중 하나는 거짓일 수밖에 없음을 조목조목 짚은 분석글이 등장한다. 한 소송 전문 기자는 일간지에 '피해자 감싸기로 정당화되는 법정모독과 위증'이라는 칼럼을 게재한다. 여성 단체가 성폭행 피해자가 과거에 성폭행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는 점을 공격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놓자 이에 정면 반박한 것이다. 성폭행 피해자의 권리와 법정에서 진실을 말할 경우가 충돌할 경우 어떤 가치를 우선해야 하는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제시카가 학교에서 꾸준히 '파티에서 필름이 끊겼었다'라고 주장해 왔다는 사실을 누군가(아마도 리버티 재학생이) 밝히면서 '아침드라마도 아니고, 안 나던 기억이 갑자기 돌아오냐'는 비아냥거림이 생긴다. 이런 태세 전환을 보니, 가출해 연락이 끊겼던 전 남자 친구(저스틴)가 돈을 노리고 브라이스에게 강간 혐의를 씌울 것을 제안한 것이 분명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론은 '피해자가 성폭행 사실을 밝히기 힘들었을 것이며, 아직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4. 작년 여름 파티 사진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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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리버티에 재학 중이며, 논란이 된 파티 현장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익명의 글이 게시판에 올라온다. 학생증을 인증했다. 거기다 '저스틴과 제시카는 잘 나가는 애들이고 운동선수에 치어리더 커플이라 그 무리의 보복이 두렵다. 하지만 그 파티에는 학생들 절반은 갔었고 다 취했으며 제시카와 저스틴은 하도 난리였어서 그 파티에서 둘을 못 본 사람이 없다. 그러니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할 것이라 확신해 글을 올린다'는 말로 글을 시작해 신뢰감을 높였다. 그 사람이 게시한 사진을 보았을 때 파티에 있었던 사람이 맞는 것 같긴 하다.

파티는 제시카의 집에서 열렸으며, 7시부터 운동부 학생들과 파티를 준비하며 제시카는 몹시 들떠 있었고, 만난 지 두 달 된 남자 친구 저스틴과 파티 내내 격렬한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것. 게다가 파티가 열린 지 몇 시간 후부터 제시카는 이미 너무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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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들은 1층 소파에서부터 격렬한 키스를 나눴고, 파티 내내 붙어 있었다고 한다. 게시자는 '솔직히 제시카가 그 날 파티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을 믿기 힘들다. 저스틴과 제시카는 함께 2층으로 올라갔고, 그전까지 브라이스 워커는 내내 1층에 있었다. 브라이스가 위로 올라가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잠시 뒤 저스틴과 브라이스는 거의 동시에 내려왔다.'라고 썼다.

해당 기사에 달린
댓글 1: 와 요즘 고등학생들 이러고 노는구나.. 수위가..
댓글 2: 취해서 문란하게 놀았다고 해서 강간 피해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댓글 3: @댓글 2// 아직 혐의 밝혀진 것도 아니지 않나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는데요.
댓글 4: 저러니 약쟁이 남자 친구 제안에 넘어갔죠. 예쁘고 몸매도 좋으니 법정에서 눈물 좀 보이고 돈 많은 피의자 협박해서 두둑이 챙길 수 있으니까.

이전까지만 해도 제시카의 말을 믿는 분위기던 여초 사이트와 카페 등의 여론도 서서히 바뀌었다. 비교적 온건한 사이트에서는 '피해자의 평소 행실을 문제 삼아선 안됩니다'라는 글과 '어머, 파티 유출 사진 보니.. 솔직히 편견인 건 알지만, 그 중독자 남자 친구 만났다는 거나 학교에서의 평판이 이해가 안 가진 않네요..'라는 글이 비슷한 비율로 올라온다. 그래도 저런 사진으로 논점을 흐리지 말자는 글에 다들 동의는 하는 것 같다. 저급한 사이트에서는 '와 법정 사진만 보고 조신한 앤 줄 알았는데...ㄷㄷ', '파티 고소녀 노출 사진'이란 제목으로 글이 올라온다. 둘이 찍은 은밀한 영상이 있다는 유언비어가 떠돈다. 자극적인 제목을 쓴 낚시성 기사에는 'xxxxxx@naver.com 영상 공유 좀 부탁드립니다' 하는 댓글이 달린다. '동영상 유출이 장난이냐, 이게 다 2차 가해다'라는 지적에는 '어차피 진짜 받을 생각은 없었고 다 장난이며 메일 주소도 거짓인데 왜 그러냐, 혹시 본인?'이라는 답글이 달린다.


