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안네의 꿈과 위로 [여행]

암스테르담과 안네프랑크 하우스
글 입력 2018.04.17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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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에 가고 싶다!”

고등학교 3학년의 내가, 수능을 두 달여 앞두고 품었던 꿈이었다. ‘학습실’이라 불리는 좁은 교실 안 내 책상에는, ‘안네의 일기’의 영문판 < The Diary of a Young Girl >이 꽂혀 있었다. 그 책을 왜 샀는지는 기억이 흐릿하다. 그 책에서 인용된 짤막한 문구 하나에 감명을 받아서, 이왕 읽을 거 영어공부나 하자는 생각으로 영문판을 구입했던 것 같다. 영어라 당연히 읽는 속도도 느려서, 책상에 1년 가까이 꽂아두고 공부에 지겨울 때마다 꺼내서 야금야금 읽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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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ary of a Young Girl.
Anne Frank. Penguin. 2000.


안네는 1942년 6월, 만 열 세 살 때부터 1944년 8월까지 일기를 썼다. 그 사이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안네의 가족들은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하고, 그들을 포함한 8명의 유대인들과 함께 은신처에서 생활했다. 비좁고 답답한 공간에서 여덟 명의 식구들과 숨죽이며 살며,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는 안네의 모습이 그 당시의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3년 동안 이른 아침부터 깜깜한 밤까지 학교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세상 빛을 볼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의 모습. 물론 안네가 처했던 전쟁 상황에 비하면 내 것은 부끄러울 정도로 철없는 어리광에 불과했지만, 그 아이가 느낀 슬픔, 답답함, 외로움에 공감하며 깊은 위로를 받았다.

누군가는 고등학교 시절이 당시에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돌아가고픈 시절이라고 했다. 나는 오히려 반대다. 그 당시에는 조금 답답하긴 했어도 친구들과 장난도 치고 매일 조금씩 세운 계획을 다 실천하는 뿌듯함으로 그럭저럭 버텼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그걸 어떻게 견뎌왔나 싶다. 아직 고등학생 시절이 미화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라 그런 것 같다. 아직은 내게 갑자기 주어진 무한한 자유에 온전한 책임을 질 필요는 없는 어중간한 시기라 그저 지금이 행복한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참 외로웠다. 하루 종일 수많은 친구들과 선생님, 가족들과 함께 했지만, 사람들 속에 있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안네가 여덟 명의 사람들과 몇 년을 부대끼며 살았지만, 결국 외로움을 달래줄 일기장 키티를 찾았듯이. 그 시절 나는 무엇을 위해 내가 학습실에 있어야 했는지 끊임없이 고민했었다. 명문대 진학, 대기업 취직, 이런 거 말고, 인생에서 무얼 이루고 싶은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내달리는 기분이 싫었다. 얼른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고, 내신·수능 공부 말고 내가 진짜 즐길 수 있는 것이 뭔지 찾고 싶어 조바심이 나는데, 그 학습실과, 그 학교, 그리고 그 지방 도시는 숨을 턱 막히게 했다. 한 번 우울해지기 시작하면 오랫동안 쌓여있던 집안 문제가 생각났고, 학습실 구석에서 몰래 눈물을 흘리는 날들이 잦아졌다. 바깥 날씨가 좋은 날이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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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안네는 오죽했을까. 그래도 나는 하교할 때면 차갑지만 신선한 밤공기를 마시며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미래를 그릴 수 있었는데, 안네는 언제 어떻게 끝이 날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 앞에서, 다락방 구석에 달린 조그마한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보아야 했다. 여러 미디어에서는 안네를 ‘불우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낙관을 찾는’ 이미지로 뭉뚱그려 소비하곤 하지만, 그의 일기를 전부 보면,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상황에 대해 낙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한없이 우울해하기도 하는 평범한 10대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남긴 희망의 문장들이 더욱 빛이 난다.


“But I also looked out of the open window, letting my eyes roam over a large part of Amsterdam, over the rooftops and on to the horizon, a strip of blue so pale it was almost invisible.”

하지만 나는 열린 창문을 통해서 밖을 봤어. 암스테르담의 드넓은 풍경을 눈으로 훑으면서, 지붕들을 넘어 지평선까지, 너무 푸르러서 거의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하늘을 봤지.

“‘As long as this exists,’ I thought, ‘this sunshine and this cloudless sky, and as long as I can enjoy it, how can I be sad?’”

‘이런 것들이 세상에 있다면,’ 난 생각했지, ‘이런 햇살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있다면, 그리고 내가 이것들을 즐길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슬플 수 있겠어?’

 
이 구절을 읽고 문득, 암스테르담에 꼭 가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작은 소녀가, 가장 위험하고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웃음과 기쁨과 희망의 글을 썼던 공간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스무 살이 되었다. 대학생 새내기로서 마음껏 즐기고 누리며 어느 틈에 안네에 대한 기억과 암스테르담에 대한 로망은 무뎌졌다. 그 해 여름 유럽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갈 기회가 생겼을 때가 되어서야 번쩍, ‘안네 프랑크’라는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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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Chae


그날의 암스테르담은 공기가 무척 상쾌했다. 산뜻한 햇살 아래로 크고 작은 운하들이 도로마다 뻗어있고, 아기자기한 집들이 마주보고 있는 사이로 자전거를 탄 주민들이 여유롭게 지나다녔다. 운하를 잇는 다리마다 꽃바구니로 장식되어 있고, 높지 않은 건물들 위로 청명한 하늘이 있는 풍경은, ‘내가 이렇게나 자유롭구나’ 하고 일깨워주었다. 색색깔의 건물들을 굽이굽이 지나자, 평범해 보이는 검은색 집 앞으로 눈에 띄게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그곳이 바로 안네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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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집. Anne Frank Huis.
안네의 가족이 실제로 은신해있던 집과
그 옆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Emily Chae


전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의 길고 긴 줄을 기다려서 집 안으로 들어서자 그의 은신처와 다락방, 그가 모으던 포스터, 글을 쓰던 책상, 일기장, 흑백 사진들, 그를 알던 지인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드디어 안네를 만날 수 있었다. 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비좁았고 계단은 가팔랐다. 이 방 안에서 내가 수험생 시절 열심히 읽었던 일기가 쓰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관광지였지만 분위기는 엄숙했고, 소근 대는 말소리와 비좁은 은신처의 바닥을 밟아 삐걱대는 소리만이 방안을 채웠다. 모두가 안네의 집 박물관에 전시된 자료들과 영상을 주의 깊게 보고, 한 소녀의 짧은 생애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의 눈물의 역사를 조용히 마음에 새겼다.

그곳을 둘러보며 새삼 느꼈다. 안네에게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나 하나 뿐이 아니라는 걸. 그가 다락방의 창문을 통해 암스테르담을 보면서, ‘그래, 어떻게 슬플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듯이, 안네 자신 또한 시공간을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래, 슬퍼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눈부신 본보기가 되었음을. 안네는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I don’t want to have lived in vain like most people… I want to go on living even after my death!”

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의미 없이 살다가 가고 싶진 않아. 나는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고 싶어!

 
그 애는 어디선가 지금의 암스테르담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안네의 집에서 이 엽서를 가지고 온지도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진 속 안네의 눈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너는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이곳을 떠났지만, 너는 결국 꿈을 이루었구나. 너는 죽음 이후에도 살고 있구나. 네 글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또 어루만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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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Chae



책 The Diary of a Young Girl. Anne Frank. Penguin. 2000.
본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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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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