5. 파티 사진을 기점으로 시작된 사생활 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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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 사진이 터진 것을 기점으로 제시카의 학교 생활에 대한 목격담과 증언이 터져 나온다. 일부는 사진과 인증 등을 포함한 것이고 일부는 사실 확인이 어려운 것들이다. 여름 파티 이후에도 가해자로 지목된 브라이스가 속한 무리 앞에서 대담하게 남자 친구를 유혹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는 목격담이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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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막 나가는 양아치인 저스틴조차도 여자 친구를 감당하기 힘들어했다는 후문. 저스틴이 학교에서의 애정행각을 허락하지 않자 연극부 소품을 던지고 전구를 부수는 등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해당 글에 달린
댓글 1. 나도 같은 학교 다니는 사람인데 솔직히 이번 사건 터지기 전에도 평소 행실 그다지.. 대낮에 학교에서 남친 끌고 가는데 좀 제정신 아닌 것 같더라.


6. 폭로 직전에 만났던 새로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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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에 성폭행을 당하고 매일을 지옥같이 보냈다고 말한 제시카였다. 그러나 그녀가 고소를 진행하기 직전, 최근에 새로 어울린 친구와 갔던 파티에서 새로운 남자를 만나 키스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주변에서 장난 섞인 야유와 환호를 보냈지만 당당히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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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친한 친구가 성폭행 피해자라는 한 사람이 쓴 글이 SNS에서 널리 공유됐다.

'제 친구는 십 년도 전에 '몹쓸 짓'을 당하고 괴로워하며 평생을 우울증을 앓다 작년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는 좋은 만남을 가질 기회가 몇 번 있었고, 그때마다 저는 정말 좋은 사람 같으니 한 번 만나보고, 과거의 상처를 극복해 보라고 눈물로 부탁했지만, 역시 안 되더라고요. 이성과 눈만 마주쳐도 몸을 떨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런 선택을.... 누구보다 친구를 가까이서 지켜봐 온 제가 압니다. 진정한 피해자라면,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 만에 저렇게 대담한 행각을 할 수가 없어요. 제 친구는 평생을 고통받았던 일인데, 누군가는 그걸 단순한 돈벌이로 이용하고 있다는 게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요지는 대충 이러한데, 글쓴이의 필력이 너무 좋아 글을 읽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분노했다고 한다.


7. 가해자와 아무렇지 않게 어울렸던 제시카


제시카에 대한 여론이 '그래도 피해자다', '평소 행실을 보니 그런 일을 당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애초에 당한 것도 아닌 것 같다'로 나뉘어 인터넷상에서의 진실 공방이 치열해졌다. 아는 사람이 리버티 고등학교에 다녔었다느니, 제시카의 유치원 동창이었느니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한두 마디씩의 사실을 보탠다. 그동안 드러난 사실들로 제시카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듯했지만, 너무 믿을 수 없는 정보들이 터져 나오니 그에 대한 반발로 동정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뒤이어 브라이스의 최측근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올린 사진과 글로 모든 논란은 잠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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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를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하기 불과 몇 주 전에 제시카와 브라이스가 저택에서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자 친구 저스틴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제시카는 심지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브라이스의 무릎에 가 앉으며 남자 친구를 도발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여론은 험악해질 대로 험악해졌다. 제시카가 여름 파티 이후에 학교에서 보였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거나 새로운 남자를 만났던 것 모두 피해 사실을 잊으려는 시도였다며 제시카를 옹호하던 이들도 더 이상은 힘들겠다고 느낀 것 같다. 몇몇 사람은 피해자가 피해자답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비난해선 안 된다고 끝까지 주장했지만, 여기에 이성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제시카를 감싸지는 않았다. 이들은 '피해자 제시카'에게 이미 질리고 정이 떨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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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사실이 밝혀졌다. 브라이스는 1학년 학생에게 정기적으로 대마를 구입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제스는 브라이스가 자신의 차 안에서 거래를 끝내자마자 보조석에 올라탄다. 그리고 학교에서든 어디서든 재미를 좀 보자며 브라이스를 부추긴다. 브라이스가 자신의 집에 가자고 제안했고, 제스는 부모님이 이틀간 집을 비우신다며 브라이스를 본인의 집으로 데려갔다. 이 모든 일은 여름 파티로부터 불과 몇 주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 1: 처음에야 몰랐지만 이만큼 까발려지고 나서 약 하는 거 알게 되니 놀랍지도 않다.
댓글 2: 얘 아직도 기사 나오네


8. 판결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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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 데이비스와 브라이스 워커의 법정 공방이 끝났다. 브라이스의 혐의가 인정됐고 판결이 내려졌다. 판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모두에게 비극입니다. 판사로서 제 역할은 양쪽을 다 살피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법상 모든 판사는 초범에 대해 갱생과 보호 관찰을 고려해야 하죠. 이 두 젊은이가 자신의 삶과 선택을 천천히 살펴보길 바랍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피해는 지양하고 싶군요. 워커 군, 당신이 바른생활을 하길 기대하며 3개월간 보호 관찰을 선고합니다."

최초의 폭로가 있은 뒤 시간이 꽤 흘렀다. 사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진실공방에 대중은 금방 지쳤다. 판결에 대한 짧은 기사 몇 개가 나왔다.


9. 한 달 뒤, 리버티 고등학교의 스프링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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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끝나고 한 달 뒤, 리버티 하이스쿨에서는 스프링 파티가 열렸다. 제시카는 저스틴과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동급생인 알렉스와 파티에 갔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를 때 둘은 키스했다. 하지만 저스틴에 대한 끌림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파티 뒤편 라커룸에서 따로 만나 자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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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폭행 폭로와 이를 둘러싼 진실공방이 위와 같이 진행되는 것에도 상당히 익숙하다. 제시된 제시카의 이야기가 현실이었다면, 그리고 불특정 다수에게 제시카의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시간차를 두고 공개됐다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졌을지 상상해봤다.

물론 우리는 제시카 데이비스를 난잡한 파티광에 허언증 있는 꽃뱀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시청자는 제시카가 실제로 파티에서 브라이스에게 강간당했음을 알고 있다. 어렴풋한 그 기억이 현실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남자 친구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혼란을 겪었는지도 알고 있다.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두 시즌에 거쳐 제시카의 아픔에 공감하고 같이 아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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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는 자살 전 테이프를 남겨 성폭행 가해자로 브라이스를 지목했던 해나가 법정에서 낱낱이 까발려지고 망가지는 모습을 본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완벽한 백인인 해나조차도 저런 꼴을 당하는데, 자신은 브라이스에게 맞서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제시카가 베이커 가의 재판에서 증언할 때 용기를 내지 못 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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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는 잘 나가는 무리에 끼고 싶었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당당했다. 좋고 싫음이 분명했고 누군가와 연인 관계에 있을 때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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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었고 사랑했던 저스틴은 그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시카는 어렴풋이 남아있는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사실 진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저스틴의 말이 진실이길 원했던 것이다. 테이프를 돌려 들은 아이들에게 해나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제시카는 누가 정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더 괜찮은 척 저스틴에게 대담한 행동을 했고, 그러면서도 저스틴이 미워 브라이스에게 들이대며 저스틴을 도발했다.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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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을 때 걸핏하면 울었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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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을 하다가도 그날 일이 떠오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싶었고, 새로 사귄 친구가 소개하는 무리를 만났다. 마음이 잘 통하는 남자애를 만났지만 막상 데이트를 앞두고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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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도 사람들은 제시카를 믿어주지 않았다. 자신이 완벽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

2018년의 대중은 언론 보도가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프레이밍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재단된 진실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학교에서부터 배운다. 대중이 (설사 사실이 아니더라도) 연예계 특종 뉴스가 뜨면 정치계 비리를 덮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기사를 쓴 기자가 특정 집단과 유착관계가 있는지 알아내려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미 많이 데었기 때문. 근대까지의 대중은 엘리트 집단이 제공하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민의식이 성장하고 권리에 대한 의식이 뚜렷해지며 무엇보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정보 생산과 확산의 주체가 된다. 정보는 즉각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진다. 따라서 이 시대의 프레이밍은 더 이상 언론사나 정치인, 특정 이익 집단 등의 단일한 주체만의 특권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가 특정 사건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자신의 의견을 쏟아낼 때도 프레임은 형성된다. 주인공의 삶 중 어떤 부분이 어떤 타이밍에 얼마만큼 공개되는가에 따라 판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의도가 없는 프레이밍은 편견의 기제에 따라 작동하기 쉽다. 힘에 의한 프레이밍보다 은밀하며 발각되기 어렵다.


"
나에 대한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어떤 이야기가 제일 인기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가 제일 인기 없는지는 알아.

진실.
진실이 늘 최고나 최악은 아니거든.
바로 그 중간쯤이지.



[이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